1984~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도 탈춤운동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관여한 것이니 빠뜨릴 수 없다. 나를 민문협 기획국장으로 추천한 선배를 짐작은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그간 걸어온 길에서 당연한 선택 같았다. 민문협에서 우선 로고부터 만들어 제공했고, 김도연 대표가 운영하는 '공동체'에서 <삶과 멋> 공저, <민중미술> 책을 편찬했다. <민족문화 판화달력>, <민중미술 그림엽서>, <판화 액자>, <집회현장 걸개그림> 등을 한 것이 기억이 난다. 나를 보고 '움직이는 문화상품'이라고 웃기는 별명을 황선진 국장이 지어줬다. 민문협은 여러 가지 문화상품을 냈다. <김민기 노래테이프>, <김지하 원저, 임진택 창작판소리 '오적' 창작판소리>, <겨레의 노래 겨레의 시- 성래운, 임진택> 등이 출시되었다.
민주민족통일운동협의회(민통협)으로 연대한 민문협도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 민문협 기획국장인 나도 1986년 '5.3인천 민주항쟁'에 선전물 진입 담당을 맡아 개최 날 새벽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집회현장에 잠입했던 것도 숨막히게 치열했던 경험이다. 그러나 경찰이 불법 집회라며 묵인해 주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강경진압 강경저항의 대치국면을 만든 경찰과 내무부 당국은 언론과 짜고 그날 밤부터 KBS MBC 뉴스 보도는 악선전을 시작했다. 화염병과 보도블록을 던지는 노동학생청년들을 주로 부각하며 극렬 빨갱이 집회라고 악선전하며 반독재민주전선을 와해시키려 작정을 하였다. 제도 언론기관이 총동원돼서 집회를 폭력집회로 몇 달 동안 편집영상물을 반복해서 틀어주며 거짓 선전 했다. 이런 악선전 방식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내내 계속 되었던 것이라 이때부터 나는 언론을 믿지 않게 되었다. 기자가 자발적 기레기 집단이 된 것은 1985년 인천5.3항쟁 때가 최절정기였었다. 민문협 상임대표이자 민통협 대변인인 김종철님도 수배되었다. 참 이상도 하지, 그 치열한 투쟁기에 문예창작 생산도 최절정기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시와 노래와 판화와 마당극이 거의 다 이때 1980년대 전반기에 나왔다. 그래서 1980년대 상반기를 역설적이게도 저항과 대안문예의 창조기, 한국문예의 작은 르네상스시대라고도 부른다.
자고 나면 아팠던 몸이 개운했고 예술창작은 마음에 꿈을 깃들게 했다. 내가 사람들과 사건들을 잘 잊고 사는 것도 이런 나의 삶이 만든 버릇인가? 아니면 더 어린시절부터 맞고 자라며 울분을 삭히고 잊어버리려 했던 삶의 비법이 예술에 있는 것은 아닌가?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시절은 정말 잊고 싶은 전쟁 같은 참호 속에서도 사랑도 눈물도 뜨거웠다.
늘 긴장 속에서 살았고 일을 저지르고 돌파해야 했던 시대였다. 전두환 정권 말기가 되니 독재는 권력 연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며 기승을 부렸다. 나는 신혼 초지만 모처럼 맞는 반독재민주전선에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임신한 아내를 다독이며 기획국장으로 임무 수행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민문협 2대 사무국장 유인택과 기획국장인 나는 민문협 실무의 책임자로 저들이 민문협 활동에 영장청구와 체포 시 맨 앞에서 책임 지고 먼저 감옥행을 자임해야 하는 자리였다. 결국 '우란분재' 민중불교운동협의회(여익구 회장, 서동석 총무) 집회를 도와주었던 집회용 걸개그림들이 현장 입구에서 압수되고 이 그림을 제공한 자로 나를 긴급체포했다. 아침에 출근하던 사무실 입구에서 잠복한 형사 둘에게 체포되어 팔이 꺾이고 신발이 벗겨진 채로 끌려가고 말았다. 체포 자리가 시장통이라 사람들이 많았기에 큰소리로 독재타도를 외쳤다. 체포 이유는 빌려준 그림이 불온하다는 것이며 불법 집회에 불온한 그림을 제공했다는 것이 죄명이다. 결국 <두렁>의 걸개그림들은 빼앗겨 종로서는 안 내주고 나에게 구류 25일을 때렸다. 이런 사태가 나와도 당시 예술계는 침묵을 유지할 때였다. '86년 '20대 힘전 사태'부터 표현의 자유 논쟁으로 언론에 비등해지면서 표현의 자유가 민주화운동의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1985년 경우는 민문협부터 조용하니 나도 조용히 구류를 살고 나왔다. 예술인 신체 억류와 체포와 구류가 아직 표현의 자유 억압으로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때이다.
아내가 임신 6개월 몸으로 유치장으로 면회를 오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잡혀서 재판받고 투옥되면 가족들이 모두 고생이다. 인천 5.3항쟁 투쟁에서부터 박종철고문치사사건 등 끝장으로 달려가는 시국이 되고 있었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듯하고 신혼의 삶은 팍팍하고 암담한 현실 앞에서 영웅적 투사정신을 요구하던 시절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흔들리는 인간 존재는 상처투성이로 젊은 청년들에게는 가혹한 시대였다. 계속 민주화운동 행진에서 쓰러지고 죽어간 동지들을 지켜보면서도 민주대행진을 해야 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사랑 속에 동지 모아' 란 김남주 시인의 노래처럼 노래와 춤과 이미지가 그 어떤 논리보다 힘을 주었던 저항예술의 시대였다. 나는 이념이나 사상이 투철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사람이 아니다. 나를 치유하려고 탈춤을 했고, 그 곁에 민중이 있었고, 억압의 시대에 탈춤과 풍물은 집단적 신명으로 해방감을 주었기에 문화운동 동지들과 더불어 갔다. 매 맞고 죽어가는 민주화운동 동지들 얼굴이 어른거려 그 길을 이탈할 수 없어서 간 길이다. 예술이 이런 악독한 독재 사회를 파열구라도 낼 수 있다면 어깨 걸고 한발 한발 나가 끝내는 민주주의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것을 우리는 민중문화운동이라 불렀다. 탈춤부흥운동은 정치적 저항까지 하면서 민중민주운동의 한 축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긴 문화운동 여정에서 지금 보면 민중문화, 민족예술은 한국사회운동의 이념적 한계에 같이 빠져들면서 세속적 정권투쟁 속에 휘말리기도 하고, 관념적 NL PD 논쟁에서 한편에 서기도 하고, 대선정국에 정파에 빨려 들어가 갈가리 찢겨 흩어지면서 그 나름 고유한 색깔과 빛이 훼손되기도 했다. 이것도 상처투성이 문예운동이 되고 말았다. 돌아보면 차라리 그 때 '87년 대선 패배 이후 문화운동을 더 확실히 노선정리를 할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당문예운동으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하 민문협)는 탈춤 마당극운동을 펼친 문화운동자들이 사실상 중심이 되었던 문화운동 단체다. 반독재민주전선에서 독재 헌법이지만, 합법과 반합법적 투쟁을 병행하며 결성한 최초의 문화예술연대체였다. 추대된 김종철 상임대표가 고생을 많이 했다. 최근 만나서 그 당시를 회고하다가 "그 때 민문협 문화운동이 좋았어!" 하며 지난날을 같이 회고 한적이 있다. 한 가지 그 때 보람을 말씀 하신다. 그래 봐도 민문협이 최초로 직원 월급을 챙겨준 시민단체였다. 돈 벌어 상근자 급료 주려고 문화상품도 팔고 개고기집도 운영 했다고 그 시절을 추억한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로 동아조선 자유언론투쟁에 가담하여 평생을 민주언론, 민중문화, 민주시민운동의 길을 걸은 자랑스런 문화운동가다. 3년전에는 <촛불혁명의 뿌리를 찾아서> 저서를 낼 적에 나에게 책삽화를 넣어 달라고 해서 50여점 판화와 그림을 넣어준 적이 있다. 나도 그 저서에 한 몫 거든 것에 보람을 느낀다. '75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 42주년 기념행사를 2017년 촛불혁명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했다. 당시 어느 동아일보 해직기자의 딸이 나서서 언론자유투쟁도 촛불혁명이라며 나의 촛불혁명판화 연작을 페이스북에서 보고 우리도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실크판화로 찍어서 행사 날 동아투위 노기자들에게 나누었다. 걸개그림으로도 만들어 행사장에 띄웠다. 나라굿패 풍물패도 불러 한바탕 시위굿도 했다. 이제는 SNS로 네트워킹하며 문예운동하는 시대가 되었다. 촛불혁명 이후 시대가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해외동포에게 탈춤을
1985년 겨울 무렵 민문협에서 임기를 마칠 즈음 민문협 실행위원회에 의제가 하나가 올라왔다. 미국 뉴욕에 있는 교민단체에서 우리 문화 탈춤과 풍물을 가르쳐 줄 사람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논의 결과 김봉준이 적절할 것 같으니 갈 의향이 있는가? 묻길래 신혼 초 집안 살림도 일구기 힘든데, 사실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다녀온다는 말에 좀 엄두가 안났다. 아내에게 우선 물으니 아이 낳고 몸조리도 해야 하니 처가로 들어가서 아이는 낳을 터이니 다녀오라는 것이다. 평소 배포가 큰 여성 같다. 남편을 넓은 세상으로 풀어주려 한 것이다. 거기가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넓은 세상 공부도 할 것이니 여긴 염려 말고 다녀오라는 것이다. 그래도 출산과 육아 책임이 막중한 나는 더 머물며 아내의 출산을 돕고 아이 돌잔치까지 치르고 나서 1987년 봄 3월에야 미국 뉴욕으로 출국했다. 안양 신혼집은 정리하고 아내는 장인댁에서 살게 된 것이다. 아내는 미술사 석사 공부도 다 마치기 전이고 한 살짜리 어린 딸을 두고 홀로 조국을 떠나기도 참 어려웠다. 이 땅은 민주화운동으로 점점 더 뜨거워지는 데 조국을 떠나기로 하는 것도 찹찹해 결정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해외에서 우리 문화를 배우겠다는 청년들이 많아지니 거기서 탈춤 풍물을 가르쳐 문화패를 만들어 주는 일도 길게 보면 한국 민주화와 민족문화 확장에 도움 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결행을 했다.
1987년 봄 두세 달 예정으로 뉴욕으로 떠났다. 우선 강습은 무료로 해주고 나의 판화를 팔아서 모금한 것으로 경비를 충당해야겠다는 생각에 판화와 붓도 갖고 갔다. 이런 준비는 장기체류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 뉴욕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도착해서 아무 일도 못하게 발이 묶여버렸다. 나는 뉴욕 지역단체인 '뉴욕한인청년민중연합'(이하 민중연합, 대표 서경석)의 초대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달이 넘고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데 강습일정과 주체가 결정이 안 돼 행사를 못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민중연합에서 초대했는데 한청련은 뭐지? 거기서 하지말라면 강습도 못한다는 거였다. 동포단체끼리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다. '미주한인민주청년연합'(이하 한청련) 대표 윤한봉은 5.18수배자였는데 밀항으로 망명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다. 여기 미국에서 한인청년동포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마냥 체류할 수만도 없는 처지라 그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았다. 그런데 김봉준은 탈춤 풍물강습은 민중연합 초대로 왔으나 한청련에서 거기서 강습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려면 한청련에 와서 하라는 것이다. 초청해서 온 사람을 다른 단체로 와서 하라는 것이다. 나를 놔두고 민중연합과 한청년이 서로 싸우다 두 달을 허송세월 보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그럼 민중연합과 한청련과 김봉준, 삼자가 같이 논의해서 풀어보자고 했다. 회의장으로 한청련 뉴욕사무실에 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미 한청련이 초대해서 한국에서 와 있는 두 분, 김용태 사무총장과 유홍준 미술평론가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두 단체 사무국장들과 나는 회의를 하려는 데 뭔가 아쉬워서 김용태 총장을 찾아가서 같이 논의해서 고견을 말씀해 주시라고 청했다. 한국 민미협 사무총장이고 나를 파견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실행위원이기도 하니 논의에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손을 가로로 저으며 너희들끼리 논의하라 한다. 유홍준님과 바둑을 두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끼리 많은 토론에 합의가 나왔다. "뉴욕에서는 두 단체가 공동으로 함께 강습회를 열고, 뉴욕을 떠나서는 한청련이든 다른 지역 단체든 가리지 않고 요청을 하면 자유롭게 강습을 열 수도 있게 하자"라고 합의했다. 이런 결정이 합리적이다 싶었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숨었나? 삼자의 결정에 궁금했는지 김용태 총장이 바둑을 마치고 다가와 어떻게 결정했냐? 물었고 한청년 실무자가 김봉준선배가 제안한 의견이 합리적이라 다 동의한 안이 나왔다. 두 단체가 같이 강습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라고 했더니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손바닥으로 전광석화처럼 내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당한 일이다. 눈물이 핑돌고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누구 맘대로 그렇게 결정해! 이 한마디가 전부였다. 나는 동물적 분노가 치밀어 대들려고 했으나 주변 청년들이 양팔을 붙들고 막는 바람에 확전이 안 되었다. 나는 겨우 진정하며 한청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사태란 말인가.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그것도 젊은 청년 동포들이 보는 앞에서 폭행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왜 이런 사태가 생겼는가. 내막이라도 알아야 대응하겠는 데 바로 알게 되었다. 이 일로 두 단체 대표 운한봉과 서경석이 담판을 했으나 서로 싸우다 헤어졌다. 한청련(전국대표 윤한봉)과 로칼 조직 민중연합의 깊은 조직노선 상 갈등이 내재해 있었다. 윤한봉이 조직한 한청련 민족해방민주 노선과 서경석이 조직한 민중연합 일반민주주의 노선이 부딪친 것이다. 동포문화강습 하나도 서로 싸워서 못하는 관계였다. 한청련 편에 섰던 김용태 총장은 내가 민중연합을 도와 강습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입장을 미리 내게 이야기 하고 나를 설득하던가, 같이 논의해서 반대의사를 말하던가 해야지 회엔 안들어오고 결정을 엎어버린다고 이런 깡패같은 폭력을 문화계 후배한테 휘둘다니! 그것도 이역만리 외국 땅까지 같이 와서 동포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갈기는 폭행을 하다니, 객관적으로 봐도 이건 비민주적 폭거로 이상한 짓이고 못된 행동이다.
민주주의 원칙을 믿고 토론과 합의로 그동안 문화운동을 실천했다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이런 반민주적 폭거가 소위 우리편 선배한테 나올 줄 몰랐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쩔 줄 몰랐다. 분노와 슬픔이 오랫 동안 가시지 않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윤한봉, 황석영, 김용태로 이어진 동지의식은 NL노선으로 끈끈하고 강한 것이었다. 한청련은 뉴욕에서 그전부터 민중연합과 노선적 갈등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의 민중문화운동협의회로 뉴욕 '민중연합'이 초대장을 보내서 왔다. 비행기표도 받고 기숙제공 받으며 왔으니 민문협과 민중연합의 파견 초청의 약속을 저버리고 한청련으로 냉큼 건너가서 강습을 하는 것은 상식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중재안으로 두 단체와 나 사이 삼자 실무자 회의로 민주적 결정이 되어도 무시했다. 한청련과 김용태에게는 통하지 않는 결정이었다. 한청련은 윤한봉의 지도노선이 강하게 작용하는 단체였다. 일이 이렇게 된 바, 민중연합은 단독으로 행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돌아보았다. 문화사업은 정치운동에 마냥 끌려다니는 건가? 정치운동만 전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운동도 전략이 있으면 안되나? 한국의 민문협은 의견 조정을 바랬지만 그저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만 들려왔다. 문화사업은 이념이 달라도 비정치적 영역있으니 같이 하자고 삼자가 합의한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문예는 정치이념과 다른 괘도를 가면 안되나? 미주동포사회 문화운동은 필요하지 않은가? 별별 생각이 다 났다. 합의는 깨지고 이젠 민중연합 단독으로 강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갈등은 단순히 김용태와 김봉준의 사적 갈등만이 아니었다. 물론 김용태의 폭행으로 발단은 되었지만 미주지역 한청련과 민중연합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내재해 있고, 한국과 미주동포 사이에 넓게 영향을 주고 있는 민족해방노선과 민중해방노선과 일반민주주의 노선 간에 갈등의 근원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노선들을 경직되게 갖고 있는 운동노선은 한국사회운동에 이십여 년 정치사상 갈등을 이어오게 했었다. 1980년 이후 NL과 PD가 한국의 반독재투쟁에서 근본주의 이념으로 등장하면서 한국 민주화운동과 대통령선거 투쟁에서 서로 심하게 싸우며 갈라졌다. 대선이 양김으로 분열한 후 민주연합전선은 깨지고 더욱 갈등이 심해졌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서도 진보정당 정치운동에서도 이어온 고질적 노선갈등이 되어버렸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지적이 유명한 말이 될 정도다. 이것은 아직도 진보정치의 분열로 진보정당이 성장하지 못한 원인이 되어버렸다. 옳고 맞으면 좋은 데 한국사회 사회구성체로 보나 현실 대중의 불수용으로 보나 대중운동에선 맞지 않는 관념적 노선이다. 우리가 남미도 아니고 무장투쟁을 할 대중적 지지도 전무한 데 무슨 무장투쟁 해방노선이 가능하단 말인가. 말로만 이론으로만 급진적인 노선은 이미 현실 노선이 아니다.
이런 관념적 정치운동은 미국에서는 망명가로 체류하며 모국지향의 NL노선(정확히는 NL비주사파)에 한계가 드러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때부터 NL PD의 갈등이 한국사회뿐만아니라 미주동포 현실에는 안 맞는 지식인의 관념적 이념주의로 보이기 시작했다. NL은 민족모순에 지나치게 경도된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PD는 계급모순에 지나치게 경도된 세계관을 고집한다. LA 민중문화운동연구소 초청으로 가서 동포청년들과 학습하며 '미주동포사회운동의 과제와 비젼'에 대하여 토론하며 그 결과를 공동집필해서 축전 행사 팜플렛에 실었다. 운동노선 비판으로 정면 승부를 건 것이다. 딱 5년 후 미국동포사회에서도 LA 흑인폭동사건을 만나면서 관념적 정치노선은 명백히 오류로 드러났다. 미주한인동포사회운동을 하려면 미국사회에서 민중과 지역사회에 먼저 뿌리 내려 거기서 신임을 얻으면서 개혁적 성과를 만들어야지 그곳 흑인, 스페니시, 아시안 등 비주류 소외계층과 교류는 외면하고 조국만 바라보는 한국 민주화와 민족해방운동은 출발부터 오류를 잉태하고 있었다.
1992년에 일어난 LA 흑인폭동사건은 미주한인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흑인의 폭력과 약탈은 잘못되었으나 한인들이 지역사회 커뮤니티와 친교하기보다 흑인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자기들끼리만 살던 습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미주한인도 이민을 간 이상 한국국민이 아니다. 거기서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만들고 그곳 사회에서 뿌리내리는 것이 우선이다. 미국 같은 사회는 다문화 다중정체성이고, 이주민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새로 만들며 그 사회에서 적응한다. 자기 정체성 확립을 해야 존재의 자존감도 생긴다. 한국민주화운동은 정체성 확립 이후,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뿌리를 내려도 늦지 않다. LA 흑인폭동사건을 겪은 후 LA 민중문화연구소는 마이너리티 사회계층 속으로 들어가서 노동상담소와 문화사업을 병행하는 노선으로 정리했고, 한청련은 윤한봉의 귀국과 함께 조직이 와해되었다.
나는 미주지역과 독일동포지역을 10개월간 순회하면서 얻은 상처가 컸다. 민미협 민예총은 김용태를 중심으로 나를 배척했다. 큰 조직이 한 개인을 왕따시키는 건 쉽다. 술자리 안주감으로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술동인 <두렁>도 와해되고 대선 실패하고 민문협 민통련은 해체되었다. 나는 더 이상 서울에서 예술가 활동을 못할 것 같았다. 화인 아티스트의 꿈을 일단 접고 서울에서 가까운 공단이 있는 부천 인천 지역에서 활동할 생각으로 처자식 데리고 이사를 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윤석양 이병이 보안 사찰하는 민주인사 명단과 수사 현황을 메모리 카드를 갖고 탈영을 한 것이다. 내부고발자에 의해 군보안사 사찰이 폭로되었다. 군이 간첩은 안 잡고 민주인사 명단을 갖고 사찰과 조직적 빨갱이 죄를 만드는 데 활용하고 있던 것이다. <말>지 별책부록으로 발매되어 나도 구해서 보니 내가 그 명단에 있는 것이 아닌가. 오백 몇 번 사찰관리 번호까지 있고 나에 대한 정보가 순서를 매겨 적혀 있었다.
"김봉준은 5.18 포고령 위반자, 문화운동을 하며 민문협 기획국장 역임, 미주지역에서 동포들을 반정부로 선동하고 북괴 간첩과 접선함, 현재 A급 수사중." 대략 이런 내용이다. 내가 북한 간첩과 접선해서 A급 수사 중이라니! 소름이 쫘악 끼쳤다. 그래서 그동안 누군가 미행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구나. 나도 그런 저런 간첩단의 일원이 되어서 갑자기 체포되고 '동포조직과 한국청년 간첩단 사건 일망타진!' 이란 기사가 신문마다 도배할 위기였다. 그러나 의외로 이 폭로 후 조용해졌다. 윤석양 이병의 사찰 내부고발로 도리어 보안사가 곤욕을 치루게 되었다. 나는 윤석양이병에게 큰 빚을 지고 산다. 그 많은 민주인사들이 사찰명단에 있었고 보안사 음모에 곤욕을 치를 사람들도 대기하고 있었는 데 이 폭로사건으로 보안사의 빨갱이 프로젝트가 무력화된 것이다. 언젠가 윤석양님 보고 싶다. 만나거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
미국 여덟 달, 독일 한달 동포사회 초청으로 탈춤 풍물 강습과 판화전 순회를 했다. 뉴욕에서는 처음 두 달 행사 지연으로 근 석달을 체류했고, 워싱톤, 마이애미, LA,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시카고 등 더 초청하는 곳이 있었으나 1987년 소요한 일정이었다. 그때 만난 강습생들이 지금도 뉴욕에서 열심히 시민운동하는 장년으로 커 있어서 보람도 느낀다. 그 때 유니온신학대학으로 유학 온 정현경님도 강습생이었다. 지금 한인유권자연맹을 이끄는 김동석, 변호사가 되어 마이너리티 지역사회에서 인권변호사로 일하는 김동찬 등 많은 인재들이 당시에는 20대 청년들로 강습 마당에 모였다. 뉴욕에 이어 워싱톤, 마이매미, LA, 샌프란시스코까지 순회하며 강습 요청에 응했더니 귀국일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풍물패들 조직하여 교민들이 "한국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 미국 정권은 한국독재정권을 지원하지 말라!"고 구호를 외치며 워싱톤 광장 집회에 모여들었다. 유월 민주항쟁 한달 전에 미주 동포 역사상 최대의 인파가 모여 민주 집회를 펼친 것이다.
그 맨 앞에서 행진해 가는 풍물패는 우리가 강습하며 조직한 뉴욕의 두레 풍물패, 워싱톤의 아리랑 풍물패가 있었다. 둘 다 내게 배운 동포 청년들인데 아직 선반이 익숙하지 않으니 나보고 자꾸 상쇠를 잡으라 청하니 할 수 없이 워싱톤 광장의 상쇠가 되고 말았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유월항쟁 한복판인 것이 더 맞았으나 그 한달전 워싱톤 동포의 오월 민주화대행진 참여로 대신하고 있었다.(위 포스타 참조) 그후 워싱톤을 떠나서 마이애미, LA,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가며 강습회를 열고 강습이 끝나는 족족 풍물패가 만들어지거나 강화되었다. 시카고 등지에서 나를 초청했지만 나는 민주화 열기가 점점 커지는 조국으로 빨리 귀국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민중예술 강습은 독일로 넘어가서 끝냈다. 하이델베르그, 함부르크, 보쿰 등을 다니며 강습과 전시를 하며 한 달을 보내고 귀국하였다. 독일 첫 개인전을 홍대 탈반 출신 독일 철학 유학생 임정희님이 하이델베르그 시민대학에서 열게 도와주었다. 일본 동포들도 나를 불렀다. 일본 우리문화연구소에서도 초청이 있었으나 그건 사양하고 귀국했다. 대선 전에는 귀국해야 한다는 나와의 약속이 있었고 오랜 해외 생활에 지쳤다. 두 고 온 딸과 아내가 보고 싶었다. 대통령선거 전에 도착해 질 것이 뻔한 대선에 그래도 투표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은 패색이 짙어갔고 양김은 분열로 망했다. "죽 쒀서 개 줬다" 는 유행어가 그 때 나왔듯이 결과는 허탈하고 참담했다. 청년기부터 10여년 민주화운동과 함께 했던 문화운동도 이제 성찰의 새길을 찾고 싶었다. 그것은 민중 속으로 더 하방하는 길이다.
나 돌아가야지
본래 있던 자리로
노래하고 춤추며 어깨 걸며 목놓아 외쳤던
민중 속으로 돌아가야지
다시 거기서 민주주의를 시작하고
다시 거기서 진짜 예술을 찾는거야
분명히 있을 거야, 그동안 만나서
손잡고 춤추며 어깨 걸며 행진했던 노동자 속에
가면 할 일이 보일거야. 민중예술이 헛된 꿈은 아닐거야.
다시 갈거야 고생하는 민중 곁으로.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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