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 원주 밝음 신협 2층으로 올라가면 한국 신용협동조합 운동과 '생명사상'의 선구자였던 무위당(無爲堂) 장일순(1928~1994)을 기리는 '무위당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 걸려있는 이 글씨는 예상 밖이었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진 그의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잘 쓴 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소 실망하며 이 글씨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난 뒤, 나는 존경심으로 무위당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렁이가 흙속을 파고 돌아다니며 옥토를 만들 듯이, 그가 주창한 '한살림 운동'도 우리의 땅과 우리 사회를 살리는 운동이 되라고 일부러 지렁이를 흉내 내서 삐뚤빼뚤하게 썼다고 한다.
"쥐를 위해서 밥을 언제나 남겨 놓는다. 모기가 불쌍해서 등에다가 불을 붙이지 않노라. 절로 푸른 풀이 돋아나니 계단을 함부로 딛지 않노라."
장일순 선생의 책을 읽으며 가장 충격을 받았던 글이다. 이 글은 장일순 본인의 글은 아니고 18세기에 활동했던 묵암선사의 시 '爲鼠常留飯(위서상류반) / 燐蛾不點燈(연아불점등) / 自從靑草出(자종청초출) / 便不下堦行(편불하계행)'을 번역해서 소개한 것이다. 생명사상의 선구자답게, 그는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생명이 한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해월 선생님의 말씀 중에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려면 우주 전체가 참여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어. 우주 만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질 수 없다 이거야."
"사람도 마찬가지야… 나, 이거 하나 있기 위해 태양과 물, 나무와 풀 한 포기까지, 이 지구 아니 우주 전체가 있어야 돼… 그러니 그대와 내가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가. 사람은 물론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까지도 위대한 한울님인 거지."
"나락 한 알 속에도, 아주 작다고 생각하는 머리칼 하나 속에도 우주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만물과 나는 하나의 몸이며, 천지와 나는 하나의 뿌리로부터 왔도다."
노자와 해월 최시형의 생각에 기반해 장일순은 유신 시대인 1970년대에 이미 이 같은 혁명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전통적인 운동가', '전통적인 민주투사'였다.
원주 출신인 그는 일제 말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서울공대의 전신인 서울공전에 입학했다. 해방이 되자 시작된 미군정은 경성제대 이외에도 서울공전 등 여러 전문대를 모아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를 만들고 미군장교가 총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립서울대 설립안(이른 바 '국대안')을 내놓았다. 장일순은 이에 반대하다가 제적됐다. 그는 제적 후 원주에서 혼자 공부를 했는데, 집 근처 천도교 포교당에서 친구 오창세(한국전쟁 초, 보도연맹으로 사살됐다)를 통해 동학에 대해 배우면서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에 심취하게 됐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에 이어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동학을 대중적인 종교로 포교한 사람이다. 그는 '한울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발전시켜 '우주는 하나의 기운덩어리'라는 한생명 사상에 도달했고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며, 만물을 공경하라'는 '삼경(三敬) 사상'을 설교했다. 최제우의 '인간 중심성'을 넘어서 우주와 만물로 나간 것이다.
해월의 이 같은 사상은 이후 장일순의 한살림 운동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 해월은 원주 근처에 숨어있다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는데, 장일순은 그의 피체지에 세워진 추모비에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를 기리며'라는 추모 글을 남겼다('최보따리'는 최시형이 30년 간 간단한 보따리 차림으로 포교를 다녀 생긴 별명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서 하는 것이 없음(무위)에 이르러야 한다. 하는 것이 없어야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천하를 취하려는 자는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은 노자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이야기한 '무위(無爲)' 사상에 매료되어 그는 자신의 호를 '무위당'으로 정했다. 노자는 말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上善若水)." 물은 공평하고, 변화무쌍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으며, 세상을 깨끗하게 해주고, 항상 낮을 곳을 향한다. 그는 1991년 위암이 발견되어 죽어가면서도 이현주 목사와의 대담을 통해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라는 책을 남겼다.
장일순은 해월을 통해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상을 갖게 됐지만, 곧바로 생명운동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주변의 권유로 다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그만둔 뒤, 중고등학교를 세워 교육 운동에 뛰어들었다. "내 등록금으로 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
4‧19 학생 혁명 이후 사회대중당이란 진보정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방했고, 남북한영세중립화를 통한 통일운동을 하다가 5‧16 쿠데타가 나자 투옥됐다. 그는 3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원주에 머물며 붓글씨를 쓰고 난초를 그리며 자기수양을 했다. 그는 평생 수많은 난초를 그려 선물했는데, 선물 받을 사람의 얼굴을 닮게 그려 '얼굴난초'로 유명하다. "나의 난초는 박정희에서 유래한다.", "난초를 통해 박정희를 용서했다." 난초에 대한 그의 회고다.
1965년 그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를 만나 깊은 우정을 쌓아갔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했다. 1970년 들어 박정희의 장기 집권이 본격화되면서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은 김지하 등 주변 사람들을 모아 이른바 '원주캠프'를 만들어 민주화운동을 이끌어갔다. 그 투쟁 속에서 지 주교가 투옥되고 이에 저항해 정의구현사제단이 탄생했다. 장일순의 수제자 격인 김지하도 투옥되어 오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지금까지의 운동으로는 안 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마르크스 패러다임이랄까, 착취/피착취의 논리에 의해 전개되는 운동에서 생명공동체 운동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유신 말기인 1977년, 장일순은 그동안 생각해온 생명사상에 대한 혁명적인 깨우침을 갖고 생명사상에 대한 소규모 공부모임을 만들었다. 10여 년의 공부와 모색 끝에 1989년 '한살림 선언'을 발표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벌레도 나무도 다 한살림이다."
그는 도시와 농촌을,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의 '사회적 기업' 운동을 선구적으로 펴나갔다. 요즘 오만한 행동으로 비판을 받는 소위 '싸가지 진보'와 달리, 그는 사람을 모아 일을 하려면 겸손해야 한다며 '기어라, 모셔라, 함께하라'는 것을 운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말년에 언제 생길지 모르는 오만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자신의 호를 '하나의 좁쌀'이라는 뜻의 '일속자(一束子)'로 바꿨다. "장일순 선생님은 '전두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다른 가르침은 다 수긍을 해도 이 말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제자는 회상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전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가장 독창적인 사상이며 시대를 앞서간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개별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서구식 근대주의의 '존재론'을 넘어서 불교의 '연기론'처럼 모든 것을 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오랜 동양의 사상에 기초한 '포스트근대주의'의 '관계론'적인 사상으로 나간 것이다.
물론 그의 생명사상은 수제자인 김지하 시인이 1991년 노태우 정권의 공안 탄압에 대해 열사들이 분신으로 맞서던 분신 정국에서 독재 정권의 반생명적 공안 정책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나타난 운동권의 분신을 질타한,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는 '얼치기 생명사상'으로 이탈하는 비극, 아니 어떤 면에서는 '희극'으로 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공생하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사람도 잘 살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일깨운 혁명적 생각이다. '생명'과 '협동', '공생'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선구적 사상은 심각한 생태 위기 속에서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기존의 사상들이 보지 못한 중요한 측면을 깨우쳐준 새로운 시각으로, 김종철 교수의 <녹색평론>과 같은 생태주의와 환경운동, 우주의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장회익 물리학 교수의 '온생명 사상'의 뿌리가 되어 발전해 나가고 있다. 그가 선구적으로 시작한 한살림협동조합도 이제 전국적으로 23곳에 70만 명의 회원으로 급성장했고 그를 찾아 원주를 찾는 방문객만 연 1만 명 수준이다.
다만 나는 장일순 사상의 엄청난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과 달리, 이 같은 한생명, 한 살림적 인식이 우리의 현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착취와 억압, 배제,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의 중요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등 우리의 엄중한 현실을 한생명 사상과 한살림 운동만으로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삼경론을 설교했던 최시형과 동학교도들이 이를 파괴하는 봉건적 질서와 외세에 저항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풀이었으면 좋겠네 / 차라리 밟아도 좋고 / 짓밟아도 소리 없어 / 그 속에 어쩌면 그렇게.'
원주시 수암리에 있는 장일순 묘소 옆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진 무위당의 글이다. 무위당 기념관은 무위당을 빼어 닮아 소박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의 연보, 그의 작품들, 그의 글을 새긴 목판 등이 생명협동 교육을 위한 교실에 진열되어 있는 것이 전부이다.
기념관을 나서는데 무위당의 생명사상을 시적으로 표현한 김지하의 글(이 글은 김지하가 1991년 '죽음의 굿판'을 계기로 '이상하게' 변하기 훨씬 전인 1982년에 발표한 글이다)을 서예작품으로 만든 무위당의 글씨가 나의 가슴을 찔렀다.
'혁명은 보듬는 것 / 혁명은 생명을 한 없이 보듬는 것 / (중략) / 어미닭이 달걀을 보듬어 안 듯 / 병아리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우주를 보듬어 안는 것 / 혁명은 보듬는 것 / 부리로 쪼아주다 제 목숨 다하도록 혁명은 생명을 한없이 보듬는 것 / 어미 닭이 달걀을 보듬는 순간 스스로도 우주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
※ 원주시는 생명운동의 대부 장일순 기념사업을 통해 '생명협동운동 발상지 원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생명협동교육관을 만들어 장일순의 삶과 사상에 대한 전시실과 교육시설을 2021년 5월부터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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