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하는가? 당신은 왜 오늘도 회사에 출근하는가? 이제 ‘일을 통한 자아실현’ 따위의 한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 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출근하는가. 모두가 주식과 부동산, 가상화폐에 파묻힌 지금, 일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 자가 있다면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취급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자라면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대기업 교세라의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가 쓴 <왜 일하는가 : 지금 당신이 가장 뜨겁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이나모리 가즈오, 다산북스 펴냄)를 읽었다. 이 책은 사실 제목과 달리 ‘왜 일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보다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저자는 ‘삶의 의미는 일을 열심히 하는 데 있으므로 일을 열심히 하는 삶이 곧 성공한 삶’이라고 동어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책의 중심 주제는 목차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음가짐부터 바꿔라, 제품을 끌어안고 잠들 만큼의 애정으로, 일을 통해 화를 다스린다, 꼭 이루겠다고 간절히 마음먹어라, 하지 않을 뿐 못할 일은 없다, 99퍼센트도 부족하다, 최고가 아닌 완벽을 꿈꿔라” 등.
저자의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면, 그것은 일개 사원이었던 그가, 자신의 손으로 거대 기업을 일구어 기업가로 성공한 이력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의 삶으로 노동관을 현실에서 증명했을 때, 그의 주장은 허투루 들리지 않게 된다. 한국 사례로 따지면, 현대그룹을 설립한 고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읽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아실현으로써의 일?
그는 “노동의 진짜 의미는 자기가 맡은 일을 달성하고 실적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왜 일하는가> p. 45). 일을 잘하는 것이 우리가 배워왔던 ‘자아실현’과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말과 달리 현실에서 우리에게 노동은, 타율적이고 반복적이어서 견뎌야 할 무엇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기주도적으로 열정적인 노동을 하는 근로자가 없지는 않지만, 많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이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지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노동자인 나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노동 자체가 갖는 문제인가. 이에, 미국의 사회행동학 교수인 배리 슈워츠는 <우리는 왜 일하는가 : 오너와 직원 모두에게 필요한 질문>(배리 슈워츠, 문학동네 펴냄)에서, 일을 통한 자아실현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실패하는 이유는 단지 노동자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삶을 위한 ‘좋은 노동’이 실패하는 데엔 노동을 둘러싼 조건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으며, 일을 둘러싼 의미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소개한 사례를 보자.
'역겨운 밥벌이'에 의미를 불어넣는 법
대학 기부금을 독촉하는 전화 상담원 일을 하는 것은 구걸과 같이 역겨운 밥벌이로 흔히 여겨진다. 익명의 졸업생에게 전화해 뜬금없이 ‘돈을 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 그 권유 전화의 성공률은 극히 낮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하는 자의 자존감과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우리가 평소에 받는 텔레마케팅 수신 전화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생각해보자). 그런데, 책에서 전화 상담원 노동자에게 작은 동기를 심어주게 되었을 때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모두가 싫어하는 일에 대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상담원이 힘들게 조성한 ‘기부금 덕분에 인생이 바뀌게 된’ 장학금 수혜자 학생들이 직접 상담원을 만나, 당신의 전화 권유 결과 장학금을 받게 되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를 경험한 전화 상담원들의 일하는 태도는 즉시 달라졌다. 장학금 수혜 학생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상담원 그룹과 비교해서 그 이야기를 들은 그룹은 시간당 더 많은 횟수로 전화를 걸었고, 기부금도 훨씬 더 많이 얻어냈다고 한다. 그들이 다른 상담원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사례는, 일에 대해 우리가 의미와 목적의식을 갖는 것이 일에서의 만족감과 결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시사한다.
나아가, 저자는 의사, 변호사, 교육가,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이 일의 의미를 더 쉽게 발견할 수는 있지만, 건물 관리인, 공장 노동자, 미용사, 전화 상담원도 똑같이 그 의미와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하는 방식에서 노동자가 재량권을 갖고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며, 오히려 경영자가 제시하는 인센티브나 업무 매뉴얼은 일의 만족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을 인센티브나 매뉴얼로 통제하는 데에서 일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일의 만족감을 없애고 노동자를 타성에 젖게 만든다. 이러한 주장이,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기업 조직에 들어맞는지는 쉽게 판단하지 못하겠다. 오로지 노동자의 자율성만을 극대화시키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전혀 묻지 않는다면, 관료 조직에선 이른바 ‘프리 라이더’가 양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끈기 있는 주장은, 인간이 원래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한다는 ‘성악설’을 배척하고, 미완성 동물로서 인간은 사회 제도에 따라 그 본성 역시 발명될 수 있다는 ‘성선설’로 이어진다. 결국, 일을 다르게 조직하면 근로자들이 자신의 일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고 회사의 수익도 개선된다는 것이다.
‘왜 일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답
비슷한 제목을 갖는 두 책은 상이한 관점에서 쓰여 있다. 경영의 신이 쓴 <왜 일하는가>는 한 때 노동자였지만 이제는 성공한 기업가가 후배 노동자들에게 잠언을 들려주고 있다면, 사회학자의 <우리는 왜 일하는가>는 공동체에서 일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구성원 모두를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 경영의 신은 ‘힘들고 어려워도 일은 꾹 참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회학자는 ‘일은 처음부터 자기실현의 싹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선한 마음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일하는가, 정해진 답은 없다. 다만, 우리가 오직 돈 때문에 일한다는 답을 스스로 한다면 이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급여가 없다면 당연히 우리는 일을 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그 사람은 돈 때문에 거기에 다녀'라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그냥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왜 일하는가>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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