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문이 열리면서 마른 체구에 헬멧을 쓴 아이가 들어왔다. 한눈에도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맞았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 박수빈(가명, 14) 군, 어렸을 때 식도 수술을 한 이후로 먹는 것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는지 유독 마른 아이.
그때 수술 때문인지, 아이의 한쪽 어깨는 약간 구부정했다. 박 군은 출생 때부터 선천적으로 신장이 없었고, 식도가 폐쇄된 채로 태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오른쪽 눈도 발달이 늦어 6살 때까지는 거의 한쪽 눈으로만 생활했다.
내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수빈이는 양손 가득 들고 온 장난감을 책상 위에 펼쳤다. 아이는 하굣길 문구점에 들른 모양이었다. 하교 후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썼던 헬멧은 벗지도 않았다.
장난감에 한창 빠져든 아이의 눈빛, 이대론 내가 말도 못 붙일 듯했다. 서울에서 공수해온 자동차 레고를 건네며 간신히 얘기를 꺼냈다. 성공이다. 수빈은 레고를 무척 좋아했다. ‘기자’라고 소개하자 의외로 반색했다.
상상했던 사춘기 중학생의 모습과는 달랐다. 수빈을 ‘느린 아이’로 소개했던 어머니 김성화(가명) 씨의 말이 떠올랐다. 신나서 레고에 집중한 수빈을 앞에 두고 나는 숨을 골랐다. 이 질문만큼은 꼭 해야 했다. ‘신장이 한 쪽뿐이라 불편한 점은 없니?’
끝내 이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지난 6월 30일, 기자가 충남 태안에서 수빈이를 만났을 때 일이다. 수빈은 레고에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자기 이야기를 했다.
태어나자마자 수술대에 올랐던 수빈은 지금 열네 살이다. 아픔은 흉터로 남았다. 엄마 김 씨는 수빈이 초등학생이 되고서야 아이 등에 남은 흉터를 설명해줬다.
수빈이 태어난 2008년 5월, 첫 모유 수유 때 수빈은 먹었던 모유를 토했다. 급하게 이동한 대학 병원에서 아이가 식도 폐쇄성 기형으로 태어났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곧이어 식도를 연결하는 수술을 했다. 작은 수빈의 몸엔 바늘이 꽂혔다. 수빈은 무엇도 먹지 못한 채 버텼다.
수술 후에도 세 살 때까지 종종 호흡곤란이 왔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숨 쉬지 못하는 수빈을 보고 엄마 김 씨는 처음엔 119 번호도 누르지 못했다. 세 차례 응급실행 후엔 차츰 익숙해졌다.
수빈이 6살 때 김 씨는 다시 가슴 철렁한 순간을 맞았다. 아이는 정면이 아닌 옆 시선으로 TV를 보았다. 엄마는 수빈을 데리고 안과를 찾았다가 의외의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선 “오른쪽 시력이 발달하지 않았다”며 꾸준한 교정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이가 귓속을 간지러워해 이비인후과를 갔을 땐 “달팽이관이 함몰된 것처럼 유착됐다”며 큰 병원을 가야 한다고 했다.
자라면서 하나씩 아픔이 드러나는 수빈이.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 김 씨의 마음도 애탔다.
김 씨 머릿속에 떠올랐던 의문들. 자신에게도, 남편에게도 원인을 찾아봤지만,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막연하게 힘들었던 시간 속 김 씨는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소식을 들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백혈병 등을 앓고, 또 아픈 자녀를 출산하기도 했다는 말에 김 씨는 깨달았다.
김 씨는 삼성반도체 노동자였다. 20살이었던 1995년부터 약 10년간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다. 수빈이를 가졌을 때도 임신 7개월까지는 계속 근무했다.
그는 확산 공정에 배치됐다. 확산공정은 반도체 일부에 전기가 통하게 하려고 불순물을 넣는 과정이다. 주로 웨이퍼(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 묶음인 ‘런 캐리어’를 설비에 넣고 가동이 끝나면 다시 빼내는 일을 했다.
고온인 설비에서는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다가서면 매캐한 가스 냄새도 났다. 가스가 누출됐다며 다 같이 대피하는 일도 몇 번 있었다. 김 씨는 일상적으로 두통을 앓았고, 생리 불순 등 동료 직원들의 건강 문제도 들려왔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반도체 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관리 길잡이’에 따르면 확산 공정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과 부산물은 호흡기 점막이나 피부에 자극을 줄 수 있다. 확산 공정의 총 19종의 유해인자 중 암모니아, 염산을 비롯한 7종의 유해인자가 태아의 발달과정 이상을 초래한다고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특히 공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중 염화수소는 태아의 폐, 신장, 간 발달 장애를 유발할 수 있고, 불소는 태아의 선천성 이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졌다. 안전을 위해선 장비를 식히고 다시 가동해야 했지만, 생산량의 압박으로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바쁘게 ‘런 캐리어’를 들고 계속 움직였다.
설비에서 웨이퍼를 꺼낸 후 불량 웨이퍼는 없는지 확인하는 일도 김 씨 담당이었다. 웨이퍼 계측을 위해 여러 종류의 장비를 사용했는데, 그중 전리방사선이 나오는 특수장비도 있었다.
임신 중 방사선 노출은 유산, 선천성 결손, 발달 장애, 소아암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알려졌다. 방사선을 비롯한 반도체 작업장의 유해물질로부터 김 씨를 보호하는 건 얇은 방진화와 방진복, 면장갑과 일회용 마스크뿐이었다.
김 씨와 같은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 중 수빈이처럼 한쪽 신장 없는 아이를 출산한 사례가 또 있다. 김 씨도 수빈이를 낳기 전 2006년 이미 한 차례 유산 경험이 있다.
수빈이를 뱃속에 품고 일했던 시간 때문에 아프게 된 걸까. 김 씨는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먼저 시민단체 반올림에 전화했다. 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피해에 대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대변하는 시민단체다.
김 씨는 반올림을 통해 반도체 공장에서 노출될 수 있는 유해화학물질들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방사선을 사용하는 설비의 위험도 알게 됐다.
반올림은 김 씨가 ‘삼성지원보상위원회’에 자녀 질환에 대한 지원 보상을 신청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삼성지원보상위원회’는 삼성전자 반도체와 LCD사업장 근무자들의 질병을 보상하기 위해 꾸려진 기구다.
'삼성지원보상위원회'는 부모가 임신 3개월 전부터 출산 사이 시기에 반도체 및 LCD 라인에서 일하다가 아이에게 선천성 기형이나 소아암이 발생할 경우 일정 수준을 보상했다. 김 씨는 2020년 12월 '삼성지원보상위원회'로부터 경제적 보상을 지원받았다. 김 씨와 같이 ‘삼성지원보상위원회’가 자녀 질환에 대해 보상한 사례는 2020년 5월까지 26건이다.
반올림 측은 아예 보상 신청을 하지 않은 이들까지 고려하면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비슷하게 자녀 질환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김 씨는 만났다. 반올림 소개로 참석한 산재 모임에는 자신과 비슷한 엄마,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았다.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도움을 주고 싶었다. 김 씨는 아들 수빈이를 위해,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이들을 위해 싸움을 시작했다.
김 씨를 포함한 삼성 반도체 노동자였던 엄마 3명은 2021년 5월 20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엄마의 직업병으로 선천적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 달라”는 게 요지다.
엄마의 직업병으로 질환이나 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한 산재보험의 필요성이 제기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9년 전인 2012년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자녀에 대한 산업재해를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이들은 행정소송으로 향했고, 기나긴 싸움을 거쳐 2020년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았다. 그 판결이 이번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재 신청에 기반이 됐다. 사건은 이렇다.
제주의료원에서 2009년부터 2010년 사이 근무 중 임신한 간호사 총 15명 중 5명이 유산했다.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낳았다. 단 6명만이 기형 없는 아이를 출산한 셈이다. 간호사들은 자연스레 업무 환경을 의심했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보상을 신청했다.
2년간의 역학조사 결과, 아이의 선천성 질환과 엄마의 업무상 재해와의 연관성이 드러났다. 2012년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연구책임자 백도명) 조사에서 임신한 간호사들이 중증환자에게 줄 약을 직접 빻아 가루로 만들면서 태아의 기형을 일으키는 독성 물질을 마셨을 가능성이 밝혀졌다.
업무상 재해와의 연관성이 밝혀지자 근로복지공단은 유산한 5명의 간호사에 대해서만 보상을 인정했다. 선천성 심장 질환아를 낳은 4명의 엄마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상 재해란 근로자 본인의 재해만을 의미한다’는 이유에서다.
즉, 유산의 경우 근로자인 엄마 본인의 건강 손상으로 본다. 이와 달리 선천성 심장질환은 엄마가 아닌 자녀의 질환으로, 엄마 ‘본인의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아이의 심장질환이 업무와 연관됐다는 역학조사 결과에도 아픈 아이를 돌보며 쏟아야 했던 시간과 비용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는 상황. 4명의 엄마는 행정소송으로 끝까지 싸웠다.
약 6년간의 법적 다툼 끝 대법원은 엄마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의 핵심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엄마 뱃속 태아는 엄마와 한 몸이다. 태아는 엄마의 업무 환경에서의 위험성을 함께 공유한다. 제주의료원의 사례로 보면 엄마가 약을 분쇄하면서 독성 물질을 흡수할 때 태아도 같이 위험을 겪었다.
쟁점은 출산 후 태아가 엄마 뱃속으로부터 나와 스스로 독립된 인격체를 갖게 됐을 때 발생한다. 근로복지공단은 출생 이후 아이가 겪는 질환은 근로자인 어머니 본인의 질환은 아니라며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렇게 반박했다.
태아가 출생으로 엄마 몸에서 분리된다고 해도 이전에 발생한 업무상 재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판결로 선천성 질환아를 출산한 4명의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산재 보상으로 요양 급여를 인정받았다. 여러 산재 보상 급여 중 치료비에 해당하는 요양 급여를 엄마 본인이 받도록 판결했다.
최초로 자녀 질환에 대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판결이지만 엄마들은 마냥 웃지 못했다. 사실상 ‘치료비 정도만’ 받을 수 있게 된 상황으로 실질적인 보상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상 재해가 바꿔 놓은 아이의 일생, 그리고 가족의 일생에 대한 보상으로 요양 급여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돌보는 동안 엄마들은 소득 벌이를 할 수 없었다. 치료비를 넘어서 잠재적인 경제적 손실이 컸다.
치료 이후에도 아이의 삶에 남아 있을 정신적, 신체적 장해로 인한 피해에 대한 보상도 없었다. 미래에 아이가 선천성 질환 탓에 보통 또래들처럼 노동하지 못할 경우는 고려되지 않았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임신 중 업무상 재해로 자녀의 건강이 손상됐을 때에 대해 어떠한 보상 근거가 없다. 대법원 판결은 근거가 부재한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졌고, ‘아이의 치료비를 엄마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한정적인 결론이었다.
결국 엄마의 싸움은 법 개정으로 향했다. 판결의 한계를 메우기 위해서는 ‘태아의 수급권을 인정하는’ 산재법 개정이 필요하다. 법에 ‘부모의 직업환경으로 인한 자녀의 선천적 건강 손상’을 업무상 재해로 명시하고, 그에 따라 요양 급여뿐 아니라 휴업급여, 장해급여까지 인정하는 보상 체계를 마련하는 게 핵심이다.
이현주 우송대 간호학과 교수는 지난 8일 기자를 만나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아이의 미래까지 고려한 실질적인 보상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선 아이가 직접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산재 보험 수급권의 주체를 태아로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2019년 고용노동부의 용역보고서인 '자녀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보험 급여 지급기준에 관한 연구'를 맡았던 총 연구책임자다.
법 개정을 위한 논의가 국회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만 태아 산재 관련 산재법 개정안이 총 5개 발의됐다. 하지만 법안 통과는 기약 없다. 지난 6월 29일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심사하기로 했지만, 잠정 보류됐다. 언제 다시 논의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수빈이는 중학생이 된 현재 이유 모를 두통으로 때때로 응급실을 찾는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두통이지만, 엄마는 가슴이 내려앉는다. 혹시 또 수빈의 선천적인 아픔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 김 씨는 한순간도 안심하지 못한다. 만일 한 쪽뿐인 신장마저 아프게 되면,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지도 모른다.
아이가 아프면서 온 가족의 삶도 바뀌었다. 한적한 환경이면 수빈이가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을까 싶어, 경기도 용인에서 충남 태안으로 이사했다. 부부는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다.
다행히 태안에는 수빈이가 좋아하는 바다도 가깝고, 곤충도 많다. 엄마의 걱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수빈이는 밝게 자라고 있다. 유착된 귀는 아직 정기 관찰이 필요하지만, 교정이 필요했던 오른쪽 눈은 조금씩 회복 중이다.
통 모양 이삭이 '하트 모양'처럼 갈라진 강아지풀을 발견한 수빈은 화분으로 옮겨심었다. 매일같이 물을 주며 키우고 있다. 아이의 선천적 아픔이 사회로부터 외면받는 와중에도 수빈은 자랐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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