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정부 재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있을까? 아니, 국민적 합의를 위한 노력이나 시도는 있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국가 재정의 상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정의 역할에 대한 국민적 합의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재정은 31.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 40.2%에 비해 8.7%포인트가 낮다. 즉, OECD 평균의 약 78.4% 수준이니, 약 22.6%만큼을 더 지출해야 OECD 평균이 된다. 2020년 OECD에 보고된 2021년 대한민국의 GDP 추정치는 약 1조8천억 달러(1,806,707million USD)로 원화(환율 1,127원)로 환산하면 약 2,000조 원 정도다. OECD 평균 수준의 재정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연간 약 174조 원의 추가 정부 지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재정 지출과 연동하여 국민의 조세와 사회보장 기여금 부담을 갑자기 늘릴 수는 없으므로 이만큼 국가 재정 규모를 더 키우는 것은 장기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OECD 34개 국가 중에서 경제 규모 10위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OECD 평균 수준의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과도한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GDP 대비 국가 재정의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재정 중에서 공공 사회복지 지출의 비중도 매우 낮다. OECD 통계에서 사용하는 공공 사회복지 지출은 SOCX다. SOCX는 OECD가 1996년에 개발한 통계 지표인 사회복지 지출(Social Expenditure database: SOCX)로 ➀공공 사회복지 지출(Public Social Expenditure) ➁법정 민간 사회복지 지출(Mandatory Private Social Expenditure) ➂자발적 민간 사회복지 지출(Voluntary Social Expenditure) ➃순 사회복지 지출(Net Social Expenditure)의 4개의 지출 통계로 구성된다.
공공 사회복지 지출에는 기초연금 등 노인에 대한 지출, 아동수당 등 가족 및 육아에 대한 지출, 고용보험을 통한 실업급여 지급 등 노동을 위한 지출, 공공임대주택 등 주거복지를 위한 지출, 건강보험과 보건의료를 위한 지출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지라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출이 포함된다. 2019년 기준으로 한국의 공공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GDP의 12.2%인데, 이는 OECD 평균인 20%에 비해 7.8%포인트만큼 낮다.
국민의 부담(조세부담과 사회보장 기여) 수준을 더 높여야
반면,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조세 관련 부담도 매우 낮은 편이다. 국세와 지방세를 합한 금액을 국가의 명목 GDP와 비교한 지표를 조세부담률이라 하고, 조세부담에 더해 법정 의무 지출인 사회보장 기여금을 합한 금액을 GDP와 비교한 것을 국민부담률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회보장 기여금은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의 각종 사회보험료를 모두 포함한 금액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국민부담률은 27.3%로 OECD 평균인 33.8%와 비교할 때 GDP 대비 6.2%포인트 낮고, 조세 부담률은 20.0%로 약 4.9%포인트 낮다. 즉, 우리나라는 세금 등의 국민부담도 적고, 국가의 재정 지출이나 사회복지 지출도 적게 하는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상황을 보통 ‘저부담-저복지’라고 부른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지난해 4차례의 추경을 두고 기획재정부는 국가부채가 GDP의 40% 수준을 넘어 위험 수준이므로 재정 준칙을 제정하여 국채를 함부로 늘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OECD 국가들은 GDP 대비 국가부채 수준이 평균 128%였고, 일본 등은 200%를 훨씬 넘는다. 반면, 한국은 국채의 비중이 낮은 대신 가계부채 수준이 GDP 대비 100%를 넘어서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국가가 운영하는 재정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으니, 개별 가계가 빛을 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음을 보여 준다.
국채는 금리도 낮고,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세금을 통해 이자를 납부할 수 있으므로 부도날 우려가 없지만, 가계부채는 금리도 높고 원리금 상환을 못하면 개인의 파산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국가 재정이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 왔는지, 정치권과 정부는 성찰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려면 무엇보다 확장적 재정 정책 기조가 요구된다 하겠다. 그리고 그럴 때라야 재정적 지속가능성도 더 높아진다.
차기 정부를 위한 재정 전략
기재부를 두고 '곳간지기'라고 한다. 국유재산과 재정을 잘 관리하고 낭비와 누수를 없도록 하는 것이 기재부의 기본적 역할이다, 또한 창고가 바닥나지 않도록 적절한 세수 확보를 위한 법률을 국회가 제정하도록 제안하는 역할과 더불어, 함부로 재산을 탕진하지 못하도록 올바른 수입과 지출 구조를 갖도록 하는 것도 국민이 기재부에 부여한 임무 중의 하나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동안 우리나라의 기재부는 이런 일을 너무 과도하게 잘 해서 오히려 집안 살림을 힘들게 한 측면도 있다. 정부가 소극적 재정 정책을 고수할 때, 이런 비판을 받게 된다.
반면에 창고의 주인인 국민들이 자기 창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창고지기에게 모든 살림을 맡겨 두고 있었다는 비판도 피할 길이 없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매년 세수를 의도적으로 과소 추정해서 해마다 세계 잉여가 발생하도록 하였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시기에 부자감세와 해외자원 개발 등으로 만든 국가부채를 상환하도록 한 것이 과연 적절하고 옳은 일이었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촛불혁명으로 출범한 정부에서 삶의 질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국민의 원망이 지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반영됐다. 기재부를 잘 통제하여 사회복지 지출을 과감하게 확대하지 못한 청와대와 집권당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2차 추경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 1분기에 초과 세수 32조 원이 발생하여 국채를 내지 않고도 추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볼 때, 이는 집권여당이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기획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곳간지기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가장 먼저 국회와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반성해야 한다. 여당이 국가의 재정 상황을 긴밀하게 모니터링하면서 세계 잉여를 미리 파악하고 초과 세수도 먼저 예상하고 사전에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기재부가 보고를 하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증세 논의 없이 재정 지출만 확대하자고 요구하는 정치권은 반성해야 한다. 그러니 기재부 공무원들이 보기에 이런 정치권이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이런 정책과 공약을 위해 각자 조금씩 부담을 더 해서 세수를 늘리고 적극적인 대응을 하자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 재정 정책이 지속적으로 가능해지려면 증세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빚내서 실시하는 적극적 재정 정책은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개혁의 주요 대상이 검찰을 비롯한 사법개혁이라면, 차기 정부의 중점 개혁 대상은 기재부의 재정 정책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의 신자유주의 '작은 정부'에서 늘 추진됐던 소극적 재정 정책의 기조에서 벗어나서 보편주의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로 가야한다는 뜻이다. 적극적 재정의 뒷받침 없이는 이런 복지국가의 건설과 지속적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법개혁은 수혜자의 숫자가 적은 반면, 적극적·확장적 재정 개혁에 기반을 둔 보편적 복지의 확대·강화는 다수의 국민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이제 민주당은 경선 일정이 정해져 본격적인 당내 경선이 시작될 것이다. 대권 주자들이 경선 과정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논쟁 중의 하나는 차기 정부의 재정 전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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