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청을 왼쪽에 끼고 인도를 따라 법원으로 걸어오는 두 남자 모습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발걸음이 가볍고, 고개를 젖혀 웃기도 했다.
두 남자 얼굴이 보일 만큼 거리가 좁혀 졌다. 오른쪽에 선 남자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벌어진 입 사이로 앞니가 훤히 보였다. 지금 내가 뭘 본 건가 싶어 물었다.
오른쪽의 남자가 두 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그러니까 보통의(?) 변호사들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자세로 말했다.
왼쪽에 선 의뢰인 정도곤(48년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경 너머 부리부리한 눈에 웃음을 담아 변영철(1962년생) 변호사를 바라봤다. 의뢰인에게 큰 신뢰를 받아서인지 변 변호사는 “봤지?” 하는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변 변호사는 왼손을 여전히 허리춤에 둔 채, 오른손으로 부산지방법원 정문을 짚었다. 몸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의 일상 모습인 듯한, 일명 ‘짝다리 자세’가 완성됐다. 법원 정문 안쪽 경비 직원은 뭔가 우려가 되는지 우리를 주시했다. 변 변호사가 유심히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 변호사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한 문장 완성할 때마다 접속사처럼 넣는 욕설, 짝다리 자세와 허리춤에 얹은 손이 자연스러운 변영철 변호사와 나는 이렇게 처음 대면했다. 6월 8일 오후 5시,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말이다.
불쾌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그니처 포즈’인 듯한 짝다리와 거친 말투가, 그가 지금 추진하는 일과 딱 맞아 떨어지는 듯해 묘한 신뢰감마저 들었다. 태도-말투-일의 삼위일체가 주는 어떤 안정감 같은 것 말이다.
재판거래 피해자 정도곤, 변호사 변영철. 두 사람은 지금 '어려운 싸움', '승산 낮은 대결'을 하고 있다. 좋게 말하면 도전, 진부하게 표현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정도 되겠다. 그게 뭐냐고?
엉터리 판결을 한 법관에게 책임을 따져 묻는 것. 두 사람은 전직 판사 그것도 대법관을 지낸 김용덕에게 2억 원을 물어내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대법관 시절의 부당한 판결을 책임지라는 것이다.
변영철 변호사가 목소리 높이는 이유가 있다. 그의 의뢰인 정도곤은 법적으로는 물론이고 상식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판결문을 대법원으로부터 받았다.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마저 "참 난감한 일"이라고 혀를 찬 황당한 판결.
그 판결에 김용덕 전 대법관이 깊이 관계돼 있다. 시민 정도곤이 감히(?) 전직 대법관에게 소송을 건 이유, 내막은 이렇다.
정도곤의 아버지 정재식(1924년생)은 1944년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일본 오키나와에 갔다. 해방 이후인 1946년, 경북 칠곡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1948년, 아내 이외식과 사이에서 둘째 아들 정도곤을 낳았다.
'대구 10월사건' 여파가 아직 남아 있던 1949년 5월, 칠곡경찰서는 정재식을 강제 연행했다. 며칠 뒤, 경찰은 재판도 없이 칠곡의 한 계곡에서 정재식을 총살했다.
정도곤 나이 11살 때, 그의 엄마 이외식이 재가해 고향 칠곡을 떠났다. 정도곤은 부모 없이 혼자 살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대구10월사건'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과거사위가 낸 보고서에는 정도곤의 아버지 이름이 나온다.
정도곤은 2011년 4월 7일 부산지방법원에 국가손해배상소송을 청구했다. 그는 오래전 헤어진 어머니를 수소문했다. 남편 사망으로 어머니 삶도 무너졌으니, 역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하라고, 어머니에게 제안했다.
어머니 이외식은 아들 정도곤 뜻을 따랐다. 이외식은 2012년 5월 24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아들 정도곤이 2011년 4월 7일에 소송을 청구했으니, 어머니는 그보다 약 1년 늦게 소장을 법원에 냈다.
이 사건에서 날짜는 중요하다. 두 모자가 각각 소송을 청구한 연도를 잘 기억하면 좋겠다.
두 사람이 국가손해배상을 청구한 이유는 같다. 아들에겐 아버지, 아내에겐 남편이었던 정재식을 경찰이 이유 없이 죽였고, 그 탓에 모자는 물질적-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소송이어서 이외식-정도곤 모자의 재판을 부산지법의 동일한 재판부인 민8민사부(재판장 심형섭) 맡았다.
피고 대한민국은 “정재식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1949년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이외식-정도곤의 손해배상 청구 권리는 사라졌다”는 취지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이런 국가의 주장을 배척했다. 재판부는 2013년 1월 16일 “국가는 정재식의 아내 이외식에게 약 3억3000만 원, 아들 정도곤에게 약 2억6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피고 대한민국은 항소했다.
배상금액을 대폭 삭감했지만, 부산고법 제6민사부(재판장 신광렬) 역시 “국가는 이외식에게 약 8800만 원, 정도곤에게는 약 5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2014년 1월 9일 판결했다. 이외식-정도곤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2014년 5월 16일, 대법원 제2부(주심 김소영)는 이외식의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법적으로,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은 1년 5개월 뒤인 2015년 10월 29일 아들 정도곤 판결에서 벌어졌다. 대법원 제3부(주심 김용덕)는 ‘국가는 정도곤에게 단 한 푼의 배상금을 줄 이유가 없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재판부가 내세운 판결의 근거 중 하나가 "손해배상금을 청구할 권리의 시효는 이미 오래 전에 완성됐다"는 것이다. 대법원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진 논리다.
앞서 말한 대로, 어머니 이외식은 아들보다 약 1년 늦게 손해배상금을 청구했다. 대법원은 이외식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런데 이외식보다 1년 앞서 손해배상을 청구한 아들 정도곤에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며 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도곤은 대법원의 엉터리 판결로 물적-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2018년 6월 7일 국가와 김용덕 전 대법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가 판결에 참여한 대법관 중 유독 김용덕을 지목한 이유가 있다. 그의 소장에는 이렇게 나온다.
대법원 소부는 만장일치 판결을 원칙으로 한다. 결국 김용덕 대법관은 같은 사건을 두고 1년 만에 다른 의견을 낸 셈이다. 대법관도 인간이니, 김용덕은 실수한 게 아닐까?
변영철 변호사는 손사래를 쳤다. 소송 당사자들이 법원 판결을 존중하고 승복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와 이유가 있어야 한다. 변영철 변호사는 "해당 판결에는 그럴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대법관 김용덕은 도대체 왜 모순된 판결을 했을까. 정도곤은 민사소송을 통해서라도 그의 주장을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송 자체가 쉽지 않았다. 소송 상대방 주소를 알아야 소장을 송달하고, 그래야만 재판이 진행되는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김용덕은 주소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자택이나 사무실이 아닌 지인 주소로 소장을 송달하게 했다. 당연히 재판은 지연됐다.
정도곤은 불량 판결로 피해를 입은 시민으로서, 대법관의 항변이라도 들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기대마저 빗나갔다.
김용덕은 김도곤의 주장에 대한 답변서를 2019년 11월 18일 재판부에 냈다. A4 한 장에 턱없이 부족한 분량으로 전체 네 문장, 여덟 줄이 답변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원고의 청구는 이유가 없으니, 기각해 달라”는 내용을 빼면 더 쪼그라든다.
엉터리 판결에 이어 성의 없는 답변서를 받은 정도곤은 분노했다. 김 전 대법관이 자기에게 제기된 민사소송을 이토록 쉽게(?) 대처하는 건, 고의 또는 과실로 문제 많은 판결을 해도 법관이 책임을 진 사례가 대한민국에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심각한 오판으로 개인의 삶을 망가뜨린 법관이 민사-형사상 책임을 진 사례를 본 적 있는가? 쉽게 떠오르지 않을 거다.
멀게는 사법살인을 당한 인혁당 피해자, 가깝게는 화성연쇄살인 8차사건 누명 피해자 윤성여 씨까지, 법관의 오판으로 삶이 무너진 사람은 많으나 민형사상 책임을 진 판사는 거의 전무하다. 변영철 변호사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자.
그동안 이런 문제제기는 종종 나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시민이 법관에게 책임 묻는 걸 극히 제한하는 판례를 남겼다. 이런 논리다.
길고 장황하지만, 한마디로 '법관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기들에게만 특별한 방어막을 설치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운 대목이다. 위 내용은 그동안 법관에게 제기된 민사소송 판결문에 숱에게 '복사해서 붙이기'로 이용되기도 했다.
정도곤과 변영철 변호사는 '법관에게만 설치된 예외의 방어막'을 걷어내려고 한다. 무모한 도전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은 관행과 전통을 따르길 거부하는 이단아들의 도전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했다. 어제의 소수의견이 오늘 다수의견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측면에서 두 사람은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제103조의 의미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법관의 판결에 정당한 문제제기와 감시가 이어질수록 설득력 있는 판결이 늘 테니 말이다.
정도곤과 변영철 변호사를 부산에서 만난 지 이틀 뒤인 6월 10일, 서울중앙지법 제33민사부(재판장 정철민)은 해당 사건에 대한 선고를 했다. 예상된 결과가 나왔다. 재판부는 ‘김용덕 전 대법관은 판결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취지로 정도곤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역시나, 해당 판결문에는 아주 오래된 '예외의 방어막'이 또 복사해서 붙이기 되어 있었다.
판결문 읽기를 멈추고 변영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소감을 물었다. 전화기 저편, 부산에서 그는 한마디를 하고 껄껄 웃었다.
전화를 끊고 사자성어 '교언영색'을 검색했다. 이렇게 나왔다.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다.
거침없는 말을 들으니, 다시 그의 짝다리 자세가 떠올랐다. 정도곤은 곧바로 항소했다. 패배가 쉽게 보이는 싸움, 전직 대법관과의 대결을 다시 시작했다.
2012년 1월부터 2018년 1월까지 대법관을 지낸 김용덕은 최근 김앤장 소속 변호사가 됐다. 그는 김앤장에서 기업법연구소장을 맡았다.
*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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