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가볍고 액체적이고 불안정한 사회다.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먼트 바우만은 이를 액체근대라 부른다. 액체근대는 바우만 사상을 대표하는 사회이론이다. 액체 근대란 우연적이고 불확실하고 끝없이 변화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말한다. 액체 근대사회에서 불안정한 노동계층이 지속적으로 생산·재생산함으로써 현대사회의 안팎으로 불안정 노동계층이라는 유령이 세계 방방곡곡으로 배회하고 있다. 청년 백수, 조기 퇴직자, 비정규직 근로자, 이주 노동자(불법 체류자), 난민, 망명자 등이 바로 불안정 노동계층이다.
‘불안정노동 계층’을 의미하는 새로운 노동계급이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이다. 말 그대로 ‘불필요한 계층’을 뜻하는 새로운 계급 프레카리아트 사회가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스콧 갤러웨이는 플랫폼 기업들은 높은 보상이 주어지는 소수의 일자리만 창출하고 그 밖의 나머지 사람들은 부스러기 같은 일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일 것이라 한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미국은 300만 명의 영주와 3억5,000만명의 농노가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2020년 현재 우리나라 플랫폼 노동 종사자는 약 179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플랫폼 노동자가 대표적인 프레카리아트다.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노동계급은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G.Standing)에 의해 제시된 개념으로 불확실하다는 형용사 precarious와 프롤레타라이트 proletariat라는 명사가 조어되어 만들어진 계급용어다. 프레카리아트의 범주에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필수노동자, 실업자 및 잠재적 실업자가 여기에 해당 된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자본의 금융화,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 모두가 프레카리아트에 진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7년 10월에 발표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유기윤 교수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90년 미래도시는 4개의 계급이 존재하는데, 1계급이 플랫폼자본가, 2계급이 플랫폼 스타, 3계급이 인공지능 로봇, 4계급이 프레카리아트이다. 프레카리아트가 99.997%가 될 것이라는 이 끔찍한 공포가 한국사회의 안팎으로 서서히 드리우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자본은 노동 배제적 이윤 축적 체제를 구축하고, 이런 조건 속에서 프레카리아트 들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로 전락될 것이다. 쓰레기란 잉여의, 여분의 인간들, 공인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집단을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서 탈락해 온전한 의미의 현대적 생활방식을 영위하지 못하고 그 삶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현대사회는 과잉, 잉여, 쓰레기, 그리고 쓰레기 처리의 문명이다. 영원한 것이 없는 불확실한 세상은 권리와 정의보다는 경쟁과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끊임없이 생산라인을 가동하며, 사람들을 축차적으로(하나하나) 처리하고 있다. 누군가는 부자, 누군가는 빈자. 부자들에게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고 평온한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빈자에게 세상은 새로운 의미의 빅브라더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현장에서는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구별 짓는 신분 차별의 아비투스(habitus)가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 하청사회라는 갑질 문화로 을은 더욱 취약해지는 반면에 갑은 갈수록 막강해지는 예외상태에서 ‘위험의 외주화’가 폭넓게 빈번하게 이루어져, 수많은 김용균(태안 화력발전 노동자) 들이 위험과 사망사고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 사회 안전망과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고 노동시장 유연화의 이름으로 구조조정과 대량해고가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해마다 10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입고 2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사망하는 OECD의 산업재해사망 1위 국가다. 코로나 19펜데믹으로 플랫폼 산업은 돈방석 위에 올라앉았지만, 플랫폼 노동자들은 택배 상자를 나르다 쓰러져 끝내 사망하거나 토막잠을 자다 사망하는 사례가 많아도 너무 많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대리석 판 한 개를 골라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깎아내면” 아름다운 조각품이 완성되는데, 이와 동시에 깎여나간 불필요한 부분이 불가피하게 쓰레기로 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율과 경쟁의 기준에 따라 인간이냐 쓰레기냐로 결정되어버린다는 말인가?. 이것이 진정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향하는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프레카리아트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레카리아트를 비정규직의 문제나 불안정 고용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좀 더 전면적인 차원에서 사회경제적 주체로서 호명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을 통한 사회적 삶의 보장이 필수적이다. 기본소득이란 모든 사회 성원에게 정기적으로 무조건 현금을 주어지는 최소생계비이자 마땅히 받아야 할 경제적 기본권이다. 기본소득과 같은 형태의 사회적 임금 지급을 통해 사회적 양극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사회적 양극화의 해법으로서 불로소득과 플랫폼에 대한 과세의 현실화를 제안한다. 불로소득이란 토지·건물·금융 투자에 따르는 전통적인 불로소득뿐만 아니라 지적 재산권 수입, 정부 보조금 혜택, 서비스 중개에서 오는 소득을 모두 포함한다. 불로소득 자본주의에 기여하는 것으로 독점적 특허권과 상표권 등 지적 재산권이다. 예를 들면, 구글은 모토롤라 인수로 2만 건이 넘는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 특허권으로 올리는 불로소득은 상품이나 서비스로 올리는 수입과 비슷하거나 더 많다. 나이키, 코카콜라, 애플, 스타벅스 등과 같은 브랜드는 신생업체의 진입을 막으면서 전 세계 시장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가이 스탠딩은 <불로소득 자본주의>에서 “‘공유 경제’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플랫폼 자본주의는 직접적으로는 플랫폼 노동을 값싼 일자리로 만들어 노동자들이 적절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막고, 간접적으로는 플랫폼 노동자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약화시켜 질 좋은 일자리의 수와 범위를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기술적 장치만을 지배한 채 부와 권력을 확보하는 플랫폼 자본주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그래서 불로소득과 플랫폼에 대한 과세와 과세의 현실화가 바로 기본소득의 중요한 재원이 될 것이고, 이것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극복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민주적인 유일한 해법이다.
끝으로, 52년 전 1970년 11월, 아름다운 22세 청년 전태일 열사의 불타는 몸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고 외쳤던 전태일 열사의 최후의 순간, 그리고 이미 역사가 된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에서 거제에서 백두까지 노동해방의 그 구호들이 2021년 6월 오늘, 기본소득이 전태일 열사와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과 켜켜이 겹쳐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라는 권리와 정의의 구호를 외치는 듯하다.
김상돈 고려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는 기본소득 국민운동 경기본부 상임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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