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고안한 ‘욕망하는 기계’라는 담론을 참조하여 기본소득을 설명하려 한다. ‘차이와 생성, 접속과 배치’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등 철학사의 비주류적 계보를 탐색하고 발굴하며 그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사상가다. 들뢰즈가 창안한 접속 안에서 a와 b가 만나면 c가 된다. 이를테면 입이 식도를 만나면 먹는 기계가 되고, 입이 기도를 만나면 호흡하는 기계가 되고, 입이 악기를 만나면 노래하는 기계가 된다고 제시하듯이, 기본소득은 코로나 19를 극복하려는 국민과 만나면 적지 않은 생활의 보탬이 되는 살림 기계가 되었고, 전통시장과 동네 상권을 만나면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는 유효수요 창출(지역경제 활성화) 기계가 되었으며, 몫 없는 이들을 만나면 몫이 되어주고 삶의 마중물이 되는 생명 기계가 되었다. 매점 기본소득(매주 2천 원)이 충북 보은군 판동초등학생을 만나면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와 진정한 민주주의 실험의 場을 제공하는 민주주의교육 기계가 되었다. 또 기본소득이 충남 보령시의 장고도 팔순 어르신을 만나면 노후불안이나 돈 걱정 없이 살아가는 주민연금기계가 되었다.
기본소득이 노동자들과 만나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더 많은 직업훈련이나 교육을 받도록 하는 배움의 기계가 될 것이다. 자기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더 많은 시간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자아실현 기계가 되기도 하고,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일자리 창출 기계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접속은 욕망의 생산이고, 새로운 생성을 낳고 하나의 유기체라는 점에서 기본소득은 욕망하는 기계다. 그 이유는 기본소득이 무조건 주어지는 소득이기에 만인에게 새 출발을 하거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게 할 수 있는 욕망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한낱 소득의 맨 밑바닥이 될 뿐 그 위에 다른 원천들로부터 벌어들인 소득을 쌓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욕망하는 기계다. 개개인이 정말로 좋아하고, 자기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촉진할 기회가 언제나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욕망하는 기계다.
질 들뢰즈는 이러한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배치는 사건이다. 사건은 구조적으로 선들로 구성되었고, 생성론적으로 속도들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강의는 강사·학생들의 선, 칠판·백묵·지우개 등의 여러 선으로 되어있고, 강사의 강의속도, 학생들의 반응속도 등 다양한 속도들로 구성된다고 제시하듯이, 기본소득정책은 정부, 국민, 여당과 야당, 대통령의 의지 등의 선과, 사회적 양극화, 인공지능과 4차산업, 재원 마련방안, 토지 그 자체·천연자원·자연환경·빅데이터와 같은 공통부(Commons) 등의 선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다양한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소득의 현실성과 급박성에 대한 국민적 수용성, 재원 마련의 안정성과 충분성, 공평성에 대한 속도, 기본소득 지급액의 적정한 수준 여부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속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소득정책은 이러한 선과 속도들이 상호작용하고 뒤섞이며 빚어내어 새로운 사회문제의 사회정책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구조와 생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건들이 배치이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욕망하는 기계이다. 질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한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기본소득은 세계를 지배하는 범역적 자본주의 경제 질서와 사회 불평등을 뛰어넘으려는 욕망과 그 움직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사회적 양극화로 공존적 삶이 해체된 지금과 다른 삶, 경쟁과 효율성을 우선하는 지금과 다른 존재 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바깥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의 탈영토화, 탈 주선을 기본소득 민주주의로 기호화하자고 제안한다. 대한민국은 “스키타이 전사들이 창을 버리고 예전처럼 채찍을 들고 달려들자 모두 식겁해 도망쳐버리는 스키타이 전사들의 노예반란 이야기”처럼, 그리고 “플라톤이 비유한 동굴 속 죄수와 같이 벽에 비치는 동굴의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사는 죄수처럼 언제까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길들여 남으려 하는가?.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 달러 이상이자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30-50 클럽’에 세계 7번째 이름을 올린, 세계 10위권의 경제국이 아닌가!.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미국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응석받이 노릇을 하려는가? 대한민국은 지난 100년 동안 1919년 3·1혁명, 4·19 시민혁명,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2017년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주체적으로 시민혁명의 민주주의 새 역사를 만들지 않았는가! 이제는 더 이상 미국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서유럽 복지국가 모델에서 그 의미를 모방하거나 해석하지 말고 대한민국 만의 고유한 실험을 해라!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영토성, 대한민국의 탈영토화, 대한민국의 체제, 대한민국의 도주 선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기본소득이다.
압축적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신화, 장시간 노동과 열정페이, 운동권과 민주화 등의 과거와 기억에 얽매이지 말아라! 미국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서유럽 복지국가 모델에서 찾지 말고 대한민국 자신을 기호화하라!. 이것이 바로 기본소득 민주주의다. 보편적 인류애와 더불어 만인에게 실질적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고, 각자의 덕성과 재능이 온전히 실현되는 모두를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기본소득 민주주의이다. 왜! 미국과 중국의 한 점과 중심에 고착해 있으려 하는가? 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남북분단의 틀 안에 대한민국의 가능성, 대한민국의 꿈과 상상력, 대한민국의 잠재적 생성을 매장시키려 하는가? 그렇게 해봐야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한낱 여럿처럼 보이지만 하나뿐인 히드라와 메두사에 불과하다. 히드라는 머리가 아홉 개인 뱀으로 잘라도 죽지 않고 부분객체로 계속 증식한다. 메두사는 해파리의 일종으로 회춘과 노령화를 무한히 재생 반복하며 영생한다. 그러나 기본소득 민주주의는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갈 수 있다.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계적 질서, 중심화된 점에서 탈주하여 다양체 몸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양체 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기도가 쏘아 올린 기본소득 공론화위원회를 충분히 여론 수렴하고 검토하여 입법화해야 하고, 그 공론화 과정을 통해 결정된 기본소득정책은 범주별이거나 부분(소액의 1.3%)이라도 기본소득을 반드시 전방위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김상돈 고려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는 기본소득 국민운동 경기본부 상임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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