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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시대의 탈춤이, 하버드의 풍물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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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시대의 탈춤이, 하버드의 풍물패로

[탈춤과 나] ⑪ 강정례의 탈춤

고교시절 신문의 칼럼이나 취재기사를 통해 전통문화의 보존에 대해 막연한 안타까움을 가졌었다.대학 입학 후 여러 동아리 활동을 찾던중 연극반 활동을 통해 탈춤 연습이 시작됨을 알았고 그로 인해 탈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당시 재학했던 학교에선 가르쳐 줄 분이 안 계셔서 지금의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사이에 있던 표준공업연구소 한켠에 있었던 창고에서 서울대 문리대 탈반 선배들께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의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의 지도도 받았고 봉산탈춤, 강령탈춤의 전수관에도 가서 배우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 때가 가장 열심을 내며 신나게 지냈던 시기였다.

72년 가을 유신헌법의 공표로 각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져 수업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과제물 제출로 대체되던 때라 시간적 여유가 생겨 선배의 권유를 따라 가게된 송정동 판자촌의 경험은 '대학생'이란 위치가 많은 이들의 희생에서 가능했음을 알게 된 계기였다.그 마을의 실태조사를 하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하루의 삶을 지탱하는 도시빈민들의 생활이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 다니던 교회(서울제일교회)의 성탄프로그램에 대학부에선 도시빈민이 사는 무허가 판자촌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장엄한 화엄'(?)을 홍세화 선배의 연출로 올렸는데 교회에서 판자촌 저소득층의 문제와 종교인들의 허상을 꼬집어 사회문제를 극화한 것이 교인들에게도, 참여하는 학생들에게도 신앙인의 자세와 그 실현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했었다.

73년 봄학기 시작과 함께 학교가 열려 '민속극연구회'를 등록한 후 학교 축제의 한 프로그램으로 창립공연을 하였다. 저학년이었지만 창립멤버로서 참여하였기에 준비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당시엔 여학생들이 탈춤을 공연했다해서 언론의 관심거리가 되어 텔레비젼 아침방송에 나가 알리기도 했었다. 그해 여름엔 서울대 탈반 선배, 동료들과 안동에 가서 며칠간 숙식하며 하회별신굿을 배웠고 부산에 들러 수영오광대를 배웠었다. 이는 인간문화재 선생님들께서 대학생들이 배우려고 하는 것을 신통하게 여겨 가능했던 일이었다.

▲1973년 5월 30일, 이화여대 버들마당에서 펼친 민속극연구회 창립 공연, 봉산탈춤 중 사자춤 장면, 사자춤에는 김기연언니와 목덕인이 추었고 나는 마부로 나섰다. ⓒ강정례
▲봉산탈춤 중 5목춤을 추고있는 나. ⓒ강정례

그후 같은 해 여름 연세대 기독청년학생회는 여름이면 상습적으로 침수되던 성산동 뚝방촌에서 여름 봉사활동을 하며 마을축제를 위해 동참하기를 청하여 마지막 날 길놀이로 시작하여 동네사람들과 한바탕 어울어지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로 인해 연세대의 탈춤반이 시작되었다. 각 대학의 탈꾼들은 서로 가르쳐주며 배우는 사이인지라 한번은 의정부 가는 길에 있던 수양관 같은 곳에서 연합하여 마당놀이의 신명을 마음껏 놀아본 기억도 있다. 이때 황석영 작가도 참여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대하소설 <장길산>의 구월산 장면의 모델이 되었던 듯 여겨졌다.

73년 겨울 다니던 교회의 대학부는 엄혹한 유신시절이었지만 성탄절 행사로 소외된 농민문제와 사회구조적 모순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우리나라 최초라고 말할 수 있는 민속창작마당굿 '진오귀굿'(임진택 연출, 채희완 안무)을 공연하였다. 교회에서 장구와 꽹과리로 장단을 맞추는 굿을 공연한다는 것은 상상도 안될 때였으나 전통문화와 민중, 청년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서 지원을 해오신 박형규 목사님이 계셔서 가능했다.

그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74년 초 겨울이었지 싶은데 기독자교수협의회의 연례행사에 가서 봉산탈춤의 먹중춤과 뭇동춤을 추며 한바탕 놀아보았다. 이는 당시 남미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의 영향도 있었고 하비콕스의 '바보제'의 발간사를 쓰신 현영학 교수, 우리 전통문화와 고유신앙을 연구하시는 유동식 교수, 한국사회의 변동에 따른 소외된 민중을 연구하시는 민중신학의 창시자 서남동 교수님들의 관심에서 가능했고, 지배자의 억압에 맞서는 서민들의 풍자와 해학으로 갈등을 풀어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해온 순기능이 예수공동체와 지향하는 바가 같아서가 아닐까 여겨졌다. 탈춤과 굿과 기독교가 대척점에 있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민중문화. 민중신학, 민속학은 한국적 참여신학의 한 부분이 되어갔다.

75년 여름엔 선배로서 서강대 탈반과 함께 봉사활동 겸 답사차 경상남도 사천군 가산에 다녀왔는데, 거기서는 '가산오광대'가 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했다. 그 시기엔 인간문화재 선생님들(봉산의 김선봉, 양소운선생님, 양주의 유경성, 김상용 선생님)과 선배들에게서 배운 봉산탈춤과 양주별산대 놀이를 YWCA, YMCA 직장 청년부에서, 또 겨울방학 땐 광주에 가 전남대 학생들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전국기독학생회의 광주 겨울대회와 목포여름대회에 참가하여 짧은 맛뵈기를 통해 기독청년들은 민중문화의 중요성을 체험하게 되고 그 후 민중문화분과를 만들어 보수적 신앙에서 자란 청년들을 깨우고 더불어 노동운동의 장에 연결 되어 노동자들과 함께하며 탈춤을 전수하여 나중엔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앞장서게 되었다 한다.

▲뒤풀이를 위해 등장하는 중, 앞이 안정례 언니, 가운데는 나, 뒤는 김은주 언니 ⓒ강정례
▲1974년 양주별대놀이 전수회관을 짓고나서 올린 고사굿에서의 양주탈들. ⓒ강정례

기억은 흐리나 76년인지 정부가 판자촌 주민들을 부천에 집단이주시켜 형성한 '복음자리' 마을에 가서 당시 마을지도자인 제정구, 장의균 선배의 주선으로 새로운 터전의 시작을 위한 길놀이와 마을 축제를 같이 하게 되었다. 성산동에 이어 공동체문화의 가능성을 만난 두 번째 경험이었다.

탈춤으로 인한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은 졸업 후 여러 선배들과 함께 우리시대의 사회현상과 문제를 마당극으로 표현해보려고 민속창작극 모임인 '한두레'를 시작하여 김민기 님이 쓴 노래극 '공장의 붑빛'을 채희완선배의 연출과 안무로 연습하여 비밀리에, 다녔던 대학의 방송실 스튜디오에서 녹화를 한 일이었다. 노래와 춤과 짧은 대사로 당시 처했던 노동문제를 다루었다. 이 녹화는 한국교회 사회선교회의 후원으로 가능했음을 나중에 알게 됐고 각 노동조합에서 응용하여 공연할 수 있게 얼개를 갖춘 작품이었다. 당시엔 녹화된 테이프조차 없어 볼 수 없었지만 요즘은 유튜브에 자료로 남아있어 당시를 회상하며 시청해보니, 나의 출연은 어설펐지만, 안무나 노래는 지금 봐도 훌륭한 작품이어서 출연했던 자체만으로도 뿌듯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기독교학을 공부했고 탈춤을 만난 인연으로 사회학과 연계한 민속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결혼, 육아, 미국 이민은 나의 열정을 한동안 멈추게 했고 청년시절의 활동들은 기억 한쪽에 치워져 있었다. 이곳에 어느정도 적응이 되면서 아이들 학교나 한글학교, 교회학교에서 급조된 의상과 탈을 쓰고, 탈춤을 보여주고, 마당극의 분위기와 세시풍속을 가르쳐 주고자 하였다.그 인연으로 이곳의 봉사단체 내 청년들 모임에서 사물놀이패가 만들어지고, 음력 설엔 한인상가에서 지신밟기도 했다.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도 풍물패가 만들어졌고 요즘은 2세들로 구성된 농악단도 만들어졌다.미미하나마 우리의 공동체문화는 미국 땅의 한 곳, 이곳의 환경에 맞게 변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1973년 버들마당에서, 봉산탈춤 마부역의 춤과 재담을 지도해준 채희완 선배(왼쪽)와 윤대인 선배와 함께. ⓒ강정례

강정례 약력

*1973년 이대 민속극 연구회 창립멤버

*이대 기독교학과 졸업

*이대 대학원 사회학과 문화인류학 수료(민속학 연구)

*미국으로 이민

*한글학교 교사와 교회학교 교사

*Flushing YMCA staff at New York City

*College Consulting at Seed Learning Center

*Retired & Part time work at Immigration Law office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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