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8일 오전 11시, 서울 강서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앞에서 '노동위원회 부당해고 판정 불복, 직장 내 성희롱 사용자 책임 회피, 한국문화관광연구원 규탄 기자회견'이 29개 시민사회단체 이름으로 열렸다.
사건은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0년 7월 17일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한국문화관광연구원(문광연) 정규직 남성 연구원 A 씨는 2017년부터 수차례 계약직 연구원들을 강제추행했다. 피해자들은 A 씨에 의해 고용여부가 결정되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지 못했다. 문광연 내 성고충위원회에 피해 사실을 알린 후에는 상사를 내부고발했다는 이유로 업무에서 배제되는 등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바로가기)
문광연은 성추행 피해자 중 한명이자 공익제보자인 정인영 씨를 2020년 2월 29일 부당해고했다.
이후 이 성희롱 사건은 같은 해 7월, 피해자들이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처음 공론화됐다. 공론화 과정에서 문광연이 2017년 사건 당시 피해 신고가 있었음에도 피해자 보호조치와 사건 해결을 위한 공적 절차를 전혀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공분을 샀다.
문광연은 뒤늦게 진상조사와 징계절차를 통해 가해자를 파면했지만, 성차별적인 노동환경을 방치하고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은 기관의 책임에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 사건은 왜곡된 위계질서 속에서 벌어진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자, 공공기관 내 성희롱 예방과 해결을 위한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피해자이자 공익제보자인 정인영 씨는 2017년 성희롱 신고 후 2020년 부당해고 전까지, 가해자로부터 오랫동안 직장 내 괴롭힘과 따돌림 등 2차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문광연이 자체 조사한 결과보고서 내용은 참담할 따름이다. 피해자의 성격 등을 문제 삼으며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한 이유를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대목은 보고도 눈을 의심케 한다.
문광연은 이런 편향적인 조사 결과보고서를 작성하고도 정작 피해자에게는 조사결과를 통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피해자는 부당한 조사결과에 대해 어떤 이의제기도 하지 못했다.
문광연은 공론화 이후 줄곧 이런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피해자들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재발 방지를 위한 후속대책 또한 끝내 약속하지 않았다. 성평등한 문화와 노동환경은 공공기관 윤리경영의 중요한 척도이자 사회적 책무지만, 문광연은 낙제점을 받고도 반성하지 않는다.
1년여 전인 2020년 7월 30일, 지방노동위원회는 이 사건을 부당해고라고 판단하고 문광연에 한달 뒤인 8월 30일까지 피해자를 원직 복직시키고,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문광연이 한 것은 피해자 복직과 사과가 아니라 중앙노동위로의 항소였다. 그리고 2020년 11년 17일 중노위에서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문광연은 바로 다음날인 11월 18일,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받고 복직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피해자가 이 부당한 '합의'제안을 거부하자, 문광연은 이제 비싼 로펌을 고용해 행정소송을 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의 창달, 문화산업 및 관광 진흥을 위한 연구, 조사, 평가하는 문체부 산하 유일한 연구기관"이라는 문광연이 2021년 정부에게서 직간접적으로 지원받는 돈은 272억 9300만 원에 달한다. 한국 관광문화에 문외한인 필자는 이 많은 세금이 정확하게 어디에 사용되는지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이 돈이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부당해고를 유지하기 위해 비싼 로펌 변호사를 고용하는 단체를 지원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의 확산으로 지난 1년 6개월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특히 문화 예술인들과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관련 산업은 암울하고, 관련 종사자들이 유례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때,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유일한 정책연구기관이라는 문광연이 죄 없는 여성노동자의 부당해고를 유지하면서 국민의 세금을 쓰고 있는 것이다.
부당해고 이후 이미 1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복직에 대한 기대를 안고 노동위원회의 시간을 견뎌냈더니, 이제는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법원의 시간을 견뎌내라고 한다. 사용자가 소송전을 벌이며 해고노동자를 이중삼중의 고통으로 내모는 이 나쁜 갑질을 우리는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 하는가. 공공기관은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권익보호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게 우리 사회의 상식이지만, 문광연은 기어이 악덕기업의 길을 선택했다.
김대관 문광연 원장은 지난 1월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공공기관의 사명은 공공가치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문광연은 정보공개를 통해 공공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번 행정소송 제기로 김대관 원장은 본인의 언급과 정반대로, 공공가치를 훼손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김대관 원장은 본인이 언급한 대로 문광연 내에서 어떠한 논의가 되었으며, 어떠한 돈이 이 부당한 소송전에 사용되고 있는지 정보공개를 통해 명백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부당해고 당시 문광연의 김규원 본부장은 부당해고를 당한 성희롱 피해자에게 "문화 연구판은 좁으니 관계를 잘해야 한다"는 후안무치한 충고를 했다. 지금 그 충고를 돌려주고 싶다. 연구 노동자들과의 제대로 된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바로 문광연이다.
다음은 피해자가 7월 8일 당일 기자회견에서 직접 낭독한 공개서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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