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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탈춤과 나'라는 수레를 이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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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탈춤과 나'라는 수레를 이끌고 싶다

[탈춤과 나] ⑫ 정혁조의 탈춤

글을 써보려고 모처럼 서안 앞에 앉아 초안을 잡는다. 붓 대신 플러스 펜을 들었다. 원고지를 대하니 감회가 새롭다. 그러나 글을 쓸 새가 없이 나는 바쁘다.

이메일 도착을 알리는 화면을 보라는 전자음이 들린다.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전화 드렸던 기나리라고 합니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닷컴’(www.pressian.com)에 ‘탈춤과 나’라는 제목으로 2003년 1월부터 연재될 칼럼의 원고를 부탁 드렸습니다. 다들 많이 바쁘시리라 여겨지지만 1월부터 칼럼 연재가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로 다시 한 번 원고 부탁드립니다. 분량도 A4용지 3~4장 원고지(15~20매)입니다, 가능하면 이번 주까지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구요, ^^ ;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새해에도 좋은 일들로 늘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원고 꼭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탈춤과 나’ 연재를 위한 연재 담당자 기 나리씨의 사연이 긴절(緊切)하다. 곁들인 건강 기원과 새해 덕담에 나의 가슴이 찡한다. 글을 쓴다는 것이 진땀으로 가슴을 저미는 일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하잘 것도 없는 것이라서 겁도 없이 덤비는 내 자신이 안쓰럽다.

1973년은 계축년(癸丑年), 30년 전이다.(이 글은 2002년에 쓰여졌다.편집자) 시국선언마다에 서릿발이 곤두섰던 시절이다. 대학노트 사이에 끼어둔 유인물이 꼭 한 장만 남아 있다. 지금의 1호선 제기역 부근 용두동에 있던 가정대학은 6월 어느 날에 축제를 했다. 동숭동 문리대에 있던 서울대학교 민속가면극연구회가 가정대학 캠퍼스에 초청되었다. 공연은 봉산탈춤이었다. 나로 말하면 본시 촌구석에만 살아 탈춤은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는데, 그날 맞닥뜨린 것은 팔 목중춤 중 뭇동춤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전개 양상을 지녔다. 팔목중이 4명씩 두 줄로 나뉜다. 둘째 목중 춤을 두 방향으로 동시에 춘다. 두 줄이 한 줄로 한 줄이 두 줄로 바뀌는 점이 지금과 확연히 구분된다. 원형을 이루며 연풍대를 돌고 까치걸음으로 퇴장하는 뒷부분은 지금과 대동소이하다.

그 날 희완 형이 노장춤을 건드러지게 춘 사실은 먼 훗날(만 일년도 훨씬 지난 후에)알게 되었다. 뒤늦게 용두동에서 민속가면극연구회에 합류한 나는 그해 1973년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고개 잡이, 발 들기, 좌우로 뛰기, 불림, 외사위, 곱사위, 양사위 그리고 ‘낙양동천이화정(洛陽洞天梨花亭)’을 온 몸으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 애주 형, 최 정만 형, 둘도 없는 벗 황 재순 군의 뒤를 이어 다음해 봄 용두동 사범대학 캠퍼스 운동장 마당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봉산탈춤 공연을 하였다.

글 솜씨를 아끼다 보니 사족을 달지 않을 수가 없다. 희완 형의 뜻을 그대로 표절한 셈이라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공연 안내장에 적힌 인사말을 있는 그대로 옮긴다.

- 탈춤공연을 하면서 -

한 나라 문화 발전은 면면히 내려온 전통문화를 토대로 한 이의 계승․발전․심화에 달려 있거니와 그 나라 문화의 정수는 민족예술 속에서 발현되어 왔다고 하겠습니다.

민족예술 중에서 그 內容(내용)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생활감정과 서민의식(喜戱劇精神)이 가장 두드러지게 응결되어 있고, 形式面(형식면)에서 音樂․舞踊․文學․演劇(음악, 무용, 문학, 연극)의 調和(조화) 속에서 構成(구성)된 가장 理想的(이상적)인 藝術(예술)로서 그 역사민족학적 가치와 더불어 현대예술에 기여할 가능성을 무한히 함유하고 있는 민속가면극(탈춤․산대놀이 등)이 몇몇 뜻 있는 인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무관심 속에 그들과 격리되어 갈 뿐만 아니라 그것의 무형성(無形性)이 상승작용을 하여 불행히도 소멸되어 버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에 우리 젊은 대학인들이 민속연희예술의 原型的 傳受(원형적 전수), 廣範圍(광범위)한 接近(접근), 學問的 定立(학문적 정립)과 그 普及(보급)을 꾀하고 이의 現代的 受容(현대적 수용)을 위한 發展型(발전형)을 모색하여 민족극예술의 확고한 수립에 그 일익을 담당하고 나아가 국제무대에의 대등한 문화교류에 참여하려는 취지 아래 민속가면극연구회라는 모임을 가져 왔습니다.

그의 일환으로 저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민속가면극연구회에서는 봉산탈춤을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의 연희형태를 오늘에 되살려 모닥불로 어둠을 밝히고 탈 판을 중심으로 관중과 연희자가 함께 우리의 몸짓, 우리의 동작, 우리의 말솜씨를 익혀 우리의 놀이를 놀고 우리의 멋과 흥 그리고 여유 만만함을 즐기십시다.

따뜻이 호응해 주신 지도교수님과 학우들에게 감사드리며, 아울러 연희를 지도해 주신 김 기수 선생님을 비롯하여 예능보유자, 그리고 전수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회장 정혁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시의 생생함을 살리고자 하는 원고청탁의 취지의 힘을 빌려 나 지금은 아련히 낯이 설기까지도 한 이름들이지만 나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그대로 옮긴다.

- 나오는 사람들 -

제1과장 : 4상좌춤 - 이윤지, 김소영, 최옥수(여), 이정단

제2과장 : 8목중춤 - 최옥수(남), 김도현, 이기환, 변형민, 최재웅, 정혁조,

오상확, 안창모

제4과장 : 노장․신장수․취발이춤

노장 : 정숙채, 소무 : 이정단, 신장수 : 오상확, 취발이 : 임영록,

원숭이 : 박영림(찬조)

제5과장 : 사자춤

사자 : 김병연, 오지탁, 마부 : 최옥수(남)

제6과장 : 양반․말뚝이춤

맏양반 : 변형민, 둘째양반 : 이기환, 도령 : 김도현

제7과장 : 미얄․영감춤

미얄할미 : 최옥수(여), 영감 : 정혁조, 덜머리집 : 이윤지, 남강노인 : 최재웅,

무당 : 조영수

지도교수 : 이 두현

연희지도 : 김 기수, 윤 옥, 김 선봉, 조 운용

반주 : 박 동신, 지 관용, 오 명옥

기획 : 정 혁조, 홍 혜례, 임 영록

후원 : 한국가면극연구회, 서울대학교 민속가면극연구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생회

이상의 회장 인사와 등장 인물은 주변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것이라 세상 사람들이 전혀 챙기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뜻에서 굳이 모두 옮겨 적는다. 더구나 나 자신의 추억을 이루는데 더없이 소중한 분이라는 것이 그들을 언급하도록 한 몫 거드는 것이다.

반주를 맡으셨던 세 분 선생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연희지도 난의 김 선봉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6년이 지났다. 안타까운 일이다.

애석하게도 김 기수 선생님도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나 현재 봉산탈춤 보존회로부터 제명되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내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또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어서 그때 그대로의 봉산탈춤 과장별(科場別) 해설은 싣고자 한다. 당시 민속가면극 연구회의 과장별 해설이 지금보다 휠씬 덜 다듬어진 내용임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意義)있는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 科場別(과장별) 해설 -

4 상 좌 춤 : 벽사(辟邪)의 의식무(儀式舞)로서 상좌 넷이 모두 흰 장삼을 입고 붉은 가사를 메고 고깔을 쓰고 나와 사방신(四方神)에게 제사를 드린다.

8 목 중 춤 : 춘정(春情)에 못 이겨 욕정에 몸부림치는 팔도 목중이 하나씩 나와 춤자랑을 겨루다가 들어가고 다시 나와 합동춤을 춘다.

“나도 본시 강산 오입장이로 산간에 묻혔더니, 풍류소리 반겨듣고 염불에 뜻이 없어 이런 좋은 풍류소리에 어디 한번 놀고가려던 낙양동천이화정………”

노 장 춤 : 생불이라 이르는 노승이 소무(小巫)의 요염한 교태와 능란한 유혹에 빠져 파계함을 뜻하는 것으로 육환장(六環杖)을 집어던지고 소무를 얼르다가 소무와 대무(對舞)하여 춤을 춘다. 신장수가 등장하여 노장을 놀리다 들어가고 천하 한량 취발이가 나와 소무를 빼앗는다.

사 자 춤 : 파계승에 대한 벌을 주려고 부처님의 영을 받아 내려온 사자는 먹중들의 회개로 용서하고 어울려 춤을 춘다.

양 반 춤 : 말뚝이가 양반 삼 형제를 모시고 등장하여 양반의 생활상을 재담으로 재미있게 풍자하여 표현한다.

미 얄 춤 : 영감을 찾으려고 갖은 고생을 다하던 미얄은 다행히도 영감은 만났으나 첩, 덜머리집의 손에 죽고 그 명복을 비는 굿을 동네의 남강노인이 마련한다.

봉산탈춤 해설은 생략한다. 마땅한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다루도록 한다. 1974년 5월 22일 용두동에서 사범대학 민속가면극연구회 창립 공연을 마친 뒤로 지금까지 계속 봉산탈춤을 접하다 보니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쉬지않고 덧없이 흘렀다. 지금도 8목중춤을 추면 신이 절로 난다. 전수장학생 과정을 공식적으로 1979년 9월 1일부터 1984년 8월31일까지 마쳤다. 전수보고서를 분기별로 쓰고 전수장학금도 받았다. 1984년 9월 1일 자로 이수증명서를 받는다. 그후 봉산탈춤 이수자로서 지금까지 봉산탈춤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봉산탈춤 공연 참가횟수는 어림잡아 800회에 다다르고, 10여 차례의 해외 순회공연도 다녀왔다.

오늘 2002년 12월 29일 일요일 오후3시에 봉산탈춤보존회 정기총회가 열린다. 2002년도 결산총회로서 2002년도 감사보고, 업무보고를 한 뒤,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하여 2003년도 사업계획안 확정 등을 결의하게 된다. '탈춤과 나'의 연재 취지대로 라면 대학탈춤 관련 내지 민족극 운동 등만을 다루게 될 것이다. 사실상 연재취지와 동떨어진 활동을 해오고 있는 나는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분야의 연희종목의 하나인 봉산탈춤만의 원형 보존 및 전승에만 오로지 참가했다. 이러한 기록도 나름대로 연재될 일말의 필요성이 있다면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칼럼 한 편에 오롯이 연재를 이어나가고 싶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만일 탈춤에 관한 원형의 보존 전승에만 오로지 한 점에서 과분한 부탁으로 여겨진다면 미련 없이 붓을 거둘 수 있음도 아울러 밝히는 바이다.

마침, 나로서는 첫 탈춤마당인 1974년도 공연 안내장이 있어 앞면과 뒷면을 스캔하여 첨부 메일로 보내 함께 실어주기를 기대한다.

현금(現今) 문화 상황에 대한 따끔한 질책거리가 될 만한 것을 적어본다. 그러나 이 또한 역시 봉산탈춤에 관한 우물안 개구리 식 생각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 시사하는 바는 자못 크기에 거들고 지나간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게시판에 실린 글들이다. 2002년 초에 봉산탈춤 예능보유자 지정예고를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정예고가 다시 보류 내지 취소되었다. 보류 내지 취소에 관한 부당함에 대한 빗발치는 항의 및 시정요구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당함을 지적하는 논리는 논리가 정연하다. 이에 대한 문화재청의 답변은 모르쇠에서 → 은근한 압박과 회유로 → 합의종용으로….

문화재청의 소치(所致)는 한 마디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헤매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모든 사태의 전말은 문화재청 담당과장의 독단에서 비롯된다. 이용학과장이란다. 모든 정황 및 사태 진전의 빌미는 보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관 주도의 문화재 보존․전승 시책의 폐해(弊害) 때문이다. 모든 정황 및 사태 진전의 빌미는 보편적이고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퇴물 관료들이 주재하는 관 주도의 문화재 보존․전승 사업의 폐해(弊害) 때문이다. 봉산탈춤예능보유자 지정예고를 했다가 보류 취소한 것도 한 관리의 감정적 한풀이의 수용(受容) 차원에서 다루어진 무책임한 소치(所致)에 좌우된 것이다.

관 주도의 문화재 보존․전승의 폐해를 보여주는 가장 일반적인 예의 하나에 불과하다. 실제로 관 주도의 문화재 보존․전승행위의 대다수 아니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라고 나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이제, 이 연재를 가능하게 하는 추진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써 기본원칙을 한 가지만 세우고자 한다.

먼저, 지난 날 7, 80년대 이후의 확정되어진 사안들에 대한 회고를 통하여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 수레의 한쪽 바퀴의 동력으로 삼고,

이어서 21세기의 어제와 오늘에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상세한 기록으로써 나머지 한 바퀴의 자취를 그리며 ‘봉산탈춤과 나’ 라는 수레를 이끌고 싶다.(2002년)

글쓴이 : 정혁조 봉산탈춤보존회 회원, 수도전기공고 교사,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72학번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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