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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국제 산재 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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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국제 산재 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에 부쳐

[기고] 수백 노동자 아닌 하나의 죽음 애도가 더 정치적이다

2021년 1월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은 노동자의 사망에 대하여 사회 공동체가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당시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집권여당의 성과로 이를 활용하고자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발표하면서 시민사회의 관심은 방향을 잃고, 민주적 거버넌스 없는 전문가와 관료 중심의 조직 신설 논의로 수렴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법안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시민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추모의 말은, 마음은 있지만 대상을 잘 알지 못할 때 하게 되는 막연한 의례에 가까웠다. 우리 사회는 사망한 노동자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사망자를 뭉뚱그려 추모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한 사람의 구체성, 삶의 궤적을 마주할 때 애도의 마음은 힘이 세다. 애도와 추모가 커지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도 실천도 커진다.

'작업자' '인부' '근로자' '...외 0명'이 우리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하여 접하는 거의 전부다. 노동자들은 얼굴이 없다. 이름이 없다. 생산의 현장에서 사라진 노동자들은 한국 현대사의 사회적 죽음을 기록한 비문에 의미를 남기지 못했다.

국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산재 사망 노동자들을 추모해온 흐름이 한국의 노동운동에 닿은 지 10여년이 지났다. 4월 28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산재노동자 추모일(International Workers’ Memorial Day)을 기억하고, 피켓을 들고. 촛불을 켠다. (바로가기 ☞ : 클릭)

▲재난·산재 참사 유가족·피해자들이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재난·산재 기록과 증언회'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4월이 오면 저마다 조직 안에서 산재 문제를 주요 의제로 끌어올리고자 애써왔다.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하고, 부상과 직업병, 사망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기업과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는 활동을 해왔다. 성명도 발표하고, 기자회견, 문화제, 결의대회를 매년 열었다. 그러나 4월의 추모는 노동조합의 담벼락을 넘지 못해 왔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의제 설정 능력과 연관이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국가가 문제해결을 위한 자원의 동원과 예산의 배정 등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 왔다. 추모하고 애도하는 것은 감정이 필요하다. 얼굴이 없고 이름이 없는 이를 애도하는 것은 쉬이 되지 않는다. 특별하지 않은 죽음으로 사회가 받아들인다면 해결책은 여전히 추상적이고 관성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0년 1월, 고용노동부의 언론브리핑 제목은 '2019년 산재 사고사망자 최초 800명대 진입' 이었다. 일을 하다 사망한 국민의 수를 발표하면서 정부는 올림픽 중계방송 하듯 제목을 달았다. 노동자의 산재 사망이 전년보다 줄었으며, 이는 정부정책의 성과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브리핑을 한 장관은 정부가 정책과 행정역량을 집중하였더니 사망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부가 자원과 역량을 투여할수록 노동자 사망이 감소한다는 것이고, 과거에도 그러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정부의 발표에는 이에 대한 윤리의식을 느낄 수 없다. 대단한 반성의 수사를 쓰라는 말이 아님을 알 것이다. 저 브리핑 제목이 발표되었다는 것이 정부의 윤리적 감각의 단면이다.

저렇게 윤리감각이 마비된 언론브리핑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 맥락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국 현대사는 노동자들의 산재 사망을 전장에서의 병사의 죽음에 비유해 왔다. 죽은 노동자들은 손실된 전력의 규모처럼 숫자로 처리되었다. 정부 기록에 의하면 1970년에 639명, 1980년에 1273명의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고, 1995년에 2662명의 노동자가 사고와 직업병으로 사망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성장곡선이 상승할 때 산업의 현장에서 사망하는 노동자도 증가하였다. 산재 정책에 있어 국가는 기술적 규제책에 집착해왔다. 기업이 지켜야 할 공학적 기준이 계속 추가되어 법전의 두께가 늘어났지만 산재는 줄지 않았다. 국가는 산재가 줄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요구받지도 않아 왔다. 전문가와 관료들이 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중의 일부를 정책이라고 발표해 왔다. 점검, 진단, 기준, 검진 같은 기술 용어들이 정책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산재 정책에 투입하는 일반예산이 없다시피 하고, 기업들이 내는 산재보험료 기금에 국가가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기업이 내는 돈 안에서만 산재보험을 운영하고 산재정책을 펴온 정부가, 경제성장과 풍요에 비례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하여 기업의 책임을 정면으로 제기할 수 있었을까?

정부는 기업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서 산재를 비정치적이고 기술적인 영역에 결박해 놓고, 노동자들의 죽음을 익명화하였다. 정부가 사망노동자를 수백 명으로 묶어 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은 산재로 인한 죽음을 비정치적인 문제라고 느끼게 만든다. 정치적으로 중요해져야 해결책도 모색할 수 있다. 사망에 이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기업 안에서 겪어야 했던 문제를 알게 될수록 우리는 산재가 사회구조의 문제이고 정치적 문제라고 느끼게 된다. 때로는 빈곤, 불평등, 이중노동시장의 모순이 응집되어 죽음으로 노동자를 덮치는 일이 언어적 비유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실제 재난이라는 것을 목도한다.

이러한 재난의 목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그려낸 구체적 삶과 노동이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망한 노동자의 가족들이, 노동의 현장에서 살아서 오지 못한 자녀, 형제자매, 부모에 대하여,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한지는 오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이 떠올리는 유가족을 다 꼽아보아도 많지는 않다.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만나야 할 사람 미리 정해주지 말고, 정치하는 사람들, 정당들 다 만나보고 싶다. 아이가 죽고 나서 정부가 하겠다고 했던 게 제대로 된 게 없다. 나는 다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얼마 전에 만난 노동자의 어머니는 이야기하고 또 하였다. 4월 28일,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산재로 사망한 동료 노동자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날, 노동자의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알고, 남은 가족의 이야기를 알고자 하는 시민이 많아지길 바란다. 더 많은 노동자의 가족들이 말하기를 시작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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