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흥을 모두 포괄하는 '신명'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본성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흥을 모두 포괄하는 '신명'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본성이다"

[탈춤과 나] 20. 김봉준의 탈춤 ②

여기까지가 197년대 탈춤부흥기에 보냈던 나의 문예공부 기간 이야기다. 왜 탈춤을 추게 되었는지를 내 청년기를 고백하며 설명했다. 탈춤은 내게 치유문화 이상으로 선물을 했음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탈춤 공부 덕분에 감시가 심하니 조용히 유신시대 미술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비록 나에게는 2년동안 전담 마크하는 담당형사가 생겨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학교 수업에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미술학도로 대학 전공 공부와 조선 전통의 탈춤 풍물 불화 탈 공부는 서로 너무나 달랐으나 비교하며 공부하게 되었다. 모더니즘과 원형문화, 세련미와 원초성, 서구 근대의 미적 사유와 야생의 사고가 서로 뒤섞인 채로 나를 혼란과 중첩으로 힘들게 하였으나 성급하게 자기 전공을 취하지도 않고 폭 넓게 공부했다. 대기만성에 희망을 걸고 서양모더니즘 양식과 조선전통양식의 이중적 교호를 탐색했다. 이를테면 크로키 데생의 형식미와 붓그림의 차이라든가 동서양의 붓차이, 선과 면의 철학적 해석 같은 것을 차츰 정리하며 양쪽의 좋은 점을 같이 취하려 애썼다.

우리의 말과 글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모국어로 잃지 않고 민중의 소통 수단이지만, 시각언어는 조선장인들이 소멸하면서 뿌리까지 뽑혔다. 일제식민지는 산업구조마저 강제 개편한 것이므로 화공들은 미술관련 직업을 잃어야 했다. 화각장, 민화장, 자수장, 병풍장, 벽화장, 단청장, 도예화공, 초상화장, 혁필장, 소목 대목 등 미술 관련 전통산업은 실로 다양했다. 그 잃어버린 자리에는 식민지에서 일제로부터 교육받은 미술교사, 미술교수, 조선미술전이 소위 한국적 현대미술의 주체로 확 바뀌고 있었다. 왜풍 양풍은 이렇게 점령군처럼 들어왔고 조선의 황모장필의 장인들은 주목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조선수공업발달사' 참고)

1970년대를 끝으로 대학을 나왔다. 그래도 예술가로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썼으니 탈춤을 추고, 풍물을 해보니 우리 전통문화예술에 믿음이 갔다. 우리 선조들 문화가 자랑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전통은 전통일 뿐 오늘의 예술이 필요한 시대다. 무엇부터 배우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점점 분명해져 갔다. 탈춤문화운동을 먼저 열었던 선배들이 모범을 보여주고 있어서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소리내력> <오적>의 김지하 선배님, 창작탈춤 <미얄 마당>의 채희완 선배님, 마당극 <밥>의 임진택 선배님, <아침이슬>의 김민기 선배님을 만나면서 나의 미술의 길도 캄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고, <미술은 현실은 반영이다.> 김지하가 쓰고 김윤수가 윤문했다고 알려진 미술계의 1969년 <현실선언문>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옳다고 보았다. 우리 조선 전통의 불화 민화 풍속화를 적극적으로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조선미술이 지닌 삶의 긍정의 미학에 공감했다. 

그러나 이론이란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실기하는 작가의 숙제다. 캄캄한 밤에 지도도 없고 목적지도 막연한 채 이 후레쉬 하나 갖고 떠나는 기분이었다. 1979년 대학 4학년 판화 수업 시 시도한 첫 목판화 <가족의 기억>이 나왔다. 이 성공은 저 팔심 년대 풍미하던 민중미술운동에서 그래도 나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기억의 가족> 목판화는 만봉스님이 만들어 주신 황모장필로 불화 초 그리듯 한지에 판화의 밑그림을 그렸다. 목판화의 선이 질박하고 힘차고 따뜻함을 갖게 된 것은 이 붓의 미감 때문이었다. 널목판(눈목판이 아님)의 질박한 맛과 강한 칼맛에 붓의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합쳐지며 나의 목판화 색깔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 초에는 불화 괘불에서 착안하여 민중집회에 걸개그림을 내올 수 있었다. 내 목판화가 여백을 살리고 내용을 생략 축약 요약하며 무늬처럼 보이는 것도 걸개그림도 조선 붓그림 공부 덕이다. 훗날 김지하 시인이 내 그림을 평하면서 눈 밝게 지적한 바 있다.

"김봉준의 판화에 나오는 기이한 무늬는 김봉준의 생래적 표현이라고 보고 싶다. 생태주의적인 것은 물론이지만 더 깊은 곳에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새 리듬을 함축한 전혀 새로운 암호문자cryptogram 같은 것이 움직이고 있다. 김봉준에게도 저 피투성이 청춘기에 목메어 부르던 자유, 그것을 이제야 언뜻언뜻 선물하는 것 같다."(1998년 나의 목판화 에세이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 서문에서).

그렇다, 나는 미술에서 새 리듬을 찾고 있었다. 탈춤 품물 등 몸에서 우려나오는 리듬을 찾고 있었다. 이 신명의 리듬은 붓가락으로도 찾을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가 싹트기 시작했다.

▲<만상천화> 걸개그림, 250x150cm 1981년 김봉준 작. 성산동화실 시대에 그렸다.ⓒ김봉준

5.18 계엄폭령위반 수배자가 되다.

1980년 서울 민주화의 봄, 그리고 5.18 포고령 위반자로 수배되어 급전직하 시국사범에 빠져들게 되었다. 1980년 다행히 졸업한 나는 임진택 선배 소개로 '창작과 비평사'에 취직했다. 편집 디자인 파트에 배정되어 막 일을 배울 때였다. 삼개월 지난 1980년 5월 어느날 5.18이 터지고 출판사로 광주의 대학생 애독자들이 그곳 소식을 전화로 전해 왔다. 그 내용은 지금 국민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전화 통화 끝머리에는 꼭 이 소식을 서울에 알려주십시오 하였다. 귀를 쫑긋 세워 다 기억해두었지만 계엄정권의 통신 단절로 광주 소식이 두절되었다. 우리 탈춤반 대학동아리 연합 모임이 발빠르게 모처로 모였다. 기억으로는 서울대 이대 연대 홍대 한양대 서강대 탈춤반 동아리들 대표자들이 모인 것 같다. 

서울대는 좀 많아서 황선진, 박우섭 등 복학생들도 참석하고 있었다. 대책 논의 끝에 광주에서 발생한 계엄군의 만행을 우선 서울시민들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방법은 전단을 만들어 뿌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광주5.18에 대하여 잘 아는 친구들이 없었다. 그나마 내가 들어서 아는 소리가 제일 많았다. 그런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꾸 나를 처다보며 나서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차마 하라는 강요는 없지만 유인물 초고를 김봉준 당신이 써야겠다는 피치 못할 대답을 듣고싶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5.18 이야기를 전단으로 써서 나누자는 것이다. 참석자 모두 나의 결단을 바라듯이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짧은 결정의 시간이 얼마나 괴롭고 길었는지 모른다. 이걸 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찾아올지 충분히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5.18 광주학살 진상을 알린다> 전단 작성자가 되었다. 우리 서울의 대학탈반 동아리 학생들은 조를 나누어 서울 전역에 골고루 뿌리기로 하였고 전단 인쇄는 서울대에서 맡은 것 같다. 나도 명동에서 뿌리고 도망쳤다. 내 임무는 잘 완수했다. 그게 오월이 가기 전일 것이다. 

서울에서 1980년 첫 5.18 관련 유인물 배포사건은 '대학탈춤반 연합모임'에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 공대학생이 서울역에서 뿌리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 것이 왔구나! 계엄군 폭력에 최소 주동자로 나를 체포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밀려왔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집을 나오고 직장도 더는 다닐 수가 없었다. 입사 3개월도 안되어서 사직을 해야 했다. 발행인 백낙청 선생님에게 조용히 사정을 말하고 오늘 당장 그만두어야겠다고 말씀드리니 허락하시면서 위로금으로 두 달치 월급을 더 주신 것이다. 이 돈은 참으로 귀한 나의 도피자금이 되었다. 퇴직한 다음 날 계엄군이 나를 체포하러 창비사로 급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친구 화실로 우선 몸을 피하기로 했다. 광화문 옆 통인동 일제 적산가옥 같은 2층 목조건물이다. 작은 공간 간이침대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수배자는 너무 오래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다시 상계동 판자촌으로 숨어 들었다. 거기선 무명 만화가라고 소개하고 작은 월세방 하나 구해 자취했다.

친구 화실에서 나와서 상계동 판자촌으로 들어가 방에는 만화를 그려 벽에 붙여 놓고 불암산을 매일 올라 산천을 스케치하며 보냈다. 거기는 청계천 판자촌에서 쫓겨와 무허가 판자촌을 짓고 살던 난민촌이었다. 거기서 4개월 정도 살다가 청계천7가 주물공장으로 들어갔다. 길에서 만난 고교 후배가 집에서 운영하는 신주 철물 주물공장이었다. 주택용 장식물을 제작하는 곳이었다. 세면대 받침대나 문고리 창틀 등을 만들었는 데 거기서 시다를 했다. 나는 그 공장 함바집에서 먹고 자면서 기약 없는 수배자가 되어버렸다. 겨울에는 뚫린 천장에서 하늘을 보고 잤다. 그해 겨울 잠자리에서 떠 놓은 물그릇 물은 얼어있었다. 누구의 신세나 피해도 지기 싫었고 이 기회에 노동자 체험을 하며 때를 기다렸다. 수배자들끼리 시국대응을 위해서 비선으로 연락망을 갖고 있었는 데 내게 연락을 주는 여성이 한 분 생겼다. 이화여대 국문과 다니는 이대 탈춤반의 이선형, 이 여성과 접선하다가 연심이 생겨 나는 손을 잡고 구애를 한 것이다. '수배자 뒤에는 여자가 있다'는 속설이 맞았다. 사회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도망자 청년은 사랑을 찾은 것이다. 그녀는 장기 수배에 큰 힘과 격려가 되었다. 어찌 이 애틋한 사랑을 평생 잊을 수 있겠나. 나는 훗날 청혼을 했고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다. 가난과 저항의 길이 뻔한 이 무명의 청년 예술가는 평생 동반자가 되어준 아내가 늘 고맙고 위대해 보였다.

1981년 봄 계엄포고령을 해제해서 자수했고 한 달 투옥 당해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계엄포고령이 해제되었으니 특별한 다른 범법 사실이 없는 한 남대문경찰서는 풀어주어야 했다. 이렇게 사회로 복귀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더 막막하였다. 나는 1980년 5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수배에서 풀려났어도 블랙리스트 예술인이 되고 있었다. 군사정권에선 더는 정상적인 직장생활에 복귀하기 힘든 인생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계엄포고령 위반자 당시 전단지 일부분, 5.18 관련단체가 내게 최근 보내온 사진 좌측에서 두 번째. 1980년 당시 전국 파출소 게시판에 20명 추려진 수배전단이 붙어 있어 변장하고 다녔다. 계엄포고령이 해제 될 때까지 근 일년 도망자 생활을 했다. ⓒ김봉준

성산동 화실시대

1980~1년 1년 장기 수배와 투옥생활로 나에게는 많은 것이 변했고 이를 느끼게 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이고 문화운동은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 물음에 답을 찾아야 했다.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어서 성산동에 작은 화실을 장만하고 그림과 판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내 곁에 가끔 와 주었고 참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이 때 나온 목판화들과 <만상천화> 걸개그림은 내 미술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2년, 기간 수배 중 못 그리던 그림을 원 없이 그렸다. 이 때 그린 그림들이 내 미술의 밑천이 되었다. <어머니 돌아왔어요>, <목칼을 찬 조상>이 대표적 판화다. <아리랑고개>는 판놀이 '아리랑' 유인렬 연출 김경란 안무의 마당극에 얼굴 포스타가 되었고, <목칼을 찬 조상>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김민기 연출 연극에 포스타가 되어주었다. 탈에서 시작해서 황모장필 겨레붓이 밑천이 된 걸개그림과 목판화는 수십여점이 나오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이> 목판화 1981년 김봉준 작 ⓒ김봉준
▲<아리랑고개> 목판화 1981년 김봉준 작 ⓒ김봉준
▲<어머니 돌아왔어요> 목판화 1981 김봉준 작 ⓒ김봉준
▲<목칼을 찬 조상> 목판화 1981 김봉준 작 ⓒ김봉준

1982년에는 아현동 '굴레방화실'로 이사해서 미술 작업을 했다. 그러던 중 서울대 문리대 탈반 출신 제적생 두 동료들 황선진, 연성수가 찾아와서 내 화실을 기획사무실로도 같이 사용하자고 하여 '굴래방 놀이기획실'도 함께 했다. 놀이기획을 같이하다가 거기서 다시 궁리 끝에 우리는 좁은 화실을 청산하고 길 건너 <애오개 문화마당>을 구하기로 한 것이다. 50평 남짓이다. 비록 지하실이지만 소극장 겸 모임방 작업실로 다같이 이용하기로 했다. 내 '굴레방화실' 보증금도 종자돈으로 '애오개문화마당' 전세금에 헌납했다. 1983년 세운 '애오개문화마당'(애오개소극장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여러 예술과 소모임을 같이 하던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은 많은 탈춤 풍물 연극 미술하는 청년들이 모여드는 수원지가 되었다.

미술동인 <두렁>도 애오개에서 나왔다. 거기서 애오개 판화교실,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을 하였다. 전시 개막날 김원호 연출 <아수라판> 창작탈춤(김봉준 기획과 창작탈의 탈춤)이 여기서 나오게 되었다. 모두 1983년 일이다. <애오개문화마당>은 전두환 정권의 엄혹한 감시하에서도 전국에서 대학교 바깥 사회에서 마당공간을 마련한 첫 사례가 되어 탈춤문화부흥운동의 사회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지역에서 이를 롤모델 삼아 지역문화마당이 우후죽순으로 탄생하는 용기를 주었다. 반합법적 문화운동공간으로 오늘날 지역문화와 전국대학 탈춤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당시 갓 졸업하거나 제적된 탈춤반 마당극반 출신 청년들이 모여 만든 문화공간이니 대학의 탈춤운동에 영향력을 주게 되었다. 이후 대학을 나온 문화할동 선배들과 대학교 문화써클들이 힘을 합해서 전체 대학을 바꾸기 시작했다. 통키타문화가 주류였던 대학축전을 탈춤 마당극 대동놀이가 주가 되는 문화혁명을 이루게 했다. 애오개 마당에는 채희완(탈춤) 임진택(마당극) 홍석화(연극) 황선진(대동놀이, 풍물) 박인배(연극) 김봉준(미술, 풍물) 정희섭(연극) 김원호(풍물) 문승현(음악) 등이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후 1984년에 최초 반독재민주운동 전국문예단체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추동시킨 것도 길 건너 애오개 마당이었다.

▲<뜰밟이> 목판화 1982 굴래방화실에서 판화 ⓒ김봉준

농민 속으로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이나 보다. 굴래방 화실을 하면서 1982년 내게 맞는 직장이 찾아왔다. 허병섭목사, 유인렬 친구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민중교육연구소를 차리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비상근직 농민회 문화간사로 날 소개 시켜주었다. 기독교농민회에서 농민만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주 미션이었다. 농민들이 글을 안 읽어서 책으로 학습하기 힘드니 차라리 만화로 농민문제를 알리자는 것이다. 당시는 농민은 초등학교도 못 나온 농민들도 많았다. 본부 사무실은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기독교농민회이다. 전국으로 농민회 회원들을 만나러 가며 취재도 농민회에 풍물도 전수하고, 행사 뒤풀이 놀이기획도 했다. 집에서 재택근무도 되는 자유로운 직장이었다. 농민교육장이 있던 전북 이서로 자주 다니며 농민교육을 참석해서 자료를 얻고 농촌현장을 다니며 농민만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농민만화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처음 하는 일이다. 독일의 한국 민중운동 지원 프로젝트의 하나로 농민회 나상기 사무국장이 만든 아이디어 같았다. 현장 농민이었던 배종렬회장, 정광훈 교육부장 등이 <농사꾼 타령 >만화가 나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만화는 농민 체험에 기반을 둔 이야기 그림이니까 농업경제, 경제학 책이 아니었다. 연역적 접근이 아니라 감성과 논리가 동반한 농민 이야기의 귀납적 정리다.

이 만화책이 일년 만에 출간되자 또 난리가 났다. 무허가 불온서적이 출판되었다고 저자를 잡아넣겠다고 동대문경찰서에서 난리다. 나는 피신해 또 있어야 했다. 경찰은 저자가 누군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농민회는 나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 정광훈 교육부장이 소환되어 자기가 만화를 그렸다고 진술했으나 그럼 그려보라고 해서 들통이 났다. 그 다음 배종렬회장이 수사가 더 이상 질질 끄는 데 한계가 있어 나 대신 자수하여 구류 25일 판정을 받는 고역을 당했다. 이것은 만화출간 첫 탄압이었다. 끝까지 나를 보호해 주신 배회장님은 아직도 전남 함평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다. 이제 팔순 노인이 되셨다. 그 먼 곳에서 서울로 회의를 주재하러 오시고 단체 대표로 위험한 일들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분에게서 농민 지도자의 품성을 보았다.

<농사꾼 타령은>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권에 맞선 농민 만화가 그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품에 비해 턱없이 낮은 농산물 가격 '울어버린 순이 아버지', 작은 농토에서 농업하는 소농의 비애 '메뚜기 아저씨 이야기', 시사비평만화 '농업문제 본질' 등을 만화답게 재미있고 웃음이 나게 그렸다. <농사꾼 타령>은 내가 배우고 놀았던 탈춤과 마당극의 미학과 표현력에서 받은 영향도 크다. 만화 주인공들이 탈춤처럼 마당으로 튀어나와 한바탕 놀고 들어간다. '고바우'나, '고인돌' 같은 만화, 이문구의 농촌 소설도 도움이 되었다. 만화책을 보고 토론주제를 내주어서 같이 공부할 수 있게 학습자료로도 이용하게 했다. 이 만화의 줄거리를 잡기까지 해남의 정광훈 농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남도 농민의 맛깔스럽고 현장감 나고 찰진 말씨가 말풍선으로 담게 되었다.

▲농민만화책 <농사꾼타령> 1982년발간, 김봉준 작 ⓒ김봉준
▲농민회 교육부장으로 만났던 고정광훈 회장ⓒ김봉준

정광훈님은 훗날 전국농민회, 민주진보연합 등에서 회장을 하였다. 아예 직업운동가로 평생을 산 것이다. 옥고를 여러 번 치르면서 끝까지 노농 기층민중을 대변하다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십 년 전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일 년 전 서울시청에서 연 민중축전에서 나를 만나 기뻐하며 식사를 같이 한 기억이 난다. "오, 상구, 신나버려! 우리 무지랭이들은 축제를 해야 써! 혁명을 이러코롬 낙관적으로 해야 쓰지 잉~" 이 말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한데 급사했으니 이 아득한 슬픔 달래려고 프레시안에 추모글과 붓그림으로 '민중의 벗 정광훈'을 남긴 적이 있다.

만화책 <농사꾼타령>을 낸 이후 기독교농민회에서 퇴직하였으나 나의 미술에 농민회 활동과 농민만화 창작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기층민중문화인 '거대한 뿌리'를 농민들에게서 보았다. 그들과 함께 한 체험들은 바로 농민만화와 농민판화들 8점 정도 창작했다. 1983년 애오개마당 운영위원으로 일자리를 옮긴 후 나는 우선 미술동인 창립부터 더 끌지 말고 발족하기로 했다. 탈춤 마당극 마당에 동행할 시각예술그룹이 꼭 필요하였다. 탈춤, 풍물의 신명미학을 담아 낼 미술집단이 그 당신엔 전무하니 꼭 하고 싶었다. 1년여 준비 끝에 애오개마당에서 1983년 <두렁창립예행전>을 펼쳤다. 우리의 뜻을 같이하는 미술인 선배를 <두렁> 동인의 고문으로 모시기로 하고 서대문미술학원에 강사로 계시던 오윤 선배님을 만나러 갔다. 동인 결성을 축하해 주며 찬조출품작으로 판화도 다섯점을 내주셨다. 그 후 <강쟁이다리쟁이> 탈춤에 쓸 탈 제작의뢰를 채희완 선배로부터 받아 오윤 형과 함께 창작탈을 만들어 드렸다. 오

▲<추수> 채색목판화 1983 농민회 시절 ⓒ김봉준
▲<꽃놀이> 꽃놀이 1983 농민회 시절 ⓒ김봉준

윤 형은 크고 각진 권력의 탈들을, 나는 둥글고 고생에 찌든 민중의 탈들을 만든 기억이 난다. 이것이 오윤 형과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공동작업이다. 그렇게 빨리 떠날 분이었다면 더 밀접한 교류를 하였을 것이란 후회도 든다. 이후로도 마당예술을 이해하는 미술 선배가 거의 없었던 것이 현실이라 나는 외로웠다. 나는 미술계와 인연보다 미술동인 <두렁> 활동에만 몰두하게 된다. 두렁 창간 자료집 1983년 <산그림>에 창립선언문을 쓰면서 '신명'을 시각예술로 구현하겠다고 선언했다. 미술에 신명을 당당히 끌어들인 것이다. 채희완 선배에게 이 선언문을 보여주며 자문을 구했다. 대답은 특유의 과묵함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다.

"아름다움의 뜻은 늘 새롭다. 인간의 인식과 행동의 고양일 뿐만아니라 힘의 본질인 생명, 이 세 요소를 공동체 속으로 밝게 틔우는 흥을 모두 포괄하는 '신명'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본성이다." (미술동인 산그림 자료집에서 1983년)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