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1세에 미국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은 미국 역사상 최고령(78세)에 취임한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지만, 최연소 상원의원(31세)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바이든은 40년이 넘는 정치 경력만 보면 화려하지만 "정치 소매상(Retail Politician)", "엉클 조(Uncle Joe)"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대규모 유세장이나 TV 화면을 통해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나 언변은 없지만, 소규모 유세나 일대일 대면 접촉에서 유권자들에게 호감을 얻는 공감 능력은 탁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4월 28일(현지시간) 밤 9시 워싱턴D.C의 국회의사당에서 진행된 취임 후 첫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바이든은 이런 면모를 보여줬다. 원래 대통령 의회 연설은 백악관과 내각, 상하원 의원 전원이 참석해 '지정 생존자'를 지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문에 600명이 넘게 참석하던 청중 규모를 200명 선으로 줄였고, 때문에 '지정 생존자'도 따로 둘 필요가 없었다.
1년 넘게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지면서 57만 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 속에 진행되는 첫번째 대통령 의회 연설이기 때문에 과거처럼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참석자들의 언행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야당 의원이 대통령 연설 도중 "거짓말 한다"고 대놓고 비난을 하거나(오바마 대통령 시절), 하원 의장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뒤에서 박박 찢는(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돌출 행동이 이번엔 없었다. 트럼프 최측근인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등이 최대한 박수를 삼가고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정도가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크루즈 의원은 중간에 졸았다는 언론 보도도 있다.)
바이든은 이날 사전에 배포한 연설문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몰랐던' 전임 트럼프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연설문에서 벗어나 감정적으로 가장 고양됐던 대목은 40대의 젊은 나이에 뇌암으로 사망한 장남 보 바이든을 언급할 때 정도였다. 큰 아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바이든은 자신의 사연을 얘기한 뒤 "우리 중 상당수는 암으로 사망한 아들, 딸, 친척들을 두고 있다"며 "더 가치 있는 투자를 생각할 수 없다"고 암 종식을 목표로 삼아야한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레이건 유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민주당 내에서도 '중도진영'으로 분류되는 바이든은 이날 연설에서도 전혀 과격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연설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팬데믹으로 인한 보건 위기와 경제 위기, 전임인 트럼프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 등 '삼중의 위기'로 "불 타고 있던 미국"을 물려받았다. 바이든은 이날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MSNBC <모닝 조>를 진행하는 조 스카보로우는 "바이든이 전환기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며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이래로 이어져온 연방정부의 방향에 대한 재조정이 이뤄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작은 정부(정부의 역할이 작을 수록 좋다)'와 '경제적 낙수효과(경제 성장의 효과가 자연스럽게 저소득층에게도 돌아간다)'에 대한 교정을 바이든 정부가 시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날 연설에서 바이든은 "일자리"라는 단어를 43번이나 말했다고 한다. 그는 단순히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차원을 넘어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 일자리 계획'을 언급하며 자신의 구상이 "노동자들(blue color)을 위한 청사진(blueprint)"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일자리 계획의 90%는 대학 학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서 "월스트리트(금융업을 지칭)는 이 나라를 건설하지 않았다. 중산층이 이 나라를 건설했고, 노동조합이 중산층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핵심 지지층인 '러스트 벨트'(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오하이오 등 쇠락한 공업 지대)의 백인 노동자 계층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보여진다.
그는 이날 1.8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가족 계획'도 발표했다. '미국 가족 계획'은 3~4세 아동 유치원 무상교육, 커뮤니티 칼리지(한국의 전문대학에 해당) 2년간 무상 교육, 보육료 지원, 유급 육아휴직 확대, 건강보험료 인하, 아동 세액공제 확대 등이 주요 내용이다.
'월스트리트'가 아니라 '중산층 노동자'가 미국을 건설했다는 바이든
바이든은 이런 '일자리 계획'과 '가족 계획'에 필요한 4조 달러(4400조 원)의 재원의 상당 부분을 '부자 증세'로 충당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미국 정치에서 '증세'는 당장 유권자들의 반발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치인도 선뜻 내세우는 정책이 아니다. 바이든은 이날 연설에서 "연소득 40만 달러(약 4억4276만 원) 미만인 국민들에게 어떠한 증세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긋고 "이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가 공정한 조세 부담을 위해 협력에 나서야 하며 공정한 과세가 목적"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증세의 대상이 아니라 대기업들과 1% 부자들에게만 증세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당연히 이런 그의 구상은 공화당과 보수적인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보수 성향의 언론 <월스트리트 저널>은 29일 바이든의 자본이득세율 인상에 대해 "공화당 뿐 아니라 일부 민주당 의원도 납득시키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부자 증세'가 기업 활동을 제약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 위기 극복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공화당의 존 툰 상원의원은 바이든의 구상에 대해 "사회주의 비전"이라며 노골적으로 '색깔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공화당의 일부 의원들은 바이든의 연설이 사회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촉진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바이든의 의회 연설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라는 반응은 51%(CNN 조사)로 트럼프에 비해 소폭 하락해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의 여전한 입장 차이가 확인됐다. 그러나 그의 일자리 창출 계획에 대한 반응은 70% 이상이 찬성(같은 조사에서 경제 문제에 대한 찬성 입장이 72%)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CB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5%가 바이든의 일자리 계획에 대해 '좋다'고 답했다.
문제는 이날 제시한 정책 방향을 의회의 도움을 받아 얼마나 현실화시킬 수 있느냐다. 만만치 않은 재정이 소요되는 그의 구상은 상원에서 최종 통과돼야 하는데 상원의 공화당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이를 방해할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자리 창출과 보육-교육 정책들의 현실화는 단기간 완성할 수 있는 정책 과제가 아니다. 2022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져서 상원 다수당 지위를 공화당에 넘겨주게 될 경우 '물거품'이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바이든이 첫 의회 연설에서 노동자, 중산층을 겨냥한 발언에 집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도 굳건하게 뭉쳐 있는 트럼프 지지층이 쪼개져야 중간선거에서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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