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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전권 없는 주권국가? '비정상의 정상화'는 대체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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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전권 없는 주권국가? '비정상의 정상화'는 대체 언제…

[손호철의 발자국] 32. 대전 : '한국=미국의 식민지론'의 출발점

- 학생, 왜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하지요?

= 미국의 군사적 강점 하에서 탄생했으니까요.

- 그럼 소련의 군사적 강점 하에 탄생한 북한도 소련의 식민지겠네요?

= 아~ 그러네요. 그래도 외국군이 없는 북한과 달리 우리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잖아요.

- 주한미군 때문에 우리가 식민지라면, 미군이 주둔하는 일본과 독일도 식민지겠네요?

= 아~ 그렇긴 한데, 우리는 미국이 군 작전권을 쥐고 있잖아요.

- 맞는 이야기입니다. 군 작전권은 주권의 가장 중요한 지표이고 이 점에서 군 작전권을 미국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주권 침해입니다. 아마 우리처럼 군 작전권을 외국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기 때문에, 이 같은 정치군사적 종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식민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식민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잘못이지요.

= 교수님, 왜 그렇지요?

- 군 작전권이 미국에 속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거세하고 이를 기준으로 식민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지나치게 군사주의적 발상이니까요. 우리는 1994년 평시작전권을 인수받았고 전시작전권만 미국이 갖고 있는데, 평시에는 식민지가 아니고, 전시에만 식민지가 되는 것인가요? 그리고 전시 작전권도 이제 돌려받으려 하고 있는데, 그럼 이젠 식민지가 끝나는 것인가요?

=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체사상파 등을 중심으로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 강했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주사파 학생들과 가졌던 나의 한국정치 수업 시간 대화의 한 부분이다(나는 수업시간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즐겨 이용한다).

이제는 상당히 약화됐지만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이고, 이 같은 상태로부터 해방을 이루기 위한 반미투쟁이 가장 중요하다는, 소위 '자주파' 내지 '민족해방파(NL)'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이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논거는 위에서 소개한 세 가지(군사적 강점하의 국가 탄생, 주한미군 주둔, 군 작전권)인데, 그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 군 작전권이다.

대전의 중심가인 중구 대전중고등학교 뒤편 언덕에는 작은 단층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테미오래'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바뀐 이곳은 원래 충남도지사 공관이었다. 그 앞에 서자, 위에서 소개한 미국의 식민지 논쟁이 생각났다. 바로 이곳이 국군 작전권을 미국에 인도한 대전협정이 체결된 것으로 알려진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 이승만이 국군 작전권을 미국에 양도한 역사의 현장인 옛 충남도지사 공관 ⓒ손호철

1950년 6월 25일 삼팔선을 넘은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기 시작하자, 허둥지둥 이곳 대전으로 도망 온 이승만은 이곳을 임시공관, 즉 '대전경무대'로 삼았다. 그는 이곳에 여장을 풀자마자 논쟁이 되는 '서울시민들은 안심하라'는 안심 방송을 했고, 북한군이 빠른 속도로 남하하자 며칠 뒤 목포를 거쳐 7월 1일 부산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6월 30일 미국의 참전 결정, 7월 1일 미지상군 도착, 7월 5일 미군의 첫 전투 등과 관련해, 대전에 남아있던 외무부 장관과 무초 주한 미국대사가 7월 12일 대전경무대에서 대전협정이라고 부르는 '재한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미군의 재판권은 전적으로 미국에 속한다는 굴욕적인 내용이지만 군작전권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 옛 공관에 부착되어 있는 대전협정 관련 설명 ⓒ손호철

그러면 대전협정과 군작전권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부산으로 후퇴한 이승만은 7월 초 대구로 이동했고 7월 13일 도쿄의 미8군사령부가 대구로 옮겨왔다. 그러나 14일 대전이 무너지며, 우리 육군본부도 대구로 후퇴했다. "현재의 전쟁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한국군에 대한 일체의 지휘권을 귀하에게 이양한다." 이승만은 악화되는 전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14일 다급하게 동경에 있던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맥아더가 7월 16일 이를 수락함으로써 한국전쟁이 터진 뒤 21일 만에 우리군 지휘권이 미국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군은 미군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지휘를 받게 됐다.

따라서 엄밀히 이야기 하면, 대전협정은 군작전권 양도에 대한 것이 아니며 이 협정 체결 당시 이승만은 대전에 없었다(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 있는 대전협정 설명조차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경무대에서 7월 12일 (…) '대전협정'을 체결했다'고 잘못 써 놓았다). 또 군작전권 양도는 '대전협정'이 아니라 '대구협정'이라고 불러야 한다. 하지만 대전협정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일상적으로 '대전협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한국군이 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은 평시작전권의 경우 무려 40여 년간 94년까지 계속됐고, 전시작전권의 경우 7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국군 작전권은 대전협정 이후 16개국이 참전하면서 유엔군사령부가 설립되어 미군 사령관이 겸임하는 유엔군사령관이 모든 참전국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며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위임됐다(주한 유엔군사령부는 아직도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조차 2020년 한 인터뷰에서 "주한 유엔군사령부는 족보가 없다. 유엔에서 예산을 대준 것도 아니고 그냥 주한미군에 외피를 입힌 것일 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유명무실하다).

▲ 왼쪽에 있는 것이 대전협정의 사본으로 옛 공관에 진열되어 있다. ⓒ손호철
▲ 맥아더가 대전협정에 의해 국군 작전권을 가지게 된 워커 중장을 유엔군사령관으로 임영하는 사진이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작전권 문제는 특히 1980년 광주학살과 관련해, 공수부대의 광주 투입이 군 작전권을 가진 미국의 책임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며 반미운동을 불러 일으켰다('손호철의 발자국' 14. 부산미문화원, <프레시안> 2021년 4월 7일자 참조). 결국 한미 양국 모두 이 문제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해, 김영삼 대통령 때인 1992년 평시작전권은 돌려받기로 합의하여 1994년 환수했다. 전시작전권은 북핵 문제와 관련해 2005년 이후 논의하기로 양국이 합의했다.

2003년에 집권해 임기 중 전시작전권을 환수해야 했던 노무현 정부는 환수 시기를 임기 후인 2012년으로 미뤘고,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이를 다시 2015년으로 미뤘다. 박근혜 정부는 아예 시기를 명시하지 않고 '한국군의 능력과 주변 안보환경 등 조건이 충족되면 그 때 환수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 모든 정권이 보수 세력의 반발 등을 의식해 자기 임기 내에 환수 받지 않으려고 '공 돌리기', 아니 '뜨거운 감자 돌리기'를 해 온 것이다. 촛불의 힘으로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국군의 날에 이를 조기 환수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별 진전이 없다.

테미오래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대전협정의 사본, 그리고 가까운 대전근현대사전시관(옛 충남도청 본관)에 전시되어 있는 대전협정 관련 자료들을 보고 있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국전쟁 중에는 급박한 전시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양해를 해준다 하더라도, 이 같은 '비정상적'인 상태가 수십 년씩 계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며 주권국가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대전협정은 군 작전권 이외에도 주한미군의 지위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소개할 경기도 '양주의 효순‧미선 평화공원' 참조).

▲ 전쟁기념관에는 대전협정을 비롯한 한미 군사동맹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손호철
▲ 한국전쟁 직후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이승만의 탁월한 외교 정책의 성공으로 설명한 전쟁기념관의 전시물 ⓒ손호철

해방 후 한반도의 신탁통치와 분단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나올 '미군정' 참조). 그리고 해방 후 지금까지 미국은 우리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왔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존재와 군 작전권 문제가 잘 보여주듯이, 우리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의 주장과 달리, 5‧16쿠데타, 박정희 사살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모두 미국의 공작은 아니다. 또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는 아니며 우리의 문제를 모두 미국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군 작전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한, 그 같은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대전을 떠나며 빌었다. 우리가 '군 작전권 없는 기이한 주권국가'라는 '비정상의 상태'를 빨리 벗어나기를, 나아가 남북문제 등이 해결되어 '외국군 없는 한반도'가 실현되기를. (사실 주한미군은 이제 대북 견제보다는 중국 견제에 주된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남북관계가 좋아진다고 주한미군 철수를 낙관하기는 어려운 것이 안타깝지만 우리의 현실이다. 나아가 우리가 '한반도 영세중립화'와 같은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는 한, 설사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간의 '안보지상주의'는 심해지면 심해졌지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보다 수십 배 강한 중국과 러시아군과 국경을 마주하고 대치해야하기 때문이다.)

▲ 한 진보정당이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주한미군 철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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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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