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디지털 성범죄가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인데 반해, 한국 정부와 사법부의 인식이 안일하다는 국제인권단체의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한국이 "급속한 경제 성장과 기술적 발전에 비해 성평등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16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와 기업이 인권 중심적인 보호장치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술적 혁신이 어떻게 젠더폭력을 조장하는지를 보여준다"면서 이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휴먼라이츠워치가 2019년 11월부터 2020년 1월까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포함해 수사관, 정부 관료 및 전문가 등 38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국제인권단체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직접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고서의 제목인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는 2018년 혜화역의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에서 따왔다고 전했다.
이날 보고서를 발표한 헤더 바 휴먼라이츠워치 여성권리국 임시 공동디렉터는 "디지털 성범죄는 전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문제"라면서, 한국의 사례를 주목한 이유로 "불행히도 한국은 해당 분야의 선두 자리에 있다. 한국은 디지털 성범죄가 비교적 일찍 대두됐다. 다른 국가들이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가 어떻게 진화하는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바 디렉터는 특히 "화장실이나 탈의실에 설치된 불법 카메라는 다른 국가에는 흔치 않다. 또 이렇게 촬영된 이미지들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한국의 사례에 집중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한국 정부와 사법부가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설립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만족도가 높고 디지털 성범죄를 고민하는 다른 국가들이 참고할 만한 모델"이라면서도 "서울에만 있고 직원 상당수가 임시직이어서 전문성을 가지기 어렵"고 "촬영물 삭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등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낮은 기소율과 가벼운 처벌을 우려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살인, 강도 등 다른 형사사건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후 양형기준이 만들어졌지만 "판사의 재량을 막을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했다.
보고서는 한 피해자의 말을 인용하며 사법부의 이러한 태도가 "유죄가 확정되더라도 대부분 가해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이 지나치게 낮아 생존자들이 신고를 포기하게 만들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이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이러한 인식의 배경으로 "한국의 성 불평등"을 지목하며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일부 남성들이 촬영물 속 당사자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개의치 않고 불법 촬영물의 유포와 소비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으로 간주한다는 말을 인터뷰 참가자들에게서 많이 들었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이어 "가해자부터 경찰과 검사, 판사, 입법가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유발하는 피해의 정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사에 참여한 한 기자가 인터뷰에서 "남자들은 그것이 여자들에게 그렇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누가 자살했다는 말을 들으면 운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런 걸로 왜 죽어?'라고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법적 대응을 하는 피해자들은 그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힌다.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대부분이 남성인 경찰이 이 범죄의 심각성과 영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한 피해자는 '신체 접촉이 없다는 이유로 카메라로 자행한 범죄를 가볍게 생각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사법관계자들 자체가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신뢰를 크게 훼손한다. 남성 검사, 남성 판사, 남성 경찰, 남성 교사가 디지털 성범죄로 붙잡혔다"고도 덧붙였다.
보고서는 디지털 성범죄 특성상 "촬영물을 완전히 삭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한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며 "불법촬영물이 한 번 유포되면 통제 불가능하게 확산할 수 있다. 웹사이트에서 사진을 삭제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본 누군가가 화면을 캡처해 언제든 다른 웹사이트에 올릴 수 있다. 피해자가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이유"라고 했다.
보고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이것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직장 동료로부터 불법촬영 피해를 겪고 세상을 떠난 한 피해자의 사례를 들며, 피해자 아버지가 "딸이 '누가 봤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다. 그 남자(가해자)가 유포하지는 않았어도 친구들한테 보여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이 한 게 아니라 더 그랬던 거 같다"고 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보고서는 "피해자는 자신이 직접 증거를 수집하고 자신의 촬영물이 인터넷에 새로 올라오는지를 감시한다"며 "그 폭력 상황에 계속 노출되면서 트라우마가 악화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러한 피해가 피해자 개인에게 끝나지 않고 "사회적 낙인으로 이어지며 이로 인해 피해자가 대인관계와 교육, 고용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면서 무단 유포된 촬영물에 "촬영에 동의했거나 성행위에 동조하는 모습이 보여진 경우"를 들었다.
보고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경찰 등 사법 관계자들을 상대하면서 2차 피해를 경험"한다고 했다. 2차 피해에는 피해자를 탓하는 말이나 성희롱도 있지만 "피해자가 직접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 점, 증거로 수집된 촬영물을 소홀히 대하는 태도" 등도 지적했다.
피해자가 "증거물로 제출한 촬영물이 경찰 등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서 보여지는 것에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다"는 점도 강조했다.
보고서는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가 단지 피해자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했다. 보고서는 "디지털 성범죄의 만연함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면서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 범죄의 대상이 된 적 없는 여성들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 "가장 흔한 경우는 전 애인이 성적 촬영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나아가 "화장실 등에서 촬영하는 무작위 범죄로 인한 문제로 많은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큰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에서 가장 중요하게 바진 부분은 불법 촬영물의 소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뿌리 깊은 성불평등을 바꾸는 등 이러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한국 정부가 "경찰 및 법조계, 정치적 대표성, 공적 생활, 민간부문에서 특히 고위직에서의 여성 참여를 높이고, 성별 임금격차를 철폐하고, 돌봄 노동에서 평등한 참여를 증진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괴롭힘을 최소화하고, 성차별적 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조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성불평등 수준을 낮춰야 한다"면서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 정부와 국회, 경찰과 검찰 및 법원에 권고안을 전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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