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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중매체 <빈과일보> 강제 폐간, 어떻게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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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중매체 <빈과일보> 강제 폐간, 어떻게 봐야 하나?

[좋은나라이슈페이퍼] 공권력의 힘으로 언론사 폐간, 정당화 될 수 없다

2021년 6월 24일 홍콩을 대표하는 반중언론 <빈과일보>(蘋果日報, Apple Daily)가 창간 26년 4일 만에 폐간됐다. 이에 앞서 2020년 8월 10일 사주인 지미라이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현재 14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2021년 6월 17일에는 국가보안처 직원이 빈과일보 본사와 관계자들의 집을 급습, 편집장 등 5명을 체포됐다. 홍콩식 언론 개혁의 신호탄이라고 할 이 조치로 인해 빈과일보는 5월 17일 타이완판 종이 신문의 발행을 중단하고, 6월 21일 온라인 뉴스 채널 업로드 중단, 22일에는 영어판 발행 중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6월 24일 종이판 신문의 마지막 지령을 발행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망명자 지미 라이

빈과일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빈과일보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사주 지미 라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미라이는 1948년생으로 올해 73세다. 광둥어 이름은 라이찌잉 黎智英, 중국 표준어로는 리찌잉, 우리식으로 독음하면 여지영이라고 읽는다. 홍콩에서 직선거리로 약 50㎞밖에 안 떨어진 광저우시 쑨더구에서 태어났다. 1949년 10월 14일 광저우가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점령되니 지미 라이는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태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바뀌는 경험을 한 셈이다. 지금이야 광저우시 일대가 홍콩에 버금가는 현대풍의 도시지만, 지미 라이가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때만 해도 광저우시 쑨더구 일대는 산업기반이랄게 없는 농업지대에 불과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중국 공산당의 경제 계획은 자급할 수 있는 중국의 건설이었다. 당시는 타이완에 있던 중화민국이 중국을 대표했었고, 국제적으로 대륙의 지배자인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로 인정받기보다는 무장단체 취급을 받던 시절이다.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권 국가 간의 구상무역을 제외하면 대외 교역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미 라이가 태어난 광저우는 명‧청 제국 시절,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해 항구를 개방하기 전까지 중국의 유일한 대외 무역‧교섭 창구였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초기의 경제 정책 기조로 인해 광저우 일대가 가지는 대외무역의 전통은 꽤 오랜 기간 사라졌고, 상업으로 수백 년간 먹고 살던 동네는 중국의 여느 지역과 다를 바 없는 자급적인 공업과 농업지대로 전락해야 했다.

대대로 장사를 하던 지미 라이의 집안은 사회주의하에서 일단 부르주아 출신라는 딱지가 붙었다. 토지개혁 초기, 없는 자본가도 할당량에 따라 만들어야 했던 시대에 원조 자본가 집안이라는 낙인은 꽤 컸고, 이를 견디다 못한 지미 라이의 아버지는 혈혈단신으로 중국을 탈출, 홍콩으로 건너가 버린다. 남은 가족의 삶은 더 고달파졌다. 어머니는 이 일로 노동교화소로 끌려갔고, 지미 라이는 빈집에서 홀로 쌍둥이 여동생과 지적장애가 있는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지미 라이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10살이 되던 해부터 종일 광저우역에서 죽치고 있다가 기차가 도착하면 짐을 든 승객의 짐을 들어주고 약간의 수고료를 받아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공식적인 짐꾼이 아니었으니 짐만 옮기게 하고는 돈도 안주고 가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던 시절. 그는 12살이 되던 해 운명 같은 사건을 맞이한다. 광저우를 방문한 한 홍콩인이 짐을 들어주자 돈 대신 초콜릿을 줬는데, 이 초콜릿이 그의 중국 탈출 동기가 됐다.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구나. 홍콩에는 이렇게 달콤한 먹거리가 있으니, 아마 그곳은 천국일 거야.' 열 두 살짜리의 사고는 이렇게 허술하게 전개됐고, 실천력 있는 소년은 어느 그믐밤 늪에 가까운 진창을 걸어 광저우시 쑨더구에서 육로로 연결되는 또 다른 식민지 마카오로 건너간다. 그리고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가는 배를 물색해 배 밑바닥에 숨어 홍콩으로 밀항한다. 그는 수중에 HK$1 한 장만 가지고 12살의 나이로 홍콩에 입성했다.

홍콩의 소년 노동자

그가 찾은 1960년의 홍콩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천국은 아니었다. 당시 홍콩은 막 이차 산업 기지로서 발돋움하던 시절이어서 형편없는 노동 조건과 엄청난 근무시간이 기다리고 있었고 지미 라이처럼 광둥성으로부터 밀항하는, 아니 심지어 수킬로의 거리를 헤엄쳐서 넘어온 중국 난민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참고로 당시 홍콩-중국 접경은 도망자들이 중국 공안에게 발각되면 사격이 이루어져 사살됐지만, 일단 홍콩 영내로 들어와 홍콩 경찰에 연행되면 중국 송환은 일절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였다.

12살의 그는 현재 홍함에 있는 가발공장에 취업한다. 요즘 기준으로야 아동노동이지만 이때는 1960년이었고, 일하지 못하면 굶어야 하는 시대. 그의 첫 월급은 HK$3였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사업 감각이 있던 그는 스무살 때 가발 공장 총지배인으로 고속 승진하고, 당시 불타오르던 홍콩 주식시장에 성공적으로 투자, 그 자금을 바탕으로 파산 직전인 스웨터 생산 업체 코미텍스를 헐값에 인수한다. 이때가 그의 나이 27세. 홍콩으로 밀항한 지 15년 만이다.

당시 홍콩에서 만든 값싼 의류는 미국과 유럽 시장으로 수출되고 있었고, 그는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독학으로 영어를 배워 급기야 뉴욕의 수출업체를 만나기 위해 혈혈단신 출장길에 오른다. 광저우의 시골에서 태어나 발전기의 홍콩에서 이십대를 보낸 그에게 뉴욕은 신세계였다. 그는 뉴욕에서 피자라는 음식을 처음 먹는데, 그 피자집의 상호(피자집에서 사용하던 냅킨 브랜드라는 설도 있다)인 지오다노라는 말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입에 착 감기는 이탈리아어를 보면서 그는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한 스웨터에 지오다노라는 브랜드를 붙이면 미국 사람들이 이탈리아 브랜드로 착각할 테고, 그게 영업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다. 초콜릿에 이끌려 밀항길에 오른 그는 이번에는 피자집 상호에서 그가 만들 의류 브랜드의 이름을 상상해 냈다. 1981년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의류 브랜드 지오다노가 이렇게 생겨났고, 창업 10년 후인 1991년에는 지오다노를 홍콩 증시에 상장시킨다. 지미라이는 돈방석에 앉았다.

천안문 학살

지미라이는 자신이 어느 정도 성공한 이후 광저우에서 사는 가족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일본에 친척이 있는 집에 가면 온갖 일본산 가전제품이 가득했던 한국처럼 지미라이의 가족들도 홍콩산, 혹은 수입산 가전제품 선물을 받았고, 그건 아마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중국의 작은 동네에서는 꽤 부러운 일이었다. 그가 본격적인 반중의 길을 가기 전까지 고향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지미 라이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했다. 참고로 요즘 홍콩에서는 천막용 비닐로 만든 허름한 장바구니가 레트로 열풍을 타고 재조명되는 중인데, 이 레트로 장바구니의 주 소비층이 노년층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현재 노년층에게 비닐은 문명의 상징이었고, 닳지 않는 두꺼운 비닐 장바구니는 집안의 누군가가 홍콩에 있다는 연줄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홍콩, 그리고 홍콩산 물건은 그런 존재였다.

아무튼, 이 말은 반대로 지미라이 자신은 비록 홍콩으로 도망쳐왔지만, 그의 고향은 중국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대부분의 홍콩 노년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 실향민 정서가 그에게도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1989년 천안문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는 지미 라이를 포함한 모든 실향민 정서를 공유하는 홍콩인들에게 마음 편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끈이었다. 이미 몇 년 전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시작된 개혁개방으로 인해 홍콩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선전과 주하이가 변하고 있었고, 많은 홍콩의 기업가들은 생산 거점을 중국으로 옮기고 있었다. 분명 당시 중국은 변하고 있었다. 당시엔 누구나 경제 개방과 성장, 그리고 중산층이 성장하면 약간의 산통을 거친 후 민주화로 나아가는 것이 사회 발전의 공식이라 생각했고, 그들은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시위를 그 산통의 과정이라 여겼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천안문의 민주화 시위는 학살로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이 홍콩에 끼친 충격을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홍콩 사회는 중국의 어느 지역보다 더 강하게 베이징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몇 년 후 중국에 반환돼야 할 운명이었기에 베이징과 홍콩은 적어도 당시엔 운명 공동체였다. 학살의 충격은 1989년 6월 5일 항생지수를 22%나 끌어내렸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당장 중국에 편입되는 것도 아니건만 슈퍼마켓의 물건은 모두 동이 났다.

그간 중국에 기대를 걸고 중국을 조국이라 생각하던, 그래서 영국과 대립각을 세웠던 당시 홍콩의 운동진영은 양분됐다. 그래도 같은 민족에게 희망을 걸자는 사람이 지금의 친중파가 되었고, 동족을 학살하는 야만인들에게 기대할 건 없다, 중국에 반환돼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지금의 홍콩 민주당의 구성원이 되었다. 거대한 실향민 집단은 이렇게 다시 한 번 갈라진 채 지금까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 홍콩의 대표적 반중 매체 <빈과일보>의 폐간 전 '마지막 신문'을 사려는 시민들이 시내 가판대 앞에 길게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한 여성이 폐간호 1면을 들어 보이고 있다. ⓒ홍콩=AP연합뉴스

<빈과일보>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한때 포브스의 아시아 부호 순위에도 이름을 올리던 전성기의 지미라이는 이듬해인 1990년 자신의 사재를 털어 '넥스트 디지털'(壹傳媒有限公司)이라는 언론사를 만들었다. 넥스트 디지털의 첫 번째 매체인 넥스트 매거진은 '방송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진실을 추구하라'는 목표를 내세웠다. 한때 16만 부까지 발행한 이 주간지는 반중 성향의 정치 기사가 포함된 파파라치 잡지에 가까웠다. 천안문 학살 직후였으니 반중 기사는 인기 있었고 연예인 뒤꽁무니 추적 기사가 넘치니 대중들은 좋아했다. 지미라이는 잡지의 발행인이자 칼럼니스트로 활약했다. 1993년 지미 라이는 천안문 학살 4주년을 즈음해 당시 중국의 수상이던 리펑을 도살자로 표현하는 격렬한 칼럼을 게재한다. 이 칼럼은 중국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고 급기야 그의 의류업체인 지오다노 매장이 소방법 위반 등의 모호한 이유로 집단 폐쇄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래도 저 시절에는 앞장서서 불매를 주장하는 애국적 네티즌은 없었다. 참고로 당시 지오다노는 전 세계에 191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중 중국 매장의 숫자가 160개에 달했다. 즉 사실상 중국인의 소비로 먹고사는 기업이었다.

사업가와 반중 매체 발행인을 병행할 수 없음을 깨달은 지미 라이는 지오다노의 모든 지분을 매각하고 USA Today를 롤모델로 한 타블로이드 일간지 <빈과일보>(蘋果日報)를 1995년 창간하며 본격적인 언론사 사주의 길로 들어선다. 빈과는 사과를 뜻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과는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와가 한입 베어 물어 신의 권위에 도전한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지금에 와서는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역동성을 뜻한다. <빈과일보>는 현시점 홍콩에서 도전해야 할 권위는 중국 공산당이라 여겼고, 지미 라이 개인에게 천안문 학살의 기억은 일종의 선악과였다. 2021년 7월의 관점에서 보면 <빈과일보>는 정부의 압력에 의해 부당하게 폐간당한 민주주의 수호 신문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사실 <빈과일보>는 창간 당시부터 폐간이 된 지금까지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킨 매체였다.

<빈과일보>는 창간 당시, 홍콩의 타블로이드판 신문치고는 드물게 전면 칼라 인쇄를 지향했는데, 그런데도 기존 홍콩 타블로이드판 신문의 1/3에 가까운 파격적인 가격 정책을 실시해 경쟁 매체들을 고사시켰다. 부호였던 지미 라이의 자금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가격 정책이었고, 이는 시장을 교란하는 전략이었다. 매체 성격 또한 정치적으로는 반중 기조가 확연했지만, 8면에 달하는 연예면에는 매매춘 업소에 대한 리뷰가 등장하는 등 한국에서는 19금 딱지가 붙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내용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2012년에는 중국의 여배우 장쯔이가 충칭의 실력자 보시라이에게 거액을 받고 매매춘을 했다는 오보를 냈고 이로 인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식의 오보 사건이 매년 터졌다. 한국의 어떤 매체도 따라 하지 못한 파파라치 황색 저널리즘은 <빈과일보>의 또 다른 얼굴이다.

물론 이 도발적인 타블로이드 일간지에 홍콩 사회가 열광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미디어도 가보지 못한 온갖 논쟁의 중심에 선 이 신문에 대해서 지식인 사회의 시선 또한 곱지 않았다. <빈과일보>의 대성공으로 인해 홍콩의 모든 미디어에 노란색을 끼얹었다는 비판이 항상 따라붙었다. 지금이야 그런 의혹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2014년 우산 혁명 전까지만 해도 <빈과일보>의 반중 노선 또한 그저 대중의 기호에 밀착한 마케팅일 뿐이라는 혹평이 따라붙기도 했다.

본격적인 탄압

2020년 7월 1일 홍콩 국가보안법이 통과되고, 홍콩 정부가 2019년부터 벌어진 모든 사태를 언론의 가짜뉴스로 탓으로 규정하면서 오늘의 <빈과일보> 사태는 예정됐다. 2020년 8월 지미 라이는 홍콩 국가보안법상 외세와의 공모 혐의로 체포, 기소됐다. 소장에는 지미 라이의 다양한 범죄들이 명시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트윗 내용을 리트윗한 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넥스트 디지털 본사도 같은 날 200여 명의 국가보안처 요원들에 의해 9시간에 걸쳐 박스 25개 분량의 자료를 압수당했다. 홍콩에서 가장 큰 언론사에 대한 유례가 없는 압수수색은 당연히 전 세계 미디어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날 홍콩 경찰은 주요 외신, 즉 AP, 로이터, AFP를 비롯해 홍콩의 공영 언론사인 RTHK까지 배제한 채 언론 브리핑을 강행했다.

8월 11일 <빈과일보>는 사주인 지미 라이의 체포 사진을 헤드라인에 걸었고, 평소보다 5배나 많은 50만 부를 인쇄했다. 홍콩 시민들은 새벽부터 넥스트 디지털 본사 앞에서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날 찍은 50만 부의 <빈과일보>는 오전 중에 완판됐다. 심지어 한 개인이 빈 트렁크를 들고 와 100부씩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날은 넥스트 디지털 주식 구매 운동도 벌어지며 8월 초 한 주에 HK$0.08에 불과하던 넥스트 디지털 주가는 8월 11일 HK$1.96까지 치솟았고 지미 라이의 아들이 운영하는 식당에도 긴 줄이 늘어섰다.

지미 라이 그리고 <빈과일보>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 서방은 꽤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의 대변인, 미셸 바첼레드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홍콩 외신기자 클럽, 휴먼 라이트 워치가 각각 입장을 발표했고 홍콩 당국도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듯 지미 라이를 하루 만에 석방했다. 하지만 중국 국유기업이 홍콩에서 운영 중인 편의점 매대에서는 <빈과일보>가 사라졌고, 주가 폭등과 관련해서는 불법 자금을 활용한 사기와 자금 세탁 혐의가 적용되어 15명이 체포됐다. 참고로 주식 폭등과 관련해 증권 당국이 아닌 경찰이 직접 수사에 돌입하는 건 홍콩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전방위적 압박은 2021년 들어와 더욱더 격화됐다. 급기야 4월에는 자금난 때문에 타이완에서 발행하는 <빈과일보>를 매각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부터 주요 언론은 <빈과일보>가 홍콩 반환일이자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7월 1일을 전후해 폐간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을 내놨다. <빈과일보>도 지금까지 굳이 '우한 폐렴'이라고 쓰던 자사의 코로나19 표기를 다른 언론처럼 코로나19로 표기하는 등 약간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2021년 5월 홍콩 법원은 730억에 달하는 지미라이의 금융 자산을 동결함과 동시(지미라이는 넥스트 디지털 주식의 71%를 소유하고 있다)에 홍콩 증권거래소 또한 넥스트 디지털의 주식거래를 중단시켰다. 이제 <빈과일보>는 가지고 있는 현금 자산만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거의 모든 기업 광고가 빠진 상태에서 폐간 시점이 언제냐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6월 17일 국가안보처가 다시 한 번 <빈과일보>에 대한 대규모 압수수색을 실시, 편집장과 부사장을 비롯한 회사 고위 관계자 5명을 연행하기에 이른다. 경찰이 밝힌 <빈과일보>의 주요 혐의는 외국에 홍콩과 중국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는 기사 30여 건을 게재했는데, 이는 홍콩 국가보안법상 외세 결탁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고 연행된 회사 관계자도 같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신문 기사에 대해서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홍콩 국가보안법 29조는 외세와의 결탁죄에 대해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중대한 범죄의 경우 10년 이상 무기징역을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제정이후 정치투쟁이 거의 불가능해진 홍콩의 시민사회는 그동안 시민사회에 온정적인 식당이나 상점, 택시를 이용하자는 황색 경제권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일종의 자급 경제를 꾸려서 장기전에 대비하자는 의도였다. 위축될 대로 위축한 현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대응은 그저 <빈과일보> 구매운동에 그쳤다. 하지만 광고가 없는 상태에서 찍어낼수록 손해인데 이게 돕는 게 맞느냐는 자괴감도 만연했다. 마지막 지령을 발행한 6월 24일 <빈과일보>는 100만부를 찍었고 이는 오전 중에 모두 팔렸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연대였고, 누군가에겐 이제 사라져가는 역사의 기념품이었다. 그리고 중국이 홍콩을 반환받으며 약속한 50년의 또 한 축이 사라지는 쓸쓸한 풍경이었다.

<빈과일보>의 폐간은 국가가 개입한 전방위적 압력으로 인해 업계 1위의 신문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전례를 남겼다. 홍콩의 미디어들은 <빈과일보> 사태이후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장 다음 타깃은 어디냐에 관심이 쏠렸다. 민주화 운동가, 인권단체, 야당 순으로 사라지고 있다. 교육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교과서가 바뀌고, 애국자의 홍콩이라는 이름으로 공무원과 교사에 대한 국가 충성 서약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제는 비판적인 언론마저 이른바 ‘개혁’을 해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빈과일보>가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양심적인 반중 매체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홍콩 역사상 가장 많은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로 인한 벌금을 물었고, 코로나19 팬더믹 상황에서는 온갖 루머의 발신지였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한 언론사의 생사에 간여하는 건, 공권력의 힘으로 미운털 박힌 언론사를 날리는 건 정당화 될 수 없다.

최근 <조선일보>가 조국 부녀의 사진을 일러스트로 바꾸어 관련도 없는 부정적 기사에 그래픽으로 오용하는 빈과일보식의 사고를 쳤다. 분노한 시민들은 국가가 나서서 이 매체를 폐간시키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이 잘못한 일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빈과일보>의 폐간이 부당한 만큼, 그 신문사를 국가가 나서서 폐간하라는 요구도 부당하다. 언론의 독립성과 자유는 내 입맛에 맞을 때에만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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