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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미선 비극 19년, 아직도 SOFA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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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미선 비극 19년, 아직도 SOFA는…

[손호철의 발자국] 46. 경기도 양주 : 효순‧미선공원에서 SOFA를 생각한다

'자주평화통일의 꿈으로 다시 피어나라! 미선아 효순아!'

동두천에서 문산으로 가는 옛 56번 지방도로에는 작은 고개가 있고, 그 고개에는 이 같은 펼침막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몇 년 전부터 공사해 최근 완공한 '효순미선 평화공원'이다. 이들이 누구이기에 이들의 이름을 딴 평화공원을 지은 것인가?

"오 필승 코리아!" 2002년 6월, 전국은 월드컵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은 효순의 생일 축하를 위해 친구들과 의정부로 놀려가려고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다. 이 길은 보행자 도로가 없는 좁은 2차선 도로로 이들은 갓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 때 도로 폭보다 넓은 특수장갑차가 뒤따라왔다. 마침 반대쪽에서 미군 전투차량들이 나타났고, 장갑차가 이 차들을 피하기 위해 갓길 쪽으로 바짝 붙으면서 효순이와 미선이는 장갑차에 눌려 죽고 말았다. 꽃다운 10대 소녀들이 처참하게 쓰러진 것이다.

▲ 효순미선 추모공원의 모습. '자주평화통일의 꿈으로 다시 피어나라'는 구호가 인상적이다. ⓒ손호철

이 사건은 중요한 역사적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고가 나자, 미국은 사과, 문상 등을 했다. 한미 합동조사팀은 사고에 대한 조사를 벌여 조종수인 워커 하사는 길이 휘어져 학생들을 보지 못했고 관제병은 봤지만 당황한데다가 무전기까지 고장 나 워커에게 알리지 못해 발생한 비극적인 사고라는 결론을 내렸다.

100만 명이 재판권 이양 요구에 서명을 하는 등 비판적 여론이 거세지자 정부는 미군에게 이들의 재판권을 포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Statue of Forces Agreement)에 공무 중 발생한 범죄는 미국이 1차적 재판권을 갖지만 미국에게 재판권 이양을 호의적으로 고려해주도록 요구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전례가 없다며 거부했다.

미군은 이 해 11월 워커 등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을 했지만 사고가 불가항력적이었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이들은 5일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특히 미국은 피고의 인권보호차원에서 피고가 무죄를 받으면 검사는 항소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 사건은 완전히 종결되고 말았다.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분노했다. 재판권을 미국이 행사했더라도 최소한 무죄가 선고되지 않았다면, 시민들이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지금도 질문을 하게 된다. 만일 한국군이, 아니면 민간인이 이 같은 사고를 저질렀다면 무죄판결이 나올까? 미국 법제도를 잘 모르지만, 미국에서 미군이 비슷한 사고를 저질렀어도 무죄판결이 나올까?

사실 두 미군에 대한 무죄판결도 판결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보행자도로도 없는 좁은 지방도로에 도로 폭보다 더 넓은 장갑차를 충분한 전방호송시스템 없이 운영한 미군의 시스템 그 자체다(사고가 난 뒤 경기도는 문제 지역의 56번 국도를 넓게 새로 건설했고 옛 56번 도로는 샛길로 사용하고 있다).

▲ 양주 지역을 지나가는 군 특수차량. 이 지역은 이같은 군 특수차량의 운행이 많은 곳으로 결국 효순‧미선 비극의 원인이 됐다. ⓒ손호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유감 표시를 주한 미국대사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미국 대통령까지 간접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대규모의 추모시위가 노무현 대 이회창의 대선 국면과 맞물려 연이어 광화문에서 벌어졌다.

이 사건과 추모시위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이 사건은 최초의 대중적인 '반미시위', 가장 대중적인 '반미시위'를 촉발시켰다. 이전에도 미문화원 방화와 점거 등 반미시위가 있었지만, 이것들이 소수 운동권의 시위였다면 효순‧미선 추모시위는 일반대중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대중적인 시위였다. 특히 이 사건을 통해 국민들이 SOFA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분노했다.

둘째, 촛불시위의 효시라는 의미를 갖는다. 세계적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촛불시위의 원조가 바로 2002년 11월에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달려 나온 이 시위였다. 이 시위가 이후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광우병 반대 촛불,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로 성장발전해 온 것이다.

세 번째, 최초의 '인터넷 시위'이다. 이 사건은 2002년 6월에 있었지만 월드컵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일부 선도적인 네티즌들이 인터넷으로 이를 알리면서 11월 들어 인터넷으로 이 소식을 접한 익명의 네티즌들이 모여든 시위다.

▲ 효순‧미선 추모 촛불집회 ⓒ연합뉴스

SOFA가 무엇이기에 효순‧미선 사건은 주한미군과 관련된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으로 지탄을 받아온 것인가? SOFA에 의해 효순‧미선 사건에 대해 미국이 재판권을 행사했고 결국 무죄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SOFA의 뿌리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대전에서 체결한 대전협정에 있다. 국군작전권을 미국에 양도한 것으로 알려진 대전협정(정식명칭 '재한 미국 군대의 관할권에 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협정')은 사실은 군작전권이 아니라 주한미군의 지위를 다루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32. '대전협정', <프레시안> 2021년 5월 19일자 참조). 구체적으로, 주한미군에 대해서는 미군법회의가 배타적인 재판권을 행사하는 등 한국이 미군범죄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이다.

1967년 2월 한미 양국은 SOFA를 체결하면서 대전협정을 이로 대체했고, 이후 SOFA는 1991년과 2001년에 두 차례 수정했다. 이 같은 수정으로 '불평등조약'의 상징이었던 형사재판권 자동포기 조항은 폐지되었고, 1992년 미군이 미군 위안부를 잔인하게 살해한 윤금이씨 사건이후 살인, 강간과 같은 중대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는 우리가 신병을 구금할 수 있도록 사법주권을 대폭 강화했다. 그 결과, 이제는 우리의 SOFA가 특별히 불평등한 조약이 아니라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정부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표적인 선진국들인 독일과 일본에 대해 미국이 맺은 미·독 SOFA나 미·일 SOFA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무 중 발생한 사고의 경우 미국이 1차적인 재판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비판자들은 효순‧미선 사건을 미군의 오키나와 소녀 강간 사건에 대해 일본이 재판권을 행사한 것과 비교해 비판하고 있지만, 오키나와 사건에 일본이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공무 중 발생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지 미·일 SOFA가 우리보다 평등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아프가니스탄 등에 의료지원단을 파견하면서 체결한 SOFA에도 공무의 경우 파견국인 우리가 재판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현지인을 오발 사고로 죽인 한국군의 경우 국내로 소환되어 우리가 재판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SOFA를 국제적으로 비교해 보면, 널리 퍼져있는 일반인들의 인식과 달리(나 역시 이 글을 쓰기 위에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기 전에는 그리 생각했었다), 최소한 효순·미선 사건처럼 공무와 관련된 사고에 관한 한, 사건이 터졌던 2000년대 이후는 일본, 독일 등 다른 미군 주둔국 SOFA에 비해 특별히 불평등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이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공무의 경우 우리만이 아니라 일본과 독일도 미국이 재판권을 갖는다는 사실, 나아가 미군만이 아니라 한국군 등 모든 군 파견국이 재판권을 갖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SOFA가 불평등한 조약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같은 조약들은 모두 불평등한 것이지만, 외국군의 주둔을 원하는 한, 주둔국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국제적으로 관례화된 불평등인 셈이다. SOFA에 따르면, 미군이 한국전쟁 중에 일으킨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인 노근리 학살 같은 반인도적인 범죄를 일으켜도, 이는 '공무'중 일으킨 범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해 사법적 권리를 전혀 행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문제가 있다면 SOFA가 아니라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일 것이다.

한미 SOFA가 갖는 진짜 불평등성은, 효순‧미선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지만, 공무가 아닌 사고의 경우다. 1992년 윤금이 사건 이후 비공무 미군범죄에 대한 사법주권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 문제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일본, 독일과 달리 우리는 미군이 범죄를 저지른 뒤 영내로 도주하면 신변인도가 어렵고, 일본과 독일은 미군이 입회하지 않더라도 심문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재판에서 증거로 효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이장희 불평등한SOFA개정국민행동 상임대표는 비판하고 있다.

사실 SOFA의 공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대한 협정'으로, 주한미군의 지위만이 아니라 시설 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미군에 의한 환경오염 등 불평등성을 개선해야 할 문제가 이밖에도 많다. 예를 들어, 미군이 주피터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아래 부산 제8부두, 평택, 오산, 군산 등에서 세균전을 대비한 위험한 세균 실험을 실시해 오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 2002년 11월 시청 앞 효순‧미선 추모집회에서 대형 성조기를 찢는 장면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은 추모공원의 벽화 ⓒ손호철

2020년 초여름 근현대사 답사 때문에 오랜만에 이곳을 찾았더니 예전에 봤던 미군이 세운 추모비는 보이지 않고 추모공원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찾아보니 추모비를 공원 밖 구석으로 옮긴 것이다. 이를 보고 있자 새로 추모비를 설립하려는 일부의 움직임에 대해 미군 추모비를 "우리가 미군에 요구해 세운 것이다. 추모비를 두 개씩이나 세우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한 미선씨 아버지의 말(<동아일보>, 2012년 6월 4일자)이 생각나 착잡했다.

2021년 1월 다시 한 번 그곳을 찾았더니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미군 추모비 옆에 비판적인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추모비는 두 명의 죽음을 '비극적 사고'라고 표현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사과 한마디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미군에게 이 비를 미군 영내로 이전하도록 요구했지만 거부해, 2018년 유족의 양해를 받아 이전했다는 내용이다.

추모비의 이전이야 여러 면을 고려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추모비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사과가 없다는 비판은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이 무죄를 판결한 것은 비판할 수 있지만, 둘의 죽음이 '의도적 살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곳도 아니고 추모비에 '비극적 사고'가 아니라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미군이 꽃다운 두 소녀를 장갑차로 깔아 죽여서, 미안하다"고 쓸 수야 없는 것 아닌가? 다만 '비극적 사고'에 주어가 없는 것은 문제이다. 즉 '우리가 일으킨 비극적 사고로 두 소녀가 스러져 갔다'는 식으로 사고를 일으킨 주체를 명확히 했어야 했다.

▲ 최근 추모공원 밖 언덕으로 옮겨 놓은 미군의 추모비와 이전 과정과 이유를 설명해 놓은 설명판 ⓒ손호철

효순‧미선 사건은 단순히 이 사건의 재판권 문제를 넘어 SOFA, 나아가 그 모법인 한미 상호방위조약, 전시 군작전권 문제 등 주한미군의 문제와 한미 간의 불평등성이라는, 보다 큰 그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이의 개선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 점에서 '추모비 시비' 같은 것은 오히려 이 같은 큰 그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2005년 한 방송의 인터뷰에 따르면 워커 하사는 자신이 어린 학생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미선의 아버지 심수보 씨도 사건 10년 뒤인 2012년 딸의 죽음은 단순사고이지 미군들이 사고를 "애들이 미워서 낸 게 아니지 않나"며 "사고를 낸 미군도 이제 편히 지내길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평화공원을 떠나려니, SOFA의 불평등성 논쟁과는 별개로, 생일 파티에 나섰다가 쓰러진 두 소녀들의 아픔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빨리 이 땅에 평화가 찾아와 미군 장갑차가 이 땅을 달릴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기를, 아니 국군 장갑차조차 필요 없는 세상이 오기를, 효순‧미선의 명복과 함께 빌며, 나는 분단의 아픈 현장인 임진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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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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