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로 작성된 미국 기밀문서 21건이 추가로 공개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12.12 사태 직후 미국에 정치적 야심이 없다고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6일 외교부는 "지난 6월 29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양자 정책대화 계기에 미국 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운동 관련 비밀해제된 미측 문서 사본 21건을 전달 받았다"며 마크 내퍼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고윤주 외교부 북미국장에게 해당 문서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문서에 따르면 12.12 사태 직후인 지난 1979년 12월 15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 대사와 면담에서 자신은 정치적 야심이 없으며, 최규하 대통령의 정치발전 계획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2.12사태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과정에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조사 필요성이 요청되어 동인의 체포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군사쿠데타가 아니다"라며 "군부대 동원은 적법한 명령에 대한 정 총장측의 저항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정총장을 체포하려 했으나 대통령이 거절하여 승인 없이 체포했다"고 미국 측에 설명했다.
해당 문서에는 1980년 5.18을 전후로 한국 상황에 대한 당시 정부 인사들의 발언 및 미측의 평가도 나와 있다. 1980년 5월 19일 박동진 외무부장관은 글라이스틴 주미 대사와 면담에서 "학생들의 과격함이 군부의 관용을 넘어서는 정도까지 극에 달하였으나, 그럼에도 최규하 정부는 정치발전 일정을 차질없이 진행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글라이스틴 대사는 군부가 국민들이 유신체제로의 복귀를 원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판이라는 의중을 전달"했으며 박동진 장관 역시 동의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문서에 명시됐다.
같은해 5월 22일 주한 미국 대사관은 "계엄군과 시민 간의 협상이 진행 중이며 시민대표 중에는 김대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사들도 있다.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석방은 협상 쟁점이 아님을 밝혔다"며 당시 한국 상황을 본국에 전하기도 했다.
5월 2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최초 면담을 가졌는데, 문서에는 당시 박충훈 서리는 "정부의 광주에 대한 회유책이 결실을 맺고 있다면서 광주상황이 많이 호전되었다고 설명했다"고 기록돼있다.
문서에는 "이에 대해 글라이스틴 대사는 총리 설명과는 달리, 총리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 시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주 외곽에 머물면서 발표문을 녹음해서 방송했다고 설명했다"며 "글라이스틴 대사는 총리로 하여금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신군부 세력에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다만, 총리가 그럴만한 역량을 가진 인물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최광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광주 진압을 하루 앞둔 5월 26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면담에서 "계엄사령부는 광주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진압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으며, 모든 작전은 소준열의 결정과 지휘 아래 시작된다"고 밝혔다.
이같은 내용들이 담긴 문서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이날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인계 후 기록관 웹사이트에 공개된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5월 5.18 40주년을 계기로 미측 문서 43건 비밀을 해제했으며 올해 5월 말에도 14건을 전달받은 바 있다. 이번에 추가적으로 21 건을 전달받은 것에 대해 외교부는 "인권, 민주주의 등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동맹의 정신을 바탕으로 추가적인 비밀해제를 위해 협력해 준 데 대해 평가하며, 앞으로도 5.18 민주화운동 관련 미측 문서의 추가적인 비밀해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측과 계속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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