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1위 대선주자 위치를 지켜온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본격 정치권 등장 직전 다소 걸음이 꼬이는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다. 국민의힘 입당 여부를 놓고 한 차례 입장을 번복한 일이 결국 캠프 대변인 사임으로까지 이어지면서다.
윤 전 총장의 대변인을 맡아온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20일 오전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일신상의 이유로 직을 내려놓는다"고 밝혔다.
윤 전 총장 측은 이와 관련해 "윤 전 총장은 지난 18일 (이동훈·이상록) 두 대변인을 만나 '앞으로 국민 앞에 더 겸허하게 잘 하자'면서 격려했다"며 "하지만 이 전 대변인은 19일 오후 건강 등의 사유로 더 이상 대변인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고, 윤 전 총장은 아쉬운 마음으로 이를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보면, 윤 전 총장이 이 전 대변인을 지난 18일 저녁에 만나 무언가('국민 앞에 겸허하라')를 지시했고 이 전 대변인은 그 이튿날 바로 사의를 표했다는 얘기가 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시의 '내용'과 '시점' 두 가지다.
먼저 '국민 앞에 겸허하다'는 표현은 윤 전 총장의 입을 직접 통해 나온 말들을 상기시킨다. 윤 전 총장은 지난 18일 오후 <중앙일보>와 KBS·TV조선과 직접 전화 인터뷰를 하고 "지금 국민의힘 입당을 거론하는 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국민 말씀을 먼저 경청하는 게 도리"라고 했다.
이는 같은날 오전 이 전 대변인이 라디오 인터뷰에 나와 했던, '사실상 국민의힘 입당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윤 전 총장이 직접 부인한 것이다.
이 전 대변인은 당일 오전 KBS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민의힘 입당은 시기의 문제일 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느냐'는 질문에 "그러셔도 된다"며 "제3지대 얘기하시는 분들, '국민의당에 중심축을 박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분들도 있지만 여전히 보수의 중심 국민의힘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윤 전 총장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었다.
윤 전 총장의 육성 인터뷰 시점, 윤 전 총장이 이 전 대변인을 만나 "격려"한 시점이 모두 18일 오후라는 점이 주목되는 이유다.
윤 전 총장은 또 이 전 대변인이 밝힌 '민심 투어' 계획에 대해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며 "내가 지방에 가고 시장에 가서 자영업자를 만날 수는 있지만 기자들에게 미리 공개하고 하는 민생 투어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윤 전 총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국민의 부름에 의해서 국민이 기대하는 일을 하기 위해 나온 사람"이라며 "공직자라면 싫건 좋건 국민이 일을 맡기고 하라고 하면 거기에 따르는 게 맞다. 지금 그 길을 따라가는 중이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조차 모른다"고 했다.
국민의힘 입당에 대해 재차 거리를 둔 것이다. 그는 "국민 말씀을 먼저 경청하는 게 도리"라며 "그런 뒤에 어떤 식으로 정치 행보를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 길을 정해놓고 국민들을 만나는 건 말이 안 된다"거나 "입당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벌써 했다. 결심했으면 입당부터 하지, 뭐하러 국민 목소리부터 듣겠느냐"고도 했다.
즉 이 전 대변인은 사실상 국민의힘 입당으로 윤 전 총장이 방향을 정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이에 대해 윤 전 총장이 언론에 직접 전화 인터뷰까지 하며 반박하는 모양이 되자 이 전 대변인으로서는 더 직무를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 셈이다.
이 전 대변인은 기자 시절 보수정당 취재를 오래 해왔고, 이준석 국민의힘 신임 대표는 이 전 대변인 임명에 대해 "지금까지는 윤 전 총장 측 발언자가 굉장히 여러 분이었고 직함이 명확하지 않아서 저희가 대응하는 데 좀 어려움이 있었다면 이동훈 기자가 대변인으로 자리한 이후 상당히 윤 전 총장 측 입장이 정제됐다"며 "앞으로 오해 없이 서로 입장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긍정 평가하기도 했었다.
윤 전 총장은 지난 3월 검찰총장직을 사임한 후 대선 주자로 몸값을 높이면서도 3개월이 지나도록 공식 언론 창구를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대변인으로 임명한 인사가 내부 혼선 끝에 열흘 만에 물러나게 되면서, 이달 말로 예정된 정치 참여 선언 이전에 악재가 불거진 모양새가 됐다.
윤 전 총장측이 내부·언론 소통 문제로 홍역을 치르는 한편 입당 문제를 놓고 국민의힘과 긴장감이 형성되는 사이, 최재형 감사원장에 대해 정치권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최 원장은 지난 1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여권 의원들의 '대선 불출마 압박'에 대해 "제 생각을 정리해서 조만간에 모든 분에게 말씀드릴 기회를 갖겠다"고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감사원장이 사임 직후 바로 선거에 출마하면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받지 않겠느냐'는 지적에도 "그 부분은 다양한 판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받아쳤다.
대선 출마 등 정치 참여에 대한 감사원장으로서의 '모범답안'은 '현재 직분에 충실할 뿐 정치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일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최 원장이 이 모범답안을 말하지 않고 여지를 둔 것 자체가 사실상 대권 도전을 시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윤 전 총장이 대변인을 사실상 경질하면서까지 국민의힘 입당에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이면서, 국민의힘으로서는 '윤석열 대체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국민의힘이 최 원장에 대한 직간접적 지원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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