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병들의 폭행과 괴롭힘을 당하던 해군 일병이 지휘관의 방치와 2차 가해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피해자가 사망한 뒤에도 군은 간부들을 해외파견 보내는 등 진상규명 의지가 없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군인권센터는 7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구타·가혹행위 피해자가 생전에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가해자와 분리 등 적절한 피해자 보호 조처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센터는 "피해자 사망 후 뒤늦게 시작한 수사도 해군은 함장 등 주요 수사대상자를 해외파병 보냈다"며 "매번 군에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 은폐해 책임질 사람을 줄여보려는 군의 특성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센터에 따르면 지난 2월1일 해군 강감찬호에 전입한 고(故) 정 모 일병은 전입 열흘 뒤인 2월11일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청원 휴가 2주를 받았다. 복귀 뒤에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따라 3월9일까지 격리 조치됐다.
괴롭힘이 시작된 건 이때부터였다. 가해자로 지목된 선임병들은 정 일병에게 "꿀 빨았다", "신의 자식이다" 등 폭언을 했다. 정 일병이 승조원실(생활관)에 들어오면 다른 병사들이 모두 나가는 등 집단따돌림도 이뤄졌다.
폭행도 이뤄졌다. 가해자들이 승조원실에서 정 일병에게 욕설을 하거나, 폭행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정 일병이 업무 중 실수를 하면 가슴과 머리를 여러 차례 밀쳐 넘어뜨렸다. 정 일병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뒤져라"라고 답하기도 했다.
센터는 해군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피해자 보호 조치하지 않고 상황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정 일병은 3월16일 함장에게 카카오톡 메신저로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함장은 가해자를 하선시키는 등 분리하는 대신 정 일병의 보직을 바꿨다. 같은 배 안에서 가해자들과 계속 마주치던 정 일병은 자해시도까지 이르렀으나 함장은 가해자들을 불러 정 일병과 대화하게 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지 않고 화해시킨다며 한 자리에 부른 건 2차 가해로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강감찬함 지휘부는 4월1일 가해자를 군기지도위원회에 회부했다. "군기지도위원회는 군기훈련이나 벌점을 주는 곳으로 실질적인 징계나 사건 수사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가해자를 하선시켜 수사하지 않고 군기지도위원회에 회부하고 마무리 지어 사건을 덮었다"는 게 임 소장의 설명이다.
심리적 불안이 심해진 정 일병은 4월6일 하선해 민간병원에 입원했다. 6월8일 퇴원한 정 일병은 열흘 뒤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센터는 해군의 수사의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함장, 부장 등 주요 수사대상자들은 지난 6월27일 아프리카 인근 청해부대(문무대왕함) 임무 수행을 위해 파견돼 현재까지 소환조사나 가해자 신상 확보 등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임 소장은 "진술이 오염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군사경찰은 배가 돌아오면 함장 등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할 뿐"이라며 "가혹행위 가해자들 역시 변사 사건 수사에 대한 '참고인'으로만 조사받아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임 소장은 "작전(파견)이 미리 계획됐다 해도 가혹행위에 의한 사망사건이라면 (가해자) 인사조처 하는 게 원칙이다.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구타·가혹행휘 가해자를 빼돌렸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국방부는 "정 일병에 대한 선임병들의 폭언 사실은 확인됐으며, 폭행과 병영 부조리에 대해서는 수사 중에 있다"며 "긴급파견을 나간 간부들에 대해서는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후에 추가 조사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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