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검찰이 세브란스병원과 청소용역업체 관계자들을 부동노동행위 혐의로 기소했다. 노조파괴 피해를 입은 청소노동자들이 병원과 업체를 고소한지 4년 8개월 만이었다. 지난 4월 열린 첫 재판에서는 병원 직원이 부당노동행위 공모 혐의를 인정하기도 했다.
지난 5월 청소노동자들은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에 진정성 있는 사과와 관련자 징계, 피해회복 조치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세브란스병원 로비 등에서 같은 내용의 피켓 선전전을 하고 있다. 학교와 병원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이 가입한 노동조합인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는 "노동3권이 가장 절실했던 밑바닥 노동자들의 노조를 파괴하는데 불과 한달이 걸렸다"며 "그러나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는 절차가 시작되는데만 5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피해회복은 멀기만 하다"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서울지부가 <프레시안>에 5년 전 세브란스병원에서 일어난 노조파괴, 재발과 피해 회복을 막기 위해 필요한 일 등을 주제로 한 다섯 편의 연속기고를 보내왔다.
사회학 수업시간에 활기차게 강의하시던 모습이 어제 같은데 연세대 총장을 마치시고 이제 명예교수가 되셨다니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희는 지난 2017년 4월 8일, 연세대학교 창립 132주년 기념식에서 업무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했고, 이번에 벌금형 선고를 받은 제자들입니다.
선생님이 직접 번역하시고 수업시간에 추천해주셔서 읽게 된 알렉스 캘리니코스(영국에서 활동한 짐바브웨 태생의 마르크스주의, 반자본주의 이론가)의 책 <역사와 행위>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같은 언어와 종교, 역사를 공유하기에, 폴란드 노동자들은 군대가 절대 자신들에게 발포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들보다 후대의 사람인 우리는 폴란드인들만큼 순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직장인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인 토요일 아침에 학교로 가면서, 우리는 학교가 이미 다른 노동자들에게 했듯이 서슴없이 법적조치를 취할 것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돈도 나오지 않고 명예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기에 갔을까요?
노조파괴 규탄한 동문과 노동자, 고소한 연세대
2017년 6월 9일에 이한열 열사 30주기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공공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이한열 정신에 연세인이 생각하고 되뇌어야 할 산 교훈이 담겨 있다."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고자,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저희는 그곳에 가서 섰습니다.
2016년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했다가 대부분 탈퇴 혹은 퇴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직후 복수노조인 한국노총 철도사회산업노동조합(철산노)이 다수노조가 되었습니다. 노조는 원하청이 공모한 탈퇴협박과 공작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병원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라며 부인했습니다.
문제는 노조파괴 공작에 병원이 직접 개입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세브란스병원의 업무일지에는 "민노, 한노, 비노 인원현황 상세 데이터로 주세요", "주말, 휴일 민노 조합원 동향파악 집중 부탁드립니다", "사무부장님도 지시하신 '민노 불법행위 조치 방안' 신속히 보고바람." 등 노조파괴 공모의 기록이 빼곡했습니다.
예컨대 2016년 9월에 공공운수노조 상근자들은 한국노총 신촌연세노동조합에 방문하여 "회사가 준용하고 있다는 단체협약 열람 및 제공"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신촌연세노조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이유 없이 열람을 거부했고 태가비엠 직원, 병원 사무팀과 보안요원이 와서 퇴거를 요구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업무일지에는 "한노 집행부 방문 소란 등은 철산노(철도사회산업노조) 위원장에게 실시간 전달하여 노노대응 유도바랍니다."라고 적혀있고 "명심하겠습니다"라는 용역업체 현장소장의 답변도 있습니다. 바로 현장에는 철도사회산업노조의 유인물이 나붙었습니다.
그래서 창립기념식 날 우리는 세브란스병원과 학교가 책임지고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100주년 기념관 앞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총장님과 참석하신 분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경비원에게 가로막혔지만, 좋습니다. 그것이 문제라면 저희는 기꺼이 그에 대해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런데 그 3시간의 "소란행위"에 대해 저희가 책임을 져야한다면, 학교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요? 경비원을 동원한 미행, 감시에서 업무일지를 통한 지시에 이르기까지 명명백백한 증거가 있고 이제 검찰기소까지 된 노조파괴 공작에 대해 학교는 과연 무슨 책임을 졌습니까? 이를 결정하고 집행한 사람 중 단 한 명이라도 징계나 처벌을 받았습니까? 노동자에게 한번이라도 사과를 했습니까? 오히려 노동자들이 무더기 가처분과 고소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적반하장에 후안무치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단결권 짓밟으면서 '이한열 정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총장으로 계실 당시 '이한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설립하는 등 민주화운동 기념에 적극적이셨다 들었습니다. 재학생, 동문들과 함께 영화 <1987> 공동체관람을 하셨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30년 전에 학교가 학생들보다 권력에게 좀 더 굽힘 없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오늘날의 이 '기념'이 훨씬 떳떳하지 않았을까요? 30년 전의 시위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눈 앞의 항의시위는 '미신고집회'로 고소하는 것은 또 무슨 이율배반인가요? 헌법상 기본권인 비정규노동자의 단결권을 짓밟으면서 도대체 열사의 무엇을 기념한단 말입니까?
이제 임기도 끝났으니 다 지난 일이라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고통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5년 전의 노조파괴는 세브란스병원 사무국장이 제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는 범죄가 아닙니다. 당시 총장께서 바로 옆 세브란스병원에서 일어난 노조파괴를 알고도 덮어두셨다면 심각한 문제이고, 모르셨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당시 학교의 최고책임자로써 지금이라도 입을 열어주시길 바래봅니다. 그래서 무례한 제자들을 처벌하는 일에 앞서 '가장 작은 자'들의 인권까지 보장하고자 살피는 것이 바로 '이한열 정신'임을 보여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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