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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김영삼·김대중 정부의 조합 '97년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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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김영삼·김대중 정부의 조합 '97년 체제'

[손호철의 발자국] 45. 부평 : 1997년 IMF 경제위기와 '헬조선'

1953년 정전과 함께 분단이 영속화된 뒤 현재까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세 개만 들라면 무엇일까?

우선, 1961년 5‧16 쿠데타다. 이 때 생긴 '개발독재체제' 내지 '박정희 체제'는 이후 우리 사회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이 체제는 구체적으로 정치적 독재체제와 경제적으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국가주도의 경제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1987년 민주화다. 흔히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것으로, 민주화와 함께 박정희 체제의 한 축인 독재체제가 무너졌다.

세 번째는 1997년 IMF 경제위기다. 이 위기와 함께 박정희 체제의 또 다른 축인 국가주도형 경제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식의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됐다. 우리를 괴롭히는 비정규직의 일상화, 무한경쟁의 스펙 전쟁과 'N포 세대', '헬조선'과 '흙수저' 등 사회적 양극화가 모두 1997년 등장한 '97년 체제'의 결과다.

인천 부평구 길산역 앞에 가면 커다란 공장이 나타난다. 이제는 한국지엠으로 이름이 바뀐 대우자동차 공장이다. 1997년 경제위기와 함께 소유주가 한국지엠으로 바뀐 것이다. 그 앞에 서자 2000년 봄 이 앞에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의장으로 여러 사회단체들과 치열한 해외매각 반대투쟁을 하던 기억이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 1997년 경제위기에 의해 미국 GM에 헐값으로 매각된 옛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손호철

당시 사회단체들은 대우자동차 해외 매각을 하지 말고, 1980년대 프랑스의 르노와 이탈리아의 파아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두 나라 정부가 했듯이 일시적으로 국유화한 뒤 이후 정상화시키도록 요구했다(미국도 한국 경제위기 10년 뒤인 2008년 월스트리트 경제위기 당시 GM을 그렇게 처리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이를 GM에 매각했고 이후 GM은 대우자동차의 부를 상당히 본사로 이전시키는 등 부실화시킨 뒤 정부지원을 하지 않을 경우 공장폐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다.

▲ 대우자동차의 해외 매각을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시민단체들의 시위 장면 ⓒ 대우공투본 자료 사진

"정부는 최근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1997년 11월 21일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구제금융 신청을 선언했다. 사실상 국가부도를 선언한 것이다. 이후 우리사회는 '한국전쟁 이후의 최대의 국난'이라는 충격에 빠져들었다. 재벌기업들이 무너지고 알짜 기업들이 헐값에 외국에 팔려나갔다. 기계 산업의 꽃이라는 자동차산업만 해도 대우자동차, 삼성자동차, 쌍용자동차가 외국에 팔려나갔다. 한전 등 기간산업들을 해체해 소위 '민영화'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 '국가부도의 날'인 1997년 12월 3일 IMF 구제금융 신청에 대한 기사. ⓒ이천민주기념관 전시물
▲ IMF 경제위기로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가 인수한 SC제일은행 건물 ⓒ손호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같은 경제위기가 대선 직전에 터져 나온 덕분에 불가능할 것 같던 정권교체와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이 이루어진 것이다(유신 세력인 김종필과의 DJP연합, 이인제후보의 경선 불복과 출마, 경쟁 후보인 이회창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 그리고 대선 직전 터져 나온 경제위기라는 호재들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불과 1.6%밖에 이기지 못했다. 즉 경제위기가 아니었으면, 여러 호재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이는 2008년 월스트리트 경제위기로 미국에서 불가능할 것 같던 아프리카계 대통령인 오바마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경제위기의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주식시장의 외국인 소유가 3% 수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민족주의적' 경제 중의 하나였던 우리 경제는 외국인 소유가 40%를 넘어서 가장 '개방적' 경제로 변해, 세계경제가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외국자본이 빠져나가 주식이 폭락하고 환율이 요동치는 나라가 됐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일상화되면서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됐고 빈부격차가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악화됐다.

그 결과, 노력을 해봐야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경제위기 전에는 5.3%에 불과했으나 2016년 조사 때는 60%나 넘어설 정도로 '흙수저 세습사회'로 변화하고 말았다. 그동안 학벌 철폐를 위해 노력해온 '학벌 없는 사회'라는 시민단체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학벌이 아니라 출신 집안이 더 중요한 '자본사회'로 변했다며, 해체를 선언했다.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는 1997년 경제위기가 우리사회에 끼친 영향이 잘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IMF는 나는 해고됐다(I'M Fired)라는 시위판이 IMF 경제위기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주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이 같은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온 1997년 경제위기는 왜 생긴 것인가? 미국과 주류학계는 '한국식 관치경제의 비효율성'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한국경제 성공의 동력이라고 칭찬해온 '국가주도형 산업화'를 이제는 비효율성의 원인이라고 몰고 간 것이다. 경제위기 덕분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도 이 같은 진단에 동조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정지표로 제시하는 등 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미국식의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도입했다.

물론 박정희 모델이라는 관치경제가 경제위기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이에 못지않게 경제위기에 기여한 것은 김영삼 정부의 무모한 시장 개방, 특히 자본시장의 개방이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인 1993년 미국은 소련 동구의 몰락에 힘입어 세계적인 시장 개방과 무한경쟁 체제인 WTO(세계무역기구) 체제를 선언했다. 김영삼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개방을 한다는 '세계화' 전략을 추진했다. 특히 임기 내에 우리나라가 선진화됐다는 업적을 남기기 위해 선진국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기로 했는데, 그러려면 자본시장을 개방해야 했다.

이처럼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자본시장을 개방하자, 국내 금융기관들이 싼 금리의 외국자본을 마구 빌려와 OECD 가입을 추진한 1994년부터 경제위기가 터진 1997년 말까지 외채총액이 무려 3.5배로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동남아 외환위기가 터지자 우리까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한마디로, IMF 위기 전 한국경제는 오랜 박정희 모델과 김영삼 정부가 너무 급속히 도입한 미국식 신자유주의모델의 나쁜 점만 모아 놓은 '최악의 조합'에 처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위기 국면이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위기를 덜 고통스럽게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2 금융권 등 금융전반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를 만들어 해결해 나가기로 IMF와 합의했지만, 그전까지 '금융의 황제'였던 한국은행이 반대를 했고 김대중 후보도 반대하면서 무산되고 말았고(김대중 정부 들어 결국 만들었다), 그 결과 수 십 배 고통스러운 IMF 프로그램으로 가야했다.

주목할 것은 미국의 움직임이다. 경제위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98년 한국정치의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인터뷰했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묻자 그는 충격적으로 "소련 동구의 몰락"이라고 답했다. 그전까지는 한국 등 동아시아가 냉전의 첨단지역이라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미국이 이 지역의 자체적인 산업화를 허용했지만, 소련 동구가 망하고 나자 그럴 필요성이 없어져 미국의 경쟁상대인 '제2의 일본'을 만들지 않기 위해 한국을 손 본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이처럼 오랜 박정희 모델의 문제점도 있지만 김영삼 정부가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를 너무 급속하게 도입해 문제가 터진 상황에서 IMF가 미국식 시장 모델을 강제하고 김대중 정부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자 많은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 결과 전두환 집권 시절에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에서 귀국할 당시 신변보호를 위해 그와 동행할 정도로 김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조차 김 대통령을 'IMF 서울지부장'이라고 부른,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다. 주목할 것은 이후 IMF 스스로 자신들의 처방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미국은 10년 뒤(2008년) 한국과 비슷한 금융위기상황에 처하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기업을 살리는 등 10년 전 우리에게 강제한 정책들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폈다는 점이다.

아니 이를 넘어서 김대중 정부는 경제위기를 핑계로 IMF가 요구하지 않은 신자유주의 정책도 밀고 나갔다. 이갑용 민주노총위원장이 당시 방한 중이었던 캉드쉬 IMF 총재에게 정리해고에 대해 항의하자, 그것은 자기들이 요구한 것이 아니니 "너희 정부에게 따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리해고 대신에 민주노총이 제시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가 고통 분담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유지하고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덜 벌고 덜 소비하는 대신에 자기시간을 즐기기도록 문명의 전환을 할 수 있는, 보다 나은 대안이었다.

재벌개혁도 김대중 정부는 주주만이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하청업체 등 이해당사자 모두의 이익을 고려하는 유럽식 '이해당사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가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식 '주주자본주의(stockholder capitalism)'를 추구했다. 구체적으로, 소액주주의 권리를 강화해 재벌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했다. 헌데 이 소액주주는 많은 경우 엘리엇처럼 알짜 한국기업을 헐값에 먹으려는 미국의 투기자본들이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경제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소위 '진보적' 경제학자(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한)들이 "이제 자본의 국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이들 미국 투기자본들의 소액주주를 위탁받아 삼성 주총 등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소위 소액주주 운동이었다는 사실이다. 대신 유럽 선진국의 산업자본주의처럼 노동자들에게 경영참여를 허용해 이들이 재벌의 전횡을 견제하는 '진보적'이고 '민중적'인 재벌개혁은 무시당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김대중 정부는 빠른 시간에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 아래, 시장만능의 미국식 신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그 반대급부로 '헬조선'의 여러 문제점을 배태시켰다.

▲ 노무현 정부의 노동법 개악으로 인해 생겨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영화 <카트> 포스터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영화 <카트>의 원인이 된 노동법 개악 등이 보여주듯이, 이 같은 신자유주의의 기조는 노무현 정부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긴 말이 필요 없이, 2017년 대선 당시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 더불어민주당 핵심들의 고백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은 "참여정부는 재벌개혁에 실패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킨 정부"라고, 박영선 의원은 "참여정부가 남긴 유산은 삼성공화국"이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노무현 정부가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인정"했다.

씁쓸한 심정으로 GM를 떠나려는데, 문득 박정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IMF 경제위기의 정치적인 부산물이 불행하게도 '박정희 향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대적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경제위기를 야기하고, 이후 집권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말로는 '서민과 중산층의 정부'를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서민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가 생겨난 것이다.

이는 1997년 대선에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 후보를 찍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10년 뒤인 2007년 대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보수 후보인 이명박을 찍은 것이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고노동자의 상징이 된 김진숙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복직을 촉구하는 펼침막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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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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