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유럽연합집행위원회가 녹색금융 분류체계, 이른바 그린 텍소노미에 핵발전과 가스발전 배제 결정을 유보했다. 시민사회는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국가별 반응은 달랐다. 주요 산업 기반과 이해관계에 따라 녹색분류작업에 대한 국가별 대응과 반응이 상이하지만, 이 시점에서 짚어야 할 것은 결국 그린 텍소노미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가 논해야 하는 지속가능성은 인류의 생존과 미래에 관한 것이지, 산업의 생존과 미래에 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연합이 그린딜을 통해 향후 10년간 1조 유로(약 1350조 원) 이상을 지원하는 투자계획을 세우자 지속가능한 녹색금융 분류체계에 핵발전과 가스발전을 편입시키려는 로비는 치열했다. 유럽 그린딜을 선도하는 주요 국가들은 사실상 화석연료를 태우며 자본주의를 선도해 온 국가들이다. 기후위기를 유발한 책임의 주요 장본인들인 이 국가들의 산업은 석탄뿐만 아니라 가스, 핵발전에 기반한 이해관계가 다양하게 맞물려있다.
전력만 해도 독일은 석탄과 가스가 각각 23.7%, 16.1%(2020), 프랑스는 핵발전이 67%(2020)나 된다. 산업의 이해와 밀접하고 이를 대변하는 국가들이므로 녹색금융에 어떤 경제활동을 포함시킬 것인지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이들의 관심이 결국은 투자, 지원에 있지 녹색에 있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시킨다는 데 있다.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은 녹색금융지원대상에서 핵발전을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자력을 태양열, 풍력발전, 탄소포집 및 저장, 영국저탄소에너지믹스의 핵심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역시 석연찮다. 핵발전을 저탄소에너지믹스의 핵심으로 칭한다면, 석탄발전에도 방사능안전 에너지믹스의 핵심이란 표현이 가능하다. 언어는 강자의 것이기도 하듯. 그래서 언어에서의 그린워싱도 가능하듯.
독일 자연보호연맹(DNR)은 유럽연합이 지속가능한 활동의 범주에 핵발전과 가스발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것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도 조금씩은 달랐다고 전했다. 독일의 반핵그룹인 아우스게슈트라트와 움벨트힐페는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했다. 산업계의 강력하고 집요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위원회가 가스와 원자력을 지속가능한 투자대상으로 분류, 결론내지 않았다는 점을 평가했다고나 할까?
그린피스 유럽사무소는 유럽연합집행위가 화석연료인 가스, 핵발전과 같이 명백히 잘못된 해법에 대한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분트(BUND)도 핵산업계의 로비에 무릎 꿇는, 핵발전이 지속가능한 투자로 인정되는 촌극이 연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WWF유럽사무소는 바이오에너지란 이름으로 나무를 벌목하고 연소하는 행위를 지속가능한 투자로 분류한 것은 기후와 생물종다양성 보호에 재앙적 소식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몇몇 엔지오들은 이번 보류결정에 강하게 반발하며 유럽연합 녹색분류 자문위원회를 탈퇴했다.
언어라는 영역이 그린워싱이 벌어지는 공간이란 점은 국내 핵발전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은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에도 핵발전량이 늘고 있는 나라다. 핵발전소가 21기에서 24기로 늘었다. 영구정지된 핵발전소보다 새로 지어진 핵발전소가 더 많은 나라다. 핵산업계는 추진해 본 적도 없는 국내의 탈핵정책을 두고 탈핵 때문에 기업이 주저앉은 듯 이야기한다. 그러나 경주에 추진 중인 제2원자력연구단지에 쏟아 붓고 있는 예산은 수천억 원을 넘는다. 소형모듈원자로라는 크기만 작아진 핵발전 부흥과 지원에 거대 정당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국내 녹색분류체계에서 핵발전이 빠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핵발전을 온실가스 배출 없는 깨끗한 발전원으로 포장하는 시도가 중단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그린워싱의 지위를 핵발전은 우월하게 누려왔다. 대기오염, 미세먼지에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핵발전은 대기오염물질 없는, 미세먼지로부터 안전한 발전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지금 기후위기의 대안이 핵발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듯이. 죽음의 방사능 물질 방출 따위는 가능한 뒷전에 감춘 채 녹색으로의 분칠을 여지없이 해왔다.
핵발전만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기후·환경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녹색금융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자 지난 해 녹색금융 TF를 출범시키고 녹색채권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녹색프로젝트를 기후변화 완화 및 적응, 천연자원 보전, 생물다양성 보전, 오염방지·관리, 순환자원으로의 전환이라는 목표에 부응하고 각각의 목표가 다른 목표와 상충해서는 안 되는 기준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녹색채권가이드라인 부속서에 예시된 녹색프로젝트들을 보면, 놀랍게도 녹색으로 분류되기에 부적절한 사업들이 나열되어 있다. 예를 들면 용량 제한도 없이 수력발전을 예시한다. 그렇다면 산 위에 두 개의 거대한 댐을 지어 운영하는 양수발전도 녹색사업으로 분류할 심산인가? 저탄소운송을 위한 육상 운송 인프라로 각종 도로, 공항 활주로를 명기하고 있다. 이런 사업들이 과연 저탄소 녹색프로젝트일 수 있다고 여기는지 의아스러움을 넘어 녹색프로젝트 분류의 목적이 무엇인지, 녹색이란 분칠로 투자 지원을 얻어내겠다는 것이 여전한 현실이 아득하기만 하다.
단일한 기준, 잣대로 구분하고 그룹핑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개념에 따른 범주를 원칙과 구분도 없이 녹색채권, 녹색분류, 녹색금융이란 이름의 범주에 함부로 끼워 넣는다면 그린워싱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앞으로 한국형녹색분류체계가 확정되면 부속서 또한 개정될 예정이라고 하나, 그린워싱을 구별해내는 가이드가 될지, 그린워싱을 보장하는 가이드가 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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