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의료법 개정으로 통과된 의료기관의 '비급여 진료내역 보고 의무화' 정책이 지난 6월 30일부터 본격 시행되었다. 대한의사협회와 병원협회 등 주요 단체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거부 입장을 밝힘과 동시에 비급여 통제에 맞서는 대응으로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폐지를 검토할 것을 주장하였다.(☞ 관련 기사 : <라포르시안> 7월 9일 자 '4개 의료단체장 "비급여 보고 의무 강행하려면 당연지정제 폐지도 검토"') 당연지정제는 모든 의료기관을 건강보험 적용기관으로 지정함으로써 건강보험 환자에 대한 치료를 거절할 수 없도록 한 제도다. 의료계의 주장은 저수가 구조를 바꾸지 않는 상태에서 비급여까지 통제할 작정이면 차라리 건강보험 바깥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의 진료비를 받을 수 있게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당연지정제 폐지를 둘러싼 논란은 오래되었다.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개별 의사와 병의원은 자발적 선택에 따라 건강보험공단 외에 다른 민간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당 보험가입자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찬성 측은 이를 통해 양질의 고급 의료서비스 시장이 활성화되어 의료소비자의 선택권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주된 이유를 든다. 반대하는 이들은 폐지될 경우 경제적 능력에 따라 의료이용의 불평등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하며, 이를 의료영리화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시장친화적 의료시스템을 꿈꾸는 이들의 이상적 모델인 미국에서는 당연히 당연지정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별 환자가 가입한 보험 종류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도, 서비스의 종류와 범위도 천차만별이다. 그렇다 보니 경제적 여력이 없어 보험료가 저렴하지만 보장성이 불충분한 보험상품에 가입한 이들로서는 의료비 부담 때문에 웬만큼 아파도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의료보험 자체에 가입할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인 경우에만 한국의 의료급여와 유사한 제도인 '메디케이드(Medicaid)'를 통해 정부가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메디케이드 환자 역시 민간보험과 마찬가지로 주정부와 계약을 체결한 의료기관만 이용할 수 있다. 문제는 메디케이드 환자에 대한 진료비 수가가 다른 보험상품보다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리 목적의 의료기관들로서는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메디케이드 환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 보조금 지원 등 인센티브 정책이 있긴 하지만, 메디케이드 환자에 대한 진료 기피 현상이 만연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이와 관련해서 주로 어떤 의료기관이 메디케이드 환자진료를 기피하고 있는지 분석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바로 가기 : 메디케이드 환자 기피하기: 메디케이드 환자를 진료하지 않는 일차의료기관의 특성)
연구진은 미국 의료기관 일차의료 현황에 대한 조사 자료(2017~2018년)를 사용해 의사와 의사보조사(Physician Assistants), 전문 간호사가 포함된 복수의 의료진이 근무하는 일차의료 수행기관을 대상으로 분석을 수행했다. 메디케이드 진료 수입이 전혀 없는 기관과 10% 이하, 그리고 10% 이상인 곳, 이렇게 총 세 그룹으로 분류하여 각각 어떤 특성을 보이는지 확인했다. 먼저 통계보정을 하지 않은 단순 결과를 살펴보면, 메디케이드 진료를 하지 않는 기관의 경우 병원이나 집단개업보다는 독립적인 자영업 형태가 많았고, 기관 내 의료진의 수도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또, 다른 두 그룹보다 진료자가 의사인 비율이 높았고, 연방정부인증의료기관(공적 성격이 비교적 강한 병원)의 비율과 빈곤층 환자 비율이 낮았으며, 대부분 대도시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고).
이어서 연구진은 의료기관 소유자와 일차의료인력 수, 연방정부인증의료기관 비율, 메디케이드 자격조건완화 주와 도시/시골 지역 위치 여부, 기관 소재지의 중위가구소득과 빈곤율(20%) 여부 등의 변수를 통제한 가운데 분석을 수행하였다. 분석결과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추가로 확인된 점은, 메디케이드 진료를 하지 않는 기관은 메디케이드 자격요건을 완화하지 않은 주, 그리고 중위가구소득이 높은 지역에 위치할 확률이 높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연구진은 소규모 의원들이 메디케이드 환자를 꺼리지 않도록 진료비 청구에 대한 행정부담을 줄여주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언하고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대도시의 부유한 지역에 있는 의원일수록 저소득층 환자 진료를 꺼릴 확률이 높다'는 사실에 있다. 즉, 한국적 상황에서 이 연구결과가 시사하는 함의는 당연지정제 폐지 반대론자의 우려대로, 당연지정제가 폐지될 경우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접근성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금도 의료급여 환자에 대한 낮은 종별가산율(건강보험대비 75% 수준)과 만성적인 진료비 체불 문제로 인해 진료를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법적 강제성마저 사라진다면 더욱 노골적으로 차별 진료 행태가 횡행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당연지정제 폐지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의료계는 과거 이를 두고 한차례 헌법소원까지 제기했던 적이 있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오히려 건강보험공단이 주도권을 쥐고 선택적으로 계약을 거부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치열한 적자생존의 경쟁이 의료시장에서 펼쳐질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의료계가 당연지정제 이슈를 꺼내든 건 일종의 '블러핑' 전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 당연지정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태도가 우려스럽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료도 상품(경제재)일 뿐”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의료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정책 기조를 '의료사회주의'로 규정하고 비판한다. 의료라는 상품을 시장에서 자유롭게 매매하고 싶은 의료공급자의 이윤추구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말라는 게 이들 주장의 요지인 듯싶다.
자유는 중요하지만, '누구'의 자유, '무엇'으로부터 자유인지가 더 중요하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쩌는 그의 책 <정의와 다원적 평등>에서 모든 분배영역은 각각의 고유한 내재적 원칙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사회적 가치도 결코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는 사회"(19쪽)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유 교환', '응분의 몫', '필요'라는 세 가지 분배원칙을 제시한다. 우리 사회가 "모든 시민이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공리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의료라는 가치의 분배는 '필요'의 원칙에 따라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시장에서의 '자유 교환'을 위한 매개물인 '화폐'가 지배적 가치를 지니게 되면서 모든 경계선을 넘나들며 영역들의 고유한 자율적 분배원칙을 침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배적 가치인 자본이 의료 영역에 침투하여 이를 시장화시킴으로써 의료가 건강상의 필요가 큰 사람들이 아니라 '비용지불능력'이 큰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분배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다.
만약 시장론자들이 비판하는 '의료사회주의'란 게 의료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비지니스적 자유보다 자본의 침투로부터 의료라는 고유한 영역의 자유를 더 우선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의료자유주의'가 더 맞는 표현 아닐까? 이때 '실질적' 의료자유주의는 “의사들의 시장의 자유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그들에게는 '응분의 몫'을!), 자본의 부당한 지배로부터 의료 영역의 고유한 분배원칙인 '필요'의 원칙을 지킴으로써 모두가 건강을 추구할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의료는 소비자(고객) 중심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받는 '사람' 중심이 되어야 옳다.
* 서지 정보
- Steven B. Spivack, Genevra F. Murray, Hector P. Rodriguez, & Valerie A. Lewis (2021). Avoiding Medicaid: Characteristics Of Primary Care Practices With No Medicaid Revenue, Health Affairs, 40(1): 98-104. https://doi.org/10.1377/hlthaff.2020.00100
- <정의와 다원적 평등: 정의의 영역들>(마이클 왈쩌 지음, 정원섭 외 옮김, 철학과 현실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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