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이 지나갔다. 주식회사 형태를 취하고 있는 기업에 3월은 숨 가쁘게 지나가는 달이다. 결산을 확정하고 1년간의 성과를 기록한 장부를 주주들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는 주주총회를 개최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주총회가 개최되면 임원을 선출하거나 회사의 헌법에 해당하는 정관을 개정하는 절차가 진행되기도 하니, 기업 입장에서는 긴장 속에 지나가는 달이 3월이다.
국민연금은 우리나라 상장회사 대부분의 주주이다. 2020년 말 현재 국민연금의 기금운용 규모는 834조 원인데 이 중 177조 원을 국내 주식에 운용하고 있다. 같은 시점의 코스피와 코스닥 시가총액 규모가 2370조 원이었으니, 같은 비율로 투자한다고 해도 모든 상장회사의 7.5%씩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기준을 적용해도 시장의 큰손이다.
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도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주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의결권이다. 주주총회에 출석하여 투표할 수 있는 권리다. 그런데, 회사 또는 다른 주주가 제안한 안건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 여부만 결정하는 의결권은 주주의 권리 중 일부에 불과하다. 주식회사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규정해 놓은 상법 등을 보면, 주주는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각종 설명을 요구할 권리도 있으며 장부 등을 열람할 권리도 있다. 임원을 제안할 권리도 있고, 회사가 손해를 봤는데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
최근 몇 년에 사이에 주주로서의 국민연금에 변화가 있었다. 2018년 3월에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의결권 행사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규정 개정이 있었고, 바로 이어서 주주로서의 권리를 의결권에 국한하지 않고 법에서 정한 권리로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2018년 7월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스튜어드쉽 코드)을 제정하고 관련 지침과 위원회를 정비한 것이다. 스튜어드쉽 코드를 도입했다는 것은 국민연금이 국민의 노후재산을 스튜어드, 즉 집사처럼 충실하게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의미가 된다. 3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변화가 내실 있게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의결권 행사 방법에 관한 중요한 변화
우선, 의결권 행사에 대한 규정 변화부터 보자.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 결정은 기본적으로 기금운용본부 내부에 설치되는 투자위원회가 주관하게 되어 있었다. 투자위원회에서 판단하기 곤란한 사안에 한해 외부위원으로 구성된 전문위원회에 부의하게 되어 있었다. 종전의 규정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 당시 전문위원회는 자문기구 성격이 강했다. 기금운용본부의 투자위원회가 질문을 해야만 답을 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기금의 장기적인 주주 가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사회적 논란이 복잡하여 전문위원회가 직접 안건을 다루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없었다.
이 문제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었다. 총수 일가의 상속문제 해결의 한 방법으로 계열사 지분을 많이 보유하여 사실상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계열회사와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높은 계열회사를 합병하는 것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총 수일가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구도로 합병을 진행하면 상속 문제가 해결되면서 일반주주의 부(富)가 총수 일가에 이전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직전에는 동일한 구조로 SK와 SK C&C가 합병을 진행하기도 했다. SK 합병 안건은 전문위원회에서 심도 있는 논의 끝에 반대 결정이 이루어졌다. 모두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도 전문위원회에 상정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절차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후 재판과정을 통해 밝혀진 대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은 기금운용본부장은 각종 자료를 왜곡해 찬성 결정을 유도했다. 투자위원회 차원에서 판단하기 곤란하지 않아서 전문위원회 부의가 필요 없다고 결정하고 찬성결정을 해 버렸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당시 전문위원회는 투자위원회가 자문을 구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모이기도 했다. 모여서 다양한 논의를 했지만 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근거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자위원회가 스스로 자문을 구하지 않는 한 의결권 행사 방향 결정권을 전문위원회로 넘길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공개된 투자위원회 회의록을 봐도 투자위원회 차원에서 결정하기 곤란한 사안이었지만, 제도상 허점이 있었다.
그 당시의 교훈은 부당한 압력에 굴복할 수도 있는 내부조직이 아니라 외부 전문가 위원회의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투자위원회 차원의 의사결정이 틀릴 수도 있으니, 전문위원회에 견제권을 부여하여 국민연금 전체의 의사결정 오류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장관과 기금운용본부장이 구속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배운 뼈아픈 교훈이었다.
그 결과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와 관련된 중요한 조항이 추가되었다. 9명의 전문위원회 위원 중 3명이 요구하면 의결권행사 방향을 기금운용본부의 투자위원회가 정하지 않고 전문위원회로 권한이 회수되도록 한 조항이었다. 투자위원회가 잘못된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를 보완하고 견제하기 위해 자문기구 성격이었던 전문위원회에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이 조항의 추가로 인해 전문위원회의 성격은 자문기구보다는 그 위상이 강화되었다고 봐야 한다.
조항은 바뀌었지만 업무는 그대로
조항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자. 어떠한 조건이 있어야 그 조항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자. 일단, 전문위원회 위원들이 권한의 회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안건이 국민연금 기금에 중요한지 아닌지, 장기적인 주주 가치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기금운용본부가 판단 근거로 활용하는 의결권 자문회사의 자문보고서는 기본적인 정보다. 기금운용본부의 의사결정이 언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정보도 필요하다. 최소한 그 정도의 정보는 공유되어야 의결권 회수를 해야 하는지, 한다면 언제 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과거와 유사한 패턴으로 움직였다. 기금운용본부 내부의 투자위원회가 결정이 곤란하다고 판단하기 전까지 아무런 정보가 전문위원회에 공유되지 않았다. 의결권 자문기관의 보고서도 공유되지 않고, 투자위원회 개최 일자, 결정 내용도 공유되지 않았다. 예전대로 자문을 의뢰할 때만 모여서 요구받은 내용만 검토하라는 식으로 운용되었다.
이것이 필자를 포함한 2명의 전문위원이 사퇴한 이유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내부적인 큰 사건에 근거하여 조항이 바뀌었지만 업무관행이나 인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정보 공유를 요구해도 바뀌는 것이 없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관행에서 벗어나 새롭게 추가된 조항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바뀌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했다. 그 조항이 신설된 취지를 되새겨 보고, 그 권한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정보의 공유와 절차의 정비 등이 필요하다.
인원이 부족하면 주주권 행사는 소극적일 수밖에
같은 시기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를 넘어선 주주권도 행사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앞서 언급했듯 집사라는 의미의 스튜어드가 되겠다고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스튜어드쉽 코드)을 도입하고,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를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로 개편했다.
제도를 도입하고 관련 규정을 정비한 후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뛰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상태를 보면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인원의 부족이다.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이 어디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는 조직구성을 보면 된다. 어떤 부분을 강화하겠다고 말만 화려하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일을 하기 위한 적절한 인원을 배치하지 않으면 그 말은 허세에 불과하다. 기금운용본부에서 의결권 행사와 주주권 행사를 담당하는 수탁자책임실의 인원은 10명 남짓이다. 국민연금의 2020년 말 국내 주식 투자 액수는 177조 원, 그중에서 2020년 한 해 동안 직접 검토(위탁 제외)한 의결권만 2019건, 2020년 한 해 동안 주주권 행사 여부를 검토했던 대상이 110개 기업, 225건의 사안인데도 10여 명의 실무자가 이 모든 일을 담당하고 있다.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 중 일부 위원을 상근위원으로 바꾸면서 보강한 상근전문가도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다. 정원이 2명에 불과한데, 실제 근무하는 인원은 1명이다. 투자위원회의 오류 가능성을 보완·견제하고 나아가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다. 적절한 인원이 배치되어 있지 않으니 모든 접근이 소극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비공개 대화, 비공개 중점관리기업, 공개 중점관리기업, 주주 제안 단계로 진행되는데, 너무 많은 기업이 대상이 될까 걱정하는 일이 반복된다. 인원이 부족하여 대상이 될 기업들을 모두 관리할 수 없으면 실무적인 기준선을 올리게 된다. 선정기준을 까다롭게 운용해 적절한 주주권 행사가 필요하지만 견제와 감시를 포기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운용에 있어서도 소극적이다. 앞서 언급한 비공개대화, 비공개중점관리기업, 공개중점관리기업, 주주 제안은 기본적으로 1년 단위로 운영된다. 1년 동안 비공개화 대화를 해봤는데 개선 여지가 없으면, 비공개중점관리기업이 되는 식이다. 그런데, 요즘같이 변화가 빠른 시대에 1년 단위의 운용은 효과적인 주주권 행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정 임원이 횡령·배임을 저질렀는데, 단계별로 진행해서 임원에 대한 해임을 제안하려고 하면 3~4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손해는 이미 발생했고, 해당 임원도 벌써 퇴임해서 그 회사에 없는데 뒷북만 치게 될 수 있다.
현재 규정으로도 개선의 여지가 없다면, 단계를 축소하여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인원이 부족하고 적극적인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당 기업과 형식적인 미팅이라도 한번 했으니 개선의 여지가 없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실질적인 기준으로 개선 여부를 냉정하게 판단하여 다음 단계로 신속하게 진행해야만 효과적인 주주권 행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민연금의 수탁자 책임 활동, 지나치게 소극적이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때
의결권행사지침 개정을 무력화하는 관성과 소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관통하는 흐름이 있다. 국민연금이 집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1년 동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를 하면서 느낀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위원회가 소극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경영자 단체 추천 전문위원도, 기금운용본부 실무자도, 보건복지부 관계자도 이 위원회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기금 운용 방식의 변화는 세계적인 대세다. 과거 월스트리트 룰을 만들고 주도했던 미국과 영국도 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무게중심을 옮긴 지 오래다. 우리 기업과 관료조직만 과거의 관념에 갇혀서 세계적인 흐름에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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