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 청년으로 살아가기가 가장 좋았던 시절은 아마도 1998년 IMF 경제위기 훨씬 전에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봉급을 아끼고 줄이고 아껴서 모은 돈으로 집 장만했던 그 시절, 또는 개천에서 용이 가끔 난다고 하던 그때 그 시절 그 젊은이들이 아니었나 싶다. 아마도 소위 386세대 또는 72년 이전 생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들은 지성인이라는 대학생의 특권과 그 낭만에 흠뻑 젖어 마치 자유인처럼 개똥철학이라도 읊으면서 그 시대와 나라를 고민하던 그 청년들이 21세기 오늘 그들이 새삼 그리워지고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한없이 미안하기만 하다. 여기에 농촌활동, 공장 활동 등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도 하고 그렇게 살았던 기억이 아득하다. 그 세대들이 지금은 50대에서 60대이고, 그들의 자식 세대가 개천의 용은커녕 이무기도 되기가 어려운 시대를 힘겨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그들의 자녀들’ 작금의 청년들이 아닌가 싶다.
이들을 일컬어 온갖 슬픈 이름을 갖다 이어 붙인 슬프고 아련한 신조어와 언어가 계속 난무하고 생산-재생산되는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작금의 형세요 세태다. 좀처럼 개선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것 또한 작금의 현실이다. 우석훈 박사가 만든 신조어 ‘88만 원 세대'로 불리었던 2007년 당시 때만 해도 그냥 지나가는 유행어일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 신조어가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되어버렸다. ‘88만 원 세대’가 다시 ‘N포세대’로 이어 ‘해방 이후 부모보다 가난한 2030 세대’ 그리고 ‘MZ 세대’ 등 다양한 신조어의 진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청년들에게 당면한 것은 치솟는 물가, 대학 등록금, 취업난, 집값 등 경제적,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스스로 돌볼 여유도 없다는 이유로,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기약 없이 미루고 있다.
이 같은 청년 문제의 핵심은 분배구조에서 엿볼 수 있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전체 몫이 줄어들거나, 청년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같더라도 고액 연봉자가 그 열매를 독식하면 청년세대의 소득이 부모세대보다 낮아질 수밖에 없다. 청년이 겪는 일자리 문제는 비단 실업뿐만이 아니다. 취업한 청년들 역시 비정규직,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우석훈 박사가 쓴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는 책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통계청 경제활동 인구조사에 따르면 청년층 고용률은 2018년 42.7%에서 2019년 43.5%로 0.8%P 오르는 데 그쳤다. 인구가 8만8,000명 감소한 가운데 취업자가 4만1,000명 늘어난 결과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상승률이 비정규직 비율에 한참 못 미친다. 늘어난 취업자의 상당수가 편의점 형태의 아르바이트 등 비정규직으로 전락 되었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청년들의 아르바이트 일자리는 비정규직 일자리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아르바이트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들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인식하기보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다른 범주에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가 끊긴 20대와 공공근로노인과 일자리 경쟁이 볼쌍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2021년 2월 10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청년실업률은 9.5%로 2019년보다 1.8% 늘었다. 또한, 2019년 말에 발표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 비교를 통해 본 서울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서울 청년들의 평균 첫 직장 급여는 169만 7천 원에 불과했다. 이것은 장시간 노동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뜻 한다.
청년들에게 맞대면하고 있는 일자리 문제는 청년 개인이 주체적으로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개인 문제가 절대 아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당면한 사회문제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구조적 문제다. 여기에, 질 낮은 일자리만 난무하는 상징적 유효성이 상실된 텅 빈 역대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난무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되었다.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공존적 삶의 해체를 정면으로 극복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문제의 해법만이 한국 사회가 대면하고 있는 청년 문제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설계하고 계획하며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기본소득을 핵심으로 기본대출, 기본주택을 아우르는 기본정책이다.
기본은 뿌리이고 근본이자 토대이다. 기본소득은 한낱 소득의 밑거름일 뿐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에게 정기적으로 무조건 현금을 제공하는 최소생계비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마땅히 받아야 할 경제적 기본권이고, 인간 살림살이의 마중물이다. 기본소득은 사실 공적 이전소득(정부로부터 현금급여)을 늘려 자산소득 격차를 완화하고 가계부채를 줄이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2022년 하반기부터 단기단계가 시행될 경우, 연 50만 원이라 할 때 4인 가구일 경우 200만 원이 된다. 비록 적은 액수(부분 기본소득)지만 누군가는 이 돈이 없으면 대출을 하게 되고 이것이 가계부채가 되고 켜켜히 쌓아지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늠해봄 직하다. 경제적 위험은 누구에게나 생애주기별로 마치 전쟁의 신 ‘인드라’처럼, 무리를 이끌고 홀연히, 번개처럼 외부에서 출현한다. 경제적 위험의 강도와 크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일평생 꽃길만 걸은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기껏해야 한 줌의 흙 정도밖에 되지 않겠나 싶다. 대한민국은 2015년 9위였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20년 7위로 올라섰다. 한국보다 가계부채 비율이 높은 나라는 스위스(131%), 호주(122.6%), 노르웨이(112.8%), 덴마크(112.3%), 캐나다(110.4%), 네덜란드(104%) 등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들 국가의 상황과 매우 크게 다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70% 수준에 불과한 데다 복지·고용 안전망도 상대적으로 부실하다. 부채 위기가 터졌을 때 닥칠 경제적 위험이 이들 국가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기본주택은 집을 사지 않고도 충분히 품질 좋은 중산층용 장기 공공임대 아파트를 공급받아 주택대출금 부담을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 기본주택은 무주택자라면 누구나 적정 수준의 임대료를 내면서 평생 거주할 수 있는 장기 공공임대주택이다. 수돗물을 공급하는 것처럼 무주택자 모두에게 안정된 주거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보편적 주거 서비스라는 새로운 주거의 거대한 전환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주택은 자연스럽게 기본대출로 연결된다. 기본대출은 초금리성 악성 가계부채를 연 1-2%의 건전 장기채무로 바꿔주는 것이다. 현 상황을 "대한민국은 세계 최저 국채비율 자랑하며 가계이전소득에 인색한 결과 가계부채율은 세계 최고로 높다. 가계부채가 많은 데 더하여 부채 상당 부분이 24%에 이르는 살인적 고금리 채무로 악성이다"라며 "대출을 받아 폭등한 고가의 집을 산 후 평생 대출금에 시달리고, 높은 가계부채 이자 갚느라고 소비를 못해 수요부족으로 경제가 죽어간다"라고 주장한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2016년 1월에 실시한 성남시 청년 배당으로 기본소득정책을 먼저 선점하였고, 경기도 재난 기본소득과 범주별 기본소득(청년 기본소득, 농민 기본소득 등)을 제한된 예산 범위에서 선제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이 지사는 그렇게 진단했고, 그의 진단은 옳았다.
이같이 기본소득을 포함한 일련의 기본정책은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삼는 세련된 복지정책이나 경제정책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자기 발로 독립적으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하는 사회경제적 발판이자, 모두에게 민주적으로 실질적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는 튼튼한 사회정책이다. 이렇게 일련의 기본정책이 제도화되면, 꿈을 먹는 젊은이들이 최소한 그 부모세대들이 그나마 누렸던 그 꿈과 상상력, 잠재적 생성, 가능성만큼은 매장되지는 않을까 싶다.
김상돈 고려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는 기본소득 국민운동 경기본부 상임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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