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키디데스의 함정. 오늘날 미중 관계를 설명하는 유행어이다. 투키디데스는 약 2400년 전에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보면서, 신흥 부상국에 대한 지배국의 불안감으로 인해 양국 간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이를 미중관계에 적용해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표현을 유행시킨 학자는 그레이엄 엘리슨이다. 그는 2017년에 <예정된 전쟁: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Destined for War: 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화제를 모으자, 영국의 경제 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는 2018년 올해의 단어로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선정했다.
그러나 앨리슨조차도 지배국과 신흥 부상국 간의 충돌이 높은 개연성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지난 500년 동안의 세계사에서 지배국에서 신흥 부상국으로 패권 경쟁이 있었던 사례는 총 16차례가 있으며, 그 중 12개의 사례는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20세기 초 영국으로부터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패권을 이양 받아 지배국이 되었던 4가지 사례 중 하나이다. 앨리슨은 미중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게 될지는 양국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차이메리카와 '3C'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기에 앞서, 미국 하버드대의 역사학 교수인 니얼 퍼거슨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의 경제학 교수인 모리츠 슐라릭은 2009년에 미중관계를 '차이메리카'로 표현하면서 불편한 동거를 경고한 바 있다.
중국(China)과 미국(America)의 합성어인 차이메리카(Chimerica)는 양국 관계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키메라(Chimaera)'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착안한 것이다. 하나의 몸이 사자와 염소와 뱀의 형상을 한 3개의 머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미중관계도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영어 철자도 대단히 흡사하다.
두 사람이 이 표현을 고안한 배경은 주로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의 몸'은 경제적 상호의존을 뜻한다. 2000-2008년간 중국은 대미 수출 증대와 미국 등 선진국들의 대중 투자 확대에 힘입어 GDP가 무려 4배나 늘어났다.
미국도 값싼 중국 상품 덕분에 이자율과 물가상승률을 억제할 수 있었고 중국이 미국 국채를 다량으로 매입해줘 막대한 국가 부채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미국 채권의 이자율은 계속 낮아졌고, 미국인들은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상이한 머리'는 주로 무역 불균형을 뜻한다. 양국 사이의 무역 불균형이 갈수록 벌어지면서 미국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로 인해 퍼거슨과 슐라릭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유지되어온 "9년간의 결혼 생활이 이제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차이메리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경제적 불균형을 바로 잡는 것이 필수불가결한데, 이것이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언은 2018년 미중 무역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미국이 탈동조화에 시동을 걸면서 '하나의 몸'마저 분리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나는 차이메리카를 변용한다면, 이 표현이 오늘날 미중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개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개의 머리를 '3C'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3C는 대결(Confrontation), 경쟁(Competition), 협력(Cooperation)을 의미한다. 이 표현이 유용한 이유는 미중 모두 양국 관계가 세 가지 측면이 있다고 밝히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데에 있다.
대결은 주로 중국이 "핵심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신장, 홍콩, 대만을 둘러싼 양국 사이의 공방과 중국이 주변국과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는 동중국해 및 남중국해에서 나타나고 있다.
경쟁은 5G 및 반도체와 같은 기술 분야와 무역 등 경제 분야에서부터 군비경쟁과 세계 각국을 상대로 한 '내 편 만들기'에서, 심지어 자유 민주주의냐 권위주의냐는 정치체제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미중 양국은 대표적인 협력 분야로 기후 위기와 핵비확산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범주의 경계는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지배적 요소는 '경쟁'
이들 세 가지 가운데 현재와 미래의 지배적 요소는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이 정치체제, 경제, 군사, 외교 등 다방면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요소들이 서로 맞물려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미국은 중국의 경제성장이 민주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기대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특히 시진핑이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을 폐지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면서 미국의 의구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민주주의는 미국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오히려 미국식 민주주의의 기능 부전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경제와 안보와의 관계는 1980년대 미일 무역 갈등과 오늘날 미중 갈등을 비교해보는 게 유용하다. 1980년대 일본의 급격한 경제성장과 미국의 쌍둥이 적자 누적이 교차하면서 미국 내에선 '일본 위협론'이 맹위를 떨쳤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야기한 플라자 합의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나 양국 사이의 강력한 군사 동맹은 무역 갈등이 다른 분야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무역 갈등은 빠르게 봉합되었고 미일동맹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반면 미국과 중국은 경제는 물론이고 안보 문제에 있어서도 갈등을 빚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경제적 갈등과 안보 갈등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갈등의 심화와 확산을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악순환을 형성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중국의 경제성장이 '군사굴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있고, 중국은 미국과 군비경쟁도 불사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력이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3C'의 양상은 한반도 문제를 놓고서도 나타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핵비확산은 미중 양국이 뽑는 대표적인 협력 분야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 달성은 양국의 협력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비핵화 달성의 방식을 둘러싸곤 경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북 제제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제재의 유지·강화를 통한 '최대의 압박'을 선호해왔고 중국은 북한의 긍정적 조치에 걸맞은 제재 완화를 요구해왔다. 대결적 요소도 있다. 미국이 북핵 악화의 책임을 중국에 돌리는 것이나 중국이 사드 배치와 같이 미국이 '북한위협론'을 활용해 중국에 대한 군사적 견제를 강화하는 것에 반발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렇듯 미중 관계는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으면서도 경쟁을 핵심적인 특징으로 품고 있다. 이에 따라 미중 관계를 대결로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측면이 있다. 우리의 선택지를 좁힐 우려가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다음에 이어질 글 : '기후 위기', 미중 관계의 게임 체인저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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