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현금을 제공하는 기본소득은 인간 살림살이의 경제적 발판이자, 마중물이다. 동시에 복지사각지대, 낙인찍기가 없는 새 사회정책으로 향하는 거대한 전환이다. <무지한 스승>과 <불화>의 저자인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몫이 없는 이들의 몫’을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했다. 이 명제는 기본소득과도 맞닿은 민주주의 구성 담론이다. ‘몫이 없는 자’란 사회경제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노점상, 철거민, 임차상인, 필수노동자, 홈리스, 쪽방주민, 장애인, 독거노인 등 몫이 없는 이들은 대한민국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국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 달러 이상이자,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30-50클럽’에 세계 7번째로 이름을 올린, 세계 10위권 경제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회복지지출 수준은 2019년 기준 대비 GDP의 12.2%로 OECD 38개 회원국 중 35위 최하위수준에 머문다. 국가는 몫이 없는 사람들에게 생계수단을 빚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생계수단까지 확보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프랑스 시민혁명기의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자살률 1위의 대한민국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그들은 ‘몫이 없는 사람들’이다. 중앙자살예방센터에 따르면 국내 자살 건수는 2017년 1만 2,463건에서 2018년 1만 3,670건, 2019년 1만 3,799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 ‘21세기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꼽히는 슬라보예 지젝이 제시한 ‘대타자의 비존재’, ‘타자의 타자 없음’으로 이를 설명하려 한다. 대타자란 주체가 ‘욕망하는 사회적·상징적 세계’로서 자연 및 우주질서, 사회제도, 관습 등을 뜻한다. 몫이 없어 죽음을 선택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타자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긴급복지지원 같은 조건부 공공부조일 것이다. 문제는 대타자 자체가 비일관적이며, 분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항상 존재하지 않고 그 효력도 결여된 점이다. 몫이 없어 죽음을 택한 사람들에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긴급복지지원 같은 조건부 공공부조가 비존재하였거나 온전히 작동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대타자의 비존재와 붕괴는 ‘타자의 타자 없음’의 개인화로 발현된다. 타자의 타자 없음은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반성성(reflexivity)에 의해 식민화된 텅빈 기표로 포획되었다. 이로 인해 몫이 없는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 외 다른 대안이 없는 비극적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 기존 사회보장제도가 사회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다. 따라서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이 범주별이거나 소액(GDP의 1.3%)이라도 반드시 전방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몰아친 2020년의 국내 자살 건수가 1만 2,782건으로 전년 대비 약 7.4% 줄어든 것이 그 방증이다. 이를 일시적 착시현상이거나 재난 기본소득의 효과라고 봐도 ‘참!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이 지점에서 재난기본소득의 효과를 참조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국회예산정책처의 보고서에 따르면 1차 긴급재난지원금의 4개월(5~8월)간 경제 활성화 효과는 실제 신용카드 사용액보다 최대 1.8배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과 경기도의 재난기본소득이 시장에 풀리면서 경기도민 1인당 최대 18만 5,566원의 소비 견인효과가 있었다. 경기도는 소상공인과 골목상권 등 경제적 약자에게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밝혔다. 2021년 3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이 위탁 수행한 전주형 재난기본소득효과의 분석결과를 톺아보면, 전주형 재난기본소득 수급자들은 “지원금이 개인과 가구 수준에서 소득과 소비의 회복을 통한 경제적 어려움 극복에 도움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전주형 재난기본소득은 우울감이나 스트레스, 자살충동 등 코로나 19로 인한 심리적 타격 극복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 것으로 분석됐다.
여기에 훈훈한 사례를 하나 더 덧붙이면 충북 보은의 판동초등학교는 2020년 10월 말부터 전교생 41명에게, 일주일에 2천 원을 매점화폐로 지급하는 '매점 기본소득'을 실시하고 있다. “'매점 기본소득'으로 친구들과 함께 간식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어 정말 좋고, 학교에 오는 것이 즐겁다"고 학생들은 말한다. 판동초는 학교 자체 예산으로 매점 기본소득을 매년 실시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기본소득이 이미 한국 사회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끝으로, 노자 도덕경 80장을 보면 ‘백성들에게 感(其食)美(其服)롭고 安(其居)樂(其俗)한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통치자가 갖춰야 할 지상의 덕목’이라고 적시했다. 기본소득은 기원전부터 논의된 ‘모두를 위한 소득보장정책의 동아시아 역사’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조선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했다가 전국적으로 확대한 대동법도 기본소득과 맞닿아있다. (몫이 없는 이가 없는) 모두 행복한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지향한 이 위대한 개혁은 함께 사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의 대동세상이 이른바 만인에게 실질적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무조건적 기본소득의 사상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동법(1608년)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최초로 구상한 토마스 페인(1795년)보다 훨씬 앞서는 셈이다.
김상돈 고려대 겸임교수는 기본소득 국민운동 경기본부 상임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