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탈춤을 추게 되었나? 자문부터 해본다. 미술대학을 들어가서 탈춤을 추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써클 등록을 하게 된 것은 '75년 가을학기였다. 내 청년기는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목표를 정하고 탈춤반을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가입 서명지를 갖고 회원과 지교교수를 찾아다녔다. 이때 벌써 대학탈춤은 비정치적인 문화써클인 데도 학교 당국으로부터 불온써클로 주목받고 있음을 등록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지도교수 해주겠다는 교수님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알고 보니 서울대학에선 이미 사고 친(?) 써클로 찍혀 있었고 탈춤반 학생들이 주도한 김상진 추모제 5.22사건으로 문리대 탈춤반 마당극반 학생들 여러 명이 제적당하고 구속되는 큰 사건이 생겼던 것이다.
대학탈춤반은 서울에서는 서울대 연대 이대 서강대 고대 서울여대 한양대 숙대 등이 생기며 탈춤 풍물의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 먼저 배운 것은 전수해 주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홍익대는 '75년에 학교 등록은 되었어도 그 다음 해부터 '76 '77 '78년을 연속해서 비가입 써클이 되고 말았다. 학교가 문제써클로 분류해두고 등록을 방해했다. 서클 지도교수를 못구하게 해서 등록을 못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활동을 못할 청년들이 아니다. 이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나 나는 소수정예 회원들과 밖으로 좀더 폭넓게 활동했다. 다른 대학과 교류를 빈번히 하며 시야를 넓혔다.
'87년 마당극 <동일방직문제를 해결하라> 노동자 연극 연출도 했고, 서울 문리대 연극반 박우섭과 <무등산 타잔> 마당극도 창작, 출연했고, 채희완 선배와 만나 <한두레> 창작탈춤마당 <미얄>에도 출연했다. 1978년 여름에는 서울대 연대 이대 기독교대학청년회 홍대 탈반 출신들과 유랑극단을 만들어 창작탈춤으로 전국순회공연도 다녔다. 진오귀마당, 거지광대마당, 미얄마당으로 <유랑극단 탈춤 한마당>을 만들어 여름 한 달간 여섯 군데 농촌으로 떠났던 대학생 농촌봉사활동 하는 마지막날과 농민회 투쟁 현장을 다니며 탈춤과 풍물로 다녔다. 예술로 민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탈춤마당 시작 전에는 길놀이가 이루어지고 끝나면 대동춤판이 벌어졌으니 민중과의 집단적 신명을 지피던 마당예술이 어떤 것인지 확 다가왔다. '79년 홍익대 탈춤반으로 재등록 될 때까지 유신 말기에 민중의 바다로 살짝 뛰어든 대학탈춤반 연대활동은 훗날 나의 예술활동 길을 예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학 전에 나는 어떤 아이였나부터 돌아보지 않으면 탈춤을 추게 된 동기를 정확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난 매우 어두운 청소년이었다. 성격이 소심하고 낯가림 잘하고 혼자 놀기 좋아하는 우울한 청소년. 더 달리 변명할 여지 없는 문제아 였다. 밖으로 말썽 많이 피우고 사고 치는 그런 아이가 아니고 혼자서 노는 그런 아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는 초등 때부터 ADHD에 걸려 있었다.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늘 불안하고 산만하고 성미 급한 아이, 그래서 학업 지진아였고, 소지품 잘 잃어버리고 아이들과 어울려 놀 줄도 잘 모르던 아이였다. 밝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새 나라 어린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용산 중고교를 겨우 시험 쳐 들어가긴 했어도 키는 커봐야 1m67cm에 몸무게는 45kg을 넘지를 못했다. 반 친구들은 내 별명을 해골이라 놀리며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부르거나 말거나 애써 태연한척하며 조용히 미술반실에서 혼자 그림 그리며 놀았다. 나의 중고교 써클활동은 6년 내내 미술반 활동뿐이다. 그만큼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혼자서 그림 그리기만 했다. 미술반에 가입한 학생도 한 학년에 두세 명 정도이니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큰 미술실에서 혼자 그림 그릴 때가 많았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청소년이었다.
왜 ADHD가 생겼는지 그때는 잘은 몰랐다. 그러나 사십이 넘어서 가만히 돌이켜 내 성장배경을 살펴보면서 이해가 갔다. 창피하지만 내 어린 시절 가정환경을 이야기해야 탈춤을 추게 된 동기가 설명되니 이야기 안할 수 없다. ‘탈춤과 나’ 수기 요청이 외통수에 걸려서 커밍아웃을 처음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이야기다. 어머니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심하게 싸우셨다. 말쌈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못 당하지만,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아버지는 도망치듯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 죽는다고 소리소리 치며 난리를 피웠으니 이럴 때면 동네방네를 어머니 절규가 뒤덮었다.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항거하는 소리, 통절한 울음소리로 너무도 커서 나는 안절부절도 하고 창피했다. 그런 날에는 방구석에 쥐죽은 듯 있으며 불안감을 진정시켜야 했다.
어찌 잊으랴, 3,4살 때부터 청년기 하루가 멀다고 싸우는 지겨운 부부싸움을, 이 집구석에서 울려 퍼진 부부의 싸움은 막가는 언쟁소리, 폭력과 통절한 울음소리, 퍽퍽 주먹 휘두르고 맞아서 아프다는 비명 소리, 어머니의 물고 뜯는 소리, 결국 비명지르며 달아나는 아버지, 그리고도 끝나지 않는 어머니의 자식에게 하는 하소연 소리..... 이렇게 시작한 부부싸움은 보통 진정될 때까지 3시간은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집안은 편안할 날 없는 아수라판이나 다름없었다. 그 싸움의 발단은 어린 내가 보기엔 별 것도 아닌데 부부가 왠수처럼 싸우다니, 나는 커서 결혼 안 해야지 다짐했다.
트라우마에 시달린 집안 영혼
왜 싸우는 건가, 싸움을 누군가 양보하고 참고 피할 순 없는 것인가, 이 이상야릇한 부부관계는 내 부모지만 끼고 싶지도 않은 싸움이었다. 싸움은 일정한 패턴을 갖고 반복했다. 일단 아버지는 집 밖으로 달아나시고 어머니는 나와 자식들을 앉혀놓고 하소연을 하시면서 분이 풀릴 때까지 자기 이야기를 듣게 하셨다. “엄마 알겠어요. 그만 진정하시고 그만 우세요.” 해보지만 돌아온 것은 “너는 아빠 편만 들고 내 편이 아니야”고 하시며 야단치고 일장 훈계하신다. 그 쩌렁쩌렁한 울림통 큰 목소리는 늘 내게 고문같이 지겨웠다. 집은 점점 더 싫어져 벌써 10살 경 가출도 몇 번 하게 된다. 그 어린 나이에 낯선 땅 어디로 가서 편히 쉴 것인가.
하루종일 서울 거리 걷다가 밤늦게 슬그머니 들어가곤 했다. 부부갈등이 심한 가정이다 보니 편안한 날, 행복한 가족 경험이 별로 없다. 물로 여기서 부모님을 무조건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현명하지 못하고, 평소에는 밥 잘 챙겨주시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시고, 엄해도 가족 사랑이 깊으신 아버지이시다. 지금 여기서 내 상처만 생각하고 어버이를 욕되게 해서 참으로 죄송하다. 그러나 나의 정서불안 원인을 감출 수 없다 보니 여기까지 실토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외향적이지 않고 평소 조용한 편이지만 화를 불같이 내면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저 무서운 내면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불같은 화와 함께 폭발하는 주먹질 손찌검이 정말 무서웠다. 나는 장남이라고 더 엄하게 다스리려 했다는 말을 커서 들었다. 방어할 틈도 주지 않고 느닷없이 들어오는 폭행 수준의 야단치기는 초등학교 내내 겪은 체험이다. 코피가 나서 피투성이 얼굴을 하고 물 대야에 얼굴을 씻던 적이 여러 번 기억이 난다. 어서 커서 이 무시무시한 집을 탈출하여 지내고 싶었다. 네 살 때 집 나간다는 어머니와 붙드는 아버지 사이에서 울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 트라우마는 상처가 깊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이런 가정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 60년대 우리 집은 그랬다. 이 창피스러운 가정사를 이번에 처음 공개하며 뒤돌아본다. 우리 집 부모님 세대는 일제 식민지와 6.25전쟁을 겪어내신 세대였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자식들에게도 밝히기 어려운 모진 삶의 체험이 있을 것이라 짐작만 한다. 어머니는 황해도 해주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사랑을 받으며 해주여고를 졸업하시고 학교 선생과 은행 등 직업을 갖고 계셨다. 처녀 시절 북의 김일성 체제가 들어서서 인텔리들은 반동사상이 물든 자들이라고 탄압을 했으니 그것이 싫어서 1948년 가족들보다 먼저 홀로 3.8선을 넘어오신 황해도분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전남 해남이신 남도 분이셨고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공부를 좋아하셨다. 고모부의 후원 덕분에 연희전문대 수학과를 졸업하시고 8.15 해방을 맞이했던가 보더라. 서울 중동고교에서 수학교사로 교편을 잡았는데 어머니를 중매로 만나 결혼하고 바로 6.25를 만났다. 참전군인으로 신혼기를 맞이해 군부대를 전전하며 자식 둘, 51년에 누나를 54년에 나를 낳았다. 1959년경 공군대위로 제대하시고 서울에서 고등학교 수학, 물리 교사로 사셨다. 남남북녀가 분단체제에 서로 중매로 만나 갑자기 결혼한 것 같다.
어머니, 아버지는 식민지와 전쟁기를 거치며 깊은 트라우마가 계신 듯하다. 그 트라우마는 부부싸움으로, 자식에게 하향폭력으로 쏟아냈었던 것 같다. 특히 아버지의 폭력은 무자비할 정도로 불 같은 데 군부대에서 생긴 버릇임을 내가 군대 가서 겪어보니 알게 되었다. 생명의 심각한 위협을 당하는 전쟁 속에서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하향폭력으로 나타났다. 전쟁을 겪었던 우리 윗세대는 정신적 외상이 생긴 것을 말하는 트라우마라는 시대의 병인 양 갖게 된 거 같다. 말은 안 해도 우리 앞 세대분들은 대부분이 트라우마 증상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걸 나중에 커서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상처가 형성되면 보통 일반적 스트레스 대응 능력을 압도해 버린다고 한다. 어쨌든 나도 부모의 하향된 폭력문화로 그 트라우마가 폭행을 당하면서 전이되어 갔으니 나 같은 여린 아이에게도 걸려버렸다. 어릴 적에 걸린 트라우마는 밈Meme문화(유아기, 엄마와 아기 사이에 형성되는 기본문화)부터 망가진다. 고치기 매우 힘든 깊은 내상을 얻는다. 우울하고 혼자 지내고 정서가 불안한 소년이 되고 말았다.
이후 중고교교 선생들의 훈도폭력, 군대 가서 훈련조교로부터 버르장머리 없다며 맞은 빳다폭력, 민주화운동 속에서 전투병에 끌려가며 매타작을 맞던 집단폭력. 참 골고루 매번 성장기마다 나의 대응능력을 압도해 버리는 폭력들을 당했다. 다 커서 장가가고 33살 나이에 문화운동을 한다는 선배로부터 폭력을 당했다. 전에 네 가지 종류의 폭력보다 마지막에 당한 그 폭력은 탈춤을 췄던 동기와는 상관이 없는 그 이후의 일이다. 나는 오랜 소년기 청년기에 생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서 좀 자유로와 진 대학청년이 돼서 트라우마 치유의 길을 찾았다. 그것은 탈춤이었다.
탈춤을 추다
이 내면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당시 트라우마 문화치유라는 개념은 몰랐어도 본능적으로 스트레스를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불안하고 우울하고 밥맛 없고 살맛도 안 나는 몸 48kg 밖에 안되는 위기 앞에서 나는 탈춤을 만났다. 이 탈춤 정보를 맨 처음 알려준 분은 고교 1년 선배로 홍익대 건축과 제적생, 그 후 민청련 복학생 백운학 선배였다. 나를 사회과학 독서회로 이끌더니 문화운동 선배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며 홍석화, 채희완, 임진택, 김민기 등과 서울대 연세대 탈반 만남을 도와주었다. 이 묘한 탈춤의 흥을 만나면서 탈출구가 보였다. 내면의 상처는 힘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흥으로 치료되는 것이었다.
덩쿵, 얼~쑤하는 장구소리에 끌려서 탈춤을 추던 양주별산대놀이 수련을 간 것은 1975년 여름이었다. 연세대 탈춤반이 먼저 수련회 간다기에 나도 배우고 싶어서 끼어들었다. 양주별산대놀이 김상용 어른의 깨끼춤이 좋아서 따라 했다. 장단 기초도 모르는 나를 연세대 탈반의 정병훈 정수범 벗들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굳은 어깨와 허리를 풀어 제치며 자기 스스로 신명을 내며 추어야 춰지는 탈춤은 나의 트라우마를 풀 수 있는 비밀이 여기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했다. 저 어두운 1975년 유신시대에 한 청년은 탈춤마당으로 해방감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가 막바지로 갈수록 민주전선 단일 투쟁만이 기다리는 그 위험천만한 정치마당으로 탈춤마당은 언제든지 변할지 모르는데, 거기를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유신독재는 탈춤과 마당극을 불온시하여 늘 감시망이 붙었다. 벌써 감옥을 들락날락하게 만드는 위험한 해방구가 변신하기도 하는 탈춤, 마당극이 '70년대에 대학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전통을 공부하되 모순의 현장에 서서 대안문화까지 답해야 했던 시대, 앞에선 전통학습하고 뒤돌아서 창작하는 시대, 창작탈춤들과 마당극은 그렇게 태어나고 있었고, 풍물굿은 시위대 선봉에 서기를 자임하고 있었다. 그때는 탈춤에서 마당극, 창작판소리, 풍물을 통틀어 대학에서는 탈춤부흥운동이라 부르고 있었다.
처음 탈춤 배우기로 시작한 대학문화 써클활동은 관심을 점점 넓혀갔다. 마당극으로, 풍물굿으로, 무굿으로, 민화, 불화 공부로, 민요, 판소리 학습으로 점점 넓혀나갔다. 1980년대에는 대학가 축전 주류를 통키타 문화에서 대동굿으로 다 바꿔버린 문화운동이 된 것은 모두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선봉인 대학생회와 손잡고 민족민중문화운동을 펼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십여년 만에 전통문화학습으로 시작한 마당예술(탈춤 풍물 마당극)은 대항문화이자 대안문화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었다. 문화는 순우리말로 버릇이라 할 수 있다. 대학은 언제까지 수입문화나 수용하는 창구 노릇만 하는 곳이라면 버릇이 잘못 들었다고 우리는 보았다. 잘못 든 버릇은 고쳐서 우리 문화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익대 탈춤반이 비합법 써클에서 살아남은 '70년대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1975년 가을학기 등록 후 다음해 76,77,78년은 대학에서 써클 등록을 대학에서 치사하게 안시켜 주어서 학교 밖에서 활동해야 했다. 학교에 모임방과 연습실을 만들지 못하였으니 학생들과 자유로이 문화사업을 못하였다. 더군다나 나는 76년초에 군 징집에 응하였으니 방위로 제대할 때까지 76년 한해는 꼼작도 못했다. 제대 후에 대학에 돌아와도 탈춤 출 마당이 없어 학교 밖에서 활동했다. 학교당국에서는 <동일방직문제를 해결하라> 노동자 연극 참여 후 구류처분 사건 이후에는 나를 요주의 학생으로 지목하고 있어서 기피인물로 취급했다. 그렇다면 빨리 홍대 탈춤운동을 승계할 후배를 만드는 방법뿐이 없었다. 탈판 마당극 마당을 같이 데리고 다니며 새로운 대학문화의 물결을 보여주던 후배가 생겼다. 기대에 부응한 후배는 김원호였다. 김원호는 그 당시 미니멀아트니 개념미술이니 하는 서양미술 신사조에 흥미가 있어 하던 학생이었는 데 나를 만나서 방향을 바꿨다고 말한다. 나는 학교 비등록 써클 탈춤모임을 사대 미술교육학과 다니는 김원호에게 맡기고 학교 밖에서 활동과 학교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김원호가 아니었다면 홍대 탈춤반의 명맥이 끊어졌을 것이다.
나는 학교 밖에서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했다. 서울 문리대 연극반 제적생 박우섭과 마당극을 했으니... 인천 산업선교회로 가서 거기서 농성하는 동일방직 여공들과 77년 <동일방직문제를 해결하라>는 노동자 마당극을 만들었다. 이 마당극은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발표했다. 마당극의 끝은 깡패들의 똥물 투척을 재연했다. 연극은 끝나고 여공들은 제목을 뜯고 가두시위로 달려 나갔고 문 앞에서 포위되어 다 잡혀갔다. 공연마당은 경찰의 노조탄압에 항쟁하는 농성장이 되어버렸다. 당시 여론은 이 사건을 예술표현의 자유 탄압보다 박정희 정권의 노조탄압이며 인권탄압으로만 보고 있었다. 관람자 근 300명 그중 농성장에는 민주화운동의 핵심 인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 조화순 허병섭 등 내가 아는 인물만도 재야의 거물들이 농성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 마당극을 마치고 나면 농성장으로 바꾸어 동일방직문제를 해결할 투쟁의 기회로 전환하기로 조화순 목사와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정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노동자 인권탄압을 규탄하는 투쟁현장으로 전환하고 세계를 향한 여론전쟁을 펼 요량이었다.
나는 순진해서 거기까지는 짐작도 못하고 마당극 연출만 했던 것이다. 이 농성사태는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농성을 오래 끌면 끌수록 박정권은 불리해진다고 판단해서 농성 시작 세 시간도 안되어서 농성장을 파괴하러 백골단과 전경들을 투입했다. 나도 저항하다가 기독교회관 2층 강당 연극마당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동대문경찰서 전경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며 붙들려갔다. 내 생전 최고로 많은 폭행을 당한 날로 기억된다. 조사받던 중 이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연극에 출연한 해고노동자들에게 연출한 자를 대라고 취조가 집중되었다. 그녀들이 실토라도 한다면 나는 유신 정권에서 학교 제적은 물론 영창 신세를 못 면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염려는 기우였다. 형사들의 극한 취조에도 연극은 자기들끼리 만들었다고 하다가 조화순 목사와 같이 했다고 했을 뿐 동일방직 여공 해고자들은 나를 끝까지 불지 않았다. 단순 관람자로 어쩌다 농성에 휩쓸린 자로 분류되어 구류처분만 받고 귀가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학교당국은 이런 학생이 나오는 것 자체가 다른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중징계 처분을 건의했다고 한다. 대학은 무기정학 처분을 내려야 한다는 학생처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항녕 당시 총장이 처벌을 피하게 했다는 뒷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 우리 대학 총장 이항녕 선생이 나를 구제했다. 이항녕 총창은 일제 강점기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일제 하에 군수를 한 친일파였으나 해방후 친일파임을 반성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학자로 거듭났던 인물이다. 이후 나는 마포서 정보과에서 밀착 감시에 들어가 담당형사까지 붙었으니 1997년 가을학기 이후 2년반 동안 감시대상 학생이 돼버렸다. 그러나 나에게 동일방직 노동자연극 경험은 예술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술적인 작업도 정치적 저항이 되고 노동자 인권운동이 되는 현장문화 체험을 갖게 된 것이다. 군 제대후 복학생 대학 2학년 때 일이다. 경찰서 유치장도, 노동자들과 연극창작도, 정권의 폭력성과 기만성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예술이 이 사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방향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 미등록 탈춤반 모임은 김원호 후배가 나를 대신해서 이끌어 주었다. 김원호는 서양 전위미술 사조에 탐닉하던 미술학도였는 데 대학에서 탈춤 마당극 공연이 생기면 알려 주었더니 그 엄청난 집단신명에 푹 빠지게 되면서 탈춤을 하게 되었다고 훗날 고백한다. 탈춤운동은 누가 의식화를 시키며 커진 운동이 아니었다. 탈춤 마당극의 마당으로 소통하며 집단적 신명이 연대의 에너지를 만들어 냈다. 그가 있어서 학교당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홍대 탈반은 물밑으로 핵심회원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학탈반들이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전수에 도움을 주어서 우리는 강령 말뚝이춤, 은율탈춤, 좌도 필봉농악, 우도 판굿 등을 익히게 되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특히 좌도풍물 지리산 갈담 필봉굿은 78년 여름 현장학습을 가서 농민굿패들과 어울렸던 진한 원형문화체험이었다.
드디어는 1979년 대학에 정식으로 탈춤반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이기연 조소과 후배가 탈춤반 회장을 맡으면서 이기연, 김원호, 김주형, 임정희 등 미술전공 후배들이 홍대 탈춤반을 이끌었다. 이기연은 졸업 후 남편인 된 연성수(서울대 문리대 73학번 탈춤반 출신)와 우리옷 '질경이'사업을 펼쳤다. 1979년 새 학기에는 1학년 후배들이 대거 가입하며 탈춤반은 번성하게 되었다. 공대생 상대생이 신입회원으로 대거 들어왔다. 이재열, 이철수, 조형일, 김순호, 김영길이 그들이다. 사대생 라원식, 성효숙, 조소과 이혜주(서울문리대 연극반 출신 이상우 형 여동생) 등 금쪽같은 회원들이 생기면서 탈춤반은 활력을 찾았다. 대학 행사에 우도 풍물 판굿도 운동장에서 실연해 보이고 총장의 격려사를 받는 등 학교에서 인정받는 정상적인 써클 활동이 시작하는 좋은 시절도 만들어졌다. 1979년 10.26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 다음 해 '서울의 봄'이 5.17로 급냉하기 전까지는 홍대탈춤운동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홍대는 특별히 보수적이고 친여적인 행정당국으로 무조건 학생운동을 억압했으니 대학에서 살아남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에서 4년만에 합법적 문화써클이 돼 이듬해에 탈춤반에서 대학 총학생회장(이철수 상대 78학번)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당당히 대학생회를 장악하며 1980년 민주화의 봄 정국에서 홍익대생들도 민주화 집회도 열고 학생회 주도로 가투에도 나서게 된 것이다. 나는 비록 1980년 2월 졸업하여 창비출판사에 취직해서 ‘민주화의 봄’에는 발이 묶여 있어도 이렇게 성장한 후배들을 보고 고마웠고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해 5.18로 계엄포고령 위반자 신세가 되면서 나도 그 오월의 난리굿에 빨려 들어갔다.
탈춤과 나의 예술공부
나는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처음 탈춤을 추게 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탈춤 특유의 공동체 연대의 힘에 매료되어 갔으니 미술학도인 나는 미술에서도 탈춤과 비슷한 신바람나는 우리 문화가 있을 것이라 믿고 전통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계기도 탈춤에서 왔다. 특히 봉산 목중탈, 강령 말뚝이 탈을 직접 만들다가 조선의 전통미술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는 탈을 만들고 그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찾아간 곳이 연세대 뒤에 있는 봉원사 금어 만봉스님이었다. 여기서 불화의 붓그림 공부를 시작하는 데 이것을 초화(草畵)라고 한다.
대학에서 미술, 모더니즘이니 순수예술이니 하는 프레임을 벗어나 좀더 원초적인 날것 그대로의 조선화의 명맥이 내가 배우는 붓그림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불화는 오체투지(五體投地)하듯 하심(下心)하며 붓질하는 선적 수양의 일부 같았다. 민화 무화 고구려벽화까지 명맥이 이어진 마지막 남은 조선 장인화였다. 도화서는 조선말 해체되었으나 화승은 사찰에서 단청 불화의 수요가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그 원형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스승 만봉스님도 단청장 인간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인간문화재의 정부 지원 덕분에 나처럼 외지인도 학습을 시킬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주말마다 절에 가서 수양하는 마음으로 그린 불화 시왕초(十王草) 보살초(菩薩草)로 3년 학습을 시작했다. 절에 가서 차분하게 엎어져서 붓을 그으면 나는 차분해 졌다. 불화 공부는 훗날 나의 40년 창작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이를 미술운동에 활용할 것이라고 짐작을 못했다. 탈춤 풍물의 마당굿과 조선 장인 서화의 붓굿을 같이 공부하게 되면서 이십대 '70년대에 시서화가무악(詩書畵哥舞樂)을 같이 공부한 것은 나의 큰 복이란 사실을 훗날 깨달았다. 장르주의 벽에서 벗어나 폭넓은 예술공부였다. 유신시대 나를 예술공부 시킨 것은 ‘유신의 감시로 전통문화에 몰두하며 탈춤과 불교미술 수양 덕분’이었다. 그 시대는 그냥 낡은 박물관 문화유산만이 아니고 평소 생활하는 농부와 장인의 삶 속에서 전승되는 것을 보고 배웠던 마지막 시대였다. 이런 삶의 예술은 미술대학교에서 배우던 예술과 달리 보게 했다. 미래 예술공부를 저 파리나 뉴욕으로 유학 가서 모더니즘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현장의 민중 속에 거대한 문화의 뿌리가 감춰진 채 드러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수영 시인이 이것을 <거대한 뿌리>라고 말한 것이다. (계속)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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