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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도 치켜세운 '2‧28 운동', 대구의 '민주화 전통'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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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도 치켜세운 '2‧28 운동', 대구의 '민주화 전통'을 걷다

[손호철의 발자국] 11. 대구 명덕역 :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지' 대구?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 2‧28 민주운동'. 대구 중심가에 있는 지하철역인 명덕역을 나서면 고가 기둥에 커다랗게 쓰인 글씨가 우리를 맞는다. 이를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의문에 빠졌다. "진짜 내가 광주가 아닌 대구에 온 것인가?"

이 문구는 두 측면에서 혼란스럽다. 하나는 '한국 민주혁명'이 다른 곳이 아닌 대구에서 시작됐다는, 통념과 떨어진 주장으로 인해 혼란스럽다. 둘째로, '민주화 운동'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것 같은 '보수의 도시' 대구가 이 같은 사실을 자랑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럽다. 그것도 '민주혁명'이라는 '과격한' 용어를 쓰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돌출적인 문구가 아니다. 고개를 돌리면 역 앞의 거리 이름을 적은 표지판을 볼 수 있는데, 거리 이름이 '2‧28 민주로'다. 지하철역 표지판 역시 '명덕' 옆에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라고 표시돼 있다. 한마디로, 2‧28 민주운동을 의식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 대구 명덕역에는 대구가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점이었다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어 보는 이를 의아하게 한다. ⓒ손호철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기둥에서 길을 건너면, 보도블록 한 가운데 작은 표지석이 나타난다. 이곳에 "1961년 2‧28 대구 학생민주의거를 기념하는 탑을 건립했다가 1990년 2월 20일 두류공원으로 옮겼다"는 표지석이다. 그렇다. 1960년 2월 28일 학생 시위가 벌어졌던 현장에 이를 기념하는 탑이 있었지만, 1990년 이를 철거해 구석진 공원으로 옮겼다.

▲ 원래 명덕역 앞에 설치되어 있다가 대구가 보수화되면서 도시개발과 함께 외곽으로 이전한 2.28 민주의거 기념탑 ⓒ손호철

명덕역 앞의 두 표식, 즉 2‧28 민주운동을 찬양하는 대형글씨판과 기념탑의 이전을 알리는 표지석은 2‧28 민주운동이 무엇이고, 그 기념비는 왜 1990년 역사의 현장에서 철거돼 두류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 대구는 왜 다시금 2‧28 민주운동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나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1960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명덕역이 들어서는 명덕네거리가 위치한 대구 중심가에선 경북고, 경북여고 등 대구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자유와 정의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이승만 정부가 이날 열리는 야당의 선거강연회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동안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과 '관제데모' 동원에 불만을 품어온 대구지역 고등학교 지도부들은 이날 대구 중심가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로 사전 모의했고, 학생들은 이날 교문을 박차고 나와 항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일부 연구자들에 따르면, 2‧28 주동자로 알려진 명망가 중 일부는 시위 계획이 사전 발각되자 경찰의 지시에 의해 경찰차를 타고 시위중지를 촉구하는 선무방송을 했지만 이미 밑으로부터 터져 나온 학생들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2개 여자고등학교가 시위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투쟁에 여학생들이 체계적으로 같이 한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 2.28 민주운동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 2.28 민주항쟁 사진.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해 거리로 나왔다. ⓒ손호철

대구의 이 시위는 1953년 종전으로 분단체제가 완성되고 이승만 독재체제가 확립된 뒤, 관제데모가 아닌 "최초의 자주적 시위"이며, 2‧28 민주운동은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이라는 것이 2‧28 관계자들과 대구의 주장이다. 나 역시 4‧19 혁명은 경찰이 김주열 군을 죽여 바다에 버린 마산의 '3‧15 의거'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알고 있었고, 3‧15 이전에 대구의 2‧28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2‧28이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명덕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는 최근 건설된 2.28 민주운동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민주운동의 문을 열다'라는 큰 글씨가 눈에 띈다. '2‧28이 한국 민주화운동의 문을 열었다'는 주장이다.

▲ 명일역 근처에 새로 지어진 2.28 민주운동 기념회관 ⓒ손호철

전시관의 한 지도에는 4‧19 혁명 당시 발생한 민주화운동이 지역과 날짜로 표시돼 있는데, 이를 보고 모르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2‧28 대구 다음날인 2월 29일은 전주에서, 3월 8일, 10일, 12에는 각각 충청도 대전과 충주, 청주에서, 4월 19일에는 광주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지도는 대구의 시위가 마산(3월 15일)으로 옮겨가고 이어 서울(4월 19일)로 전파됐다는 점을 붉은 불빛으로 표시해 두었다.

▲ 기념관에는 4.19 혁명이 대구 2.28 투쟁으로 시작해 마산을 거쳐 서울로 번져간 것을 표시해 놓았다. ⓒ손호철
▲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는 2.28 민주운동 관련 조형물 ⓒ손호철

시기적으로 2‧28이 가장 앞선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시위가 언론보도 등을 통해 얼마나 마산과 서울로 알려져 실제 4‧19 혁명의 촉발제가 됐는지는 미지수다. 투쟁 내용 역시 2‧28의 경우, 4‧19 혁명이 추구했던 '이승만 하야'와 같은 '과격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대구 10월 항쟁의 실패와 처절한 학살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1960년대까지는 대구가 '야당도시', '민주선도도시'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박근혜가 대통령 시절에 보낸 축하 메시지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메시지는 탄핵 전인 2014년 작성된 것으로, 이 해부터 2‧28 기념식이 국비 지원으로 열리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다.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2‧28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2‧2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민주화운동으로는 1960년 3‧15 의거,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1987년 6‧10 항쟁에 이어 다섯 번째다.

▲ 탄핵 전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보낸 2.28 민주운동 축하 메시지가 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다. ⓒ손호철

명덕역 앞의 표지석이 알려주듯이, 4‧19 혁명 1년 뒤에 명덕네거리에 세워졌던 기념탑은 29년이 흐른 뒤인 1990년 두류공원으로 옮겨졌다. 명덕네거리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이전이겠지만, 70~80년대를 거치며 대구가 그만큼 보수화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2‧28에 별 관심도 없고 그다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지금처럼 2‧28을 대구가 자랑해야 할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이라고 여겼다면, 이를 두류공원으로 쉽게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리를 옮겨 두류공원에 설치된 '2‧18학생의거기념탑'은 생각보다 큰 탑이다.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은, 바지 둘을 세워 놓은 것 같은 이 탑을 보고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가 궁금했는데, 기념관에서 그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큰 모양은 남학생을, 작은 모양은 여학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60년 전에 만든 조각이라고는 하지만,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역사적인 민주화운동을 성차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조각으로 형상화한 것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와 조각을 바꿀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 같은 설명은 기념관에서 치워버려야 한다.

대구 중심가에는 근사한 2‧18민주운동기념관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2‧28 기념중앙공원도 생겼다. 그만큼 2‧28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평가, 나아가 대구의 인식과 평가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대구도 이제 "우리가 사실은 민주화운동의 원조야"라고 이야기할 만큼, 우리 사회에 '민주'가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이루어온 우리 민주화의 영향일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바라보는 마음은 흐뭇하다.

일부에선 자유민주주의를 "무찌르자 공산당!"과 같은 극우반공주의로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는 자신과 다른 급진적인 사상이나 표현까지도 보장해주는 민주체제를 의미한다. 이점에서 사실 국가보안법으로 아직도 특정한 사상을 금지하고 있는 우리는 아직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2‧28기념중앙공원을 거닐며 1960년대의 '민주선도도시' 대구를 회고한 나는, 대구가 자랑스러운 전통을 부활시키기를,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이름 아래 '보수주의'와 철 지난 '극우반공주의'를 선도하는 도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진정한 자유와 민주를 위해 앞장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선도도시'가 되기를 기원했다.

<보론>

▲ 1946년 10월 2일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에 분개한 대구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대구 10월 항쟁이라는 시위를 벌였다. ⓒ미국립문서기록청 자료.

대구는 1960년 2‧28 민주화운동만이 아니라 1946년 미 군정에 저항해 제일 먼저 들고 일어선 곳(대구 10월 항쟁)이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진보적인 지하당과 지하서클이 가장 왕성했던 지역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6. '대구 10월 항쟁' <한국일보> 2021년 2월 1일자'손호철의 발자국' 27. '인혁당재건위' 2021년 2월 8일자 참조).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대구는 '보수의 메카', '수구 세력의 메카'로 변화했다. 언제부터, 왜 대구가 이렇게 변화했는가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8. '대구의 보수화' <한국일보> 2021년 2월 15일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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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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