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가해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10살 정도 많았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나 집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편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가해자와 이성교제를 하고 싶은 것은 전혀 아니었는데, 갑자기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날 제가 고등학생인데 술도 마셨고, 거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저항을 못해서, 성폭행이라고 신고할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후 가해자가 용돈이라며 돈을 주거나 선물이라며 물건을 사주기도 했는데, 성관계도 요구하였습니다. 거절하지 못했는데, 무서워서였습니다. 가해자가 제 연락처나 이름, 얼굴 같은 걸 다 아는데 혹시라도 부모님이나 주변에서 알게 될까 봐 걱정됐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카카오톡 답장을 조금만 늦게 해도 "니네 집 근처 XX카페가 새로 문을 열었더라", "다음 주가 너희 학교 축제지?"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전부였지만 그럴 때마다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러다가 평소에 알고 지낸 남자애가 제가 원조교제를 하는 걸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만나 달라고 했고, 성관계를 요구했습니다. 이런 자리에 여러 번 불려 나가고 나서야 끝이 났는데, 그 애는 '말 안 들으면 다 까발릴 거야'라고 한 적은 없지만, 제가 연락을 피하면 '너를 좋아한다'라는 말과 함께 '다른 애들은 전혀 모르겠지?'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제게는 그 말이 '언제든 까발릴 수 있어'로 들렸습니다."
사례의 피해자에게 일어난 일은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였고, 그걸 가해자들이 몰랐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각 피해들이 현재 성범죄로서 각기 고소되었을 때 각기 강간죄로 인정되어 처벌되었을지는 세부적인 내용들과 입증에 따라 달라질 문제라고는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생긴 일이 성폭력임은 분명하다.
피해자가 최초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이후 3학년 시절에도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성폭력을, 피해자는 고소하지도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다. 피해자가 성인 가해자로부터 입은 최초의 성폭력 피해를 바로 고소했다면, 가해자가 처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그 가해자로부터 계속하여 원치 않는 성관계 요구를 받던 중에, 그 끝에라도 법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두 번째 또래 가해자로부터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쉽게 신고를 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피해가 누적되었다.
피해자로 하여금 이런 노력을 못하게 한 것은 '문란'이라는 낙인 때문이었다. 도움을 청했을 때 가족이나 학교에서 '문란한 여자아이',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아이'로 손가락질받을 것이 걱정되고, 또래 집단에서 사이버상의 조롱 대상이 되고 소외될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일은 상상만이 아니라 피해자가 주변에서,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접하는 사회 문화다. 그래서 위 사례의 피해자는 피해를 서둘러 말하지 못했고, 입었던 피해는 또 다른 약점이 되었고, 그러면서 피해가 더 누적됐다. 비단 위 피해자만이 아니라 연령이나 신분이 다른 많은 피해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공포다.
성범죄에 있어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억압하는 요인이 비단 물리적 유형력만은 아니다. 그런 요인의 해석에 있어서도 '피해자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은 강간죄에서의 폭행이나 협박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법기관이 협박으로 인정하는 해악의 고지는 '밤길 조심해라. 얼굴을 갈아버리겠다'거나 '말을 안 들으면 죽여버리겠다'라는 등 물리적인 해악이나 '거짓말을 폭로해서 망신을 주겠다'라는 등의 대사회적 해악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간 우리 법에서는 객관적으로 두려움을 느낄만한 해악의 고지를 요구한다고 표현해왔지만, 사실은 일반적인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두려움을 느낄만한 내용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당할 수 있다. 가령 'N번방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망설임이나 거부를 접하여 그저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고 있다는 간단한 표현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해자의 웬만한 요구에 무방비가 된다. 즉 피해자의 연령, 지위, 가해자와의 관계, 언동이 행해진 전반적 맥락 등을 종합하여 가해자의 언동이 피해자에게 의미하는 바를 평가하면 충분히 협박이 될 내용이, 현재 사법적 판단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이 충분히 고려되어 평가되지 않고 있다. 이는 강간죄나 강제추행죄만이 아니라, 업무상위력에 의한 간음이나 여타 디지털성범죄 등도 마찬가지다.
사례 피해자의 경우도 성인 가해자가 첫 번째 성폭력을 저지른 후 피해자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수단으로 피해자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음을 피력하였고, 또래 가해자 역시 피해자가 알려지길 원치 않는 지극히 사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가해자들 누구도 피해자에게 신상 정보나 사적인 비밀을 알고 있으니 이를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피해자에게는 이 같은 말이 엄청난 위협과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만약 피해자가 위와 같은 피해를 고소하게 되면 강간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현행법상으로는 실제 대화가,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이 위와 같은 정도라면 기소와 처벌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성인 가해자에게 당한 미성년 대상 성범죄라는 점에서 전체적인 대화의 맥락상 그 대화가 이루어진 상황 등이 좀 더 면밀하게 검토되고 그에 대한 판단을 달리 할 수 있다. 세부적인 대화의 내용에 따라서는 미성년자에 대한 성매매 혐의가 적용될 여지도 있다. 다만 피해가 너무 반복되다 보면 관계의 성격이 왜곡되기 쉬운 만큼, 이 사건처럼 피해가 종료된 후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가 이어지는 중에 하루라도 빨리 도움을 청하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유리했을 것이다.
한편 또래 가해자의 경우 단순하게 피해자가 치부로 여길만한 내용을 알고 있다고 피력하고 그런 즈음 성관계를 하자고 한 상황이라면, 처벌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전까지의 관계, 문제의 대화가 이루어진 상황이나 여타 다른 대화들의 양상, SNS 외에 직접적인 대화로 오고 간 내용들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다. 그러니 처벌이 안 될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요구해온 저항하기 어려웠을 수준의 폭행이나 협박은 피해자의 기준이 아니라 철저히 제3자의 기준이었다. 긴 시간 타인 기준에서 별것 아닌 말에 두려움을 느껴 저항하지 못한 피해는 범죄 피해로 인정받지 못했고, 알려졌으나 인정받지 못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는 나약하고 문란한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이 사건 피해자는 뭘 몰라서 도움을 못 청하였다기보다는, 뭘 좀 알다 보니 그러지 못하였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가 도움을 청하지 못한 선택이 순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는 무척 의문이다. 법원만의 노력으로, 사법기관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사회가 함께, 범죄의 수단이 되는 폭력과 협박의 외연을 넓혀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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