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전 3월 18일 파리 코뮌 봉기가 시작됐다. 1871년 벽두에 프랑스에서는 1년 전 패배로 끝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베르사유에 들어선 임시정부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돼 있었던 반면에 파리 시민들은 프로이센군에 맞서 계속 항전할 태세였다. 급기야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는 정규군이 무장 시민들로 이뤄진 국민방위군이 관할하던 파리 시 외곽의 대포들을 압수하려 하자 사실상 '내전'이 시작됐다.
국민방위군과 그 지지자들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곧바로 선거를 실시해 파리 자치정부, 즉 코뮌을 결성했다. 코뮌은 이후 2개월간 임시정부와 대치하며 버텼다. 코뮈나르들, 즉 코뮌을 열렬히 지지한 시민들은 대개 노동자이거나 하위 중산층이었으며, 대혁명 시기 자코뱅파의 정신을 이어받은 블랑키주의자들과 국제노동자연합(제1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에 모인 프루동주의자들이 이들을 이끌었다. 두 세력 모두 자본주의에 반대한 급진좌파였고, 그래서 코뮌은 짧은 존속기간 동안 전례 없는 사회적 실험들을 펼쳤다.
결말은 처참했다. 5월 21일에 베르사유 측 군대가 파리에 진입해 코뮌을 진압했다. 수만 명의 코뮈나르들이 사실상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오랫동안 망명객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시야를 이후 세대로 더 늘려보면, 코뮌은 프랑스, 아니 유럽과 세계 곳곳에서 민중이 주도하는 변혁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역사적 기억이자 상징이 됐다. 그래서 150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쪽에서 여전히 이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참에 파리 코뮌에 대해 다시 짚어보고 싶은 게 있다. 코뮌을 뜨겁게 기억한 이들은 물론 후대의 좌파였고, 그래서 이는 이후 150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뿌리나 전조 혹은 예행연습이라 평가되곤 했다. 예컨대 파리 코뮌은 50여 년 뒤에 성공하게 되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선구였다. 20세기에 등장할 현대 사회주의의 조숙한 예고편이라는 것이었다. 이 경우 코뮈나르들은 혁명적 독재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로 나아가야 했으나 불과 2개월밖에 버티지 못한 탓에 이를 실현하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150주년이 되는 지금,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코뮌에 대한 망각이나 저주, 왜곡뿐만 아니라 이런 20세기 좌파의 표준 서사일지 모른다. 이 서사 때문에 깎이거나 가려진 파리 코뮌의 또 다른 얼굴이 있지는 않는가?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코뮌의 종말이 다가올 즈음, 왕년의 사회주의 투사 조르주 상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이제 곧 죽을 운명인 코뮌은 중세의 마지막 현시였습니다."
중세의 마지막 현시. 현대 사회주의의 선구자라는 것과는 얼마나 상반되는 평가인가. 이것은 자신의 소설 감정교육에서 1848년 2월 혁명을 한 편의 소극으로 다뤘던 허무주의자의 냉소에 불과한가? 그러나 플로베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퉁명스러운 문장에는 분명히 파리 코뮌을 둘러싸고 오늘날 우리가 놓쳐선 안 될 진실이 숨어 있다.
역사의 반동이었던 파리 코뮌?
세계사를 훑다 보면, 근대국가라는 게 얼마나 '근대'적인지 확인하며 놀라게 된다. 정말 최근에야 겨우 탄생했다고 할까. 영국과 프랑스 정도를 제외하면, 지금도 'G-몇' 안에 늘 끼는 주요 국가들이 모두 그러하다. 게다가 이들이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춘 시점 또한 묘하게 일치한다. 그것은 1860년대에서 1870년대에 이르는 시기다.
파리 코뮌의 배경이 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다름 아니라 독일 통일 문제 때문에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한 덕분에 1871년 1월에 독일제국이 출범했다. 지금 우리가 '독일'이라 부르는 통일국가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정확히 10년 전인 1861년에는 이탈리아 반도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됐다. 전에 없던 '이탈리아'라는 국가의 출현이었다. 이로써 서유럽 일부에 제한됐던 근대국가 중심의 국제 질서가 1870년대 즈음에는 유럽 중앙으로까지 확장된다.
유럽만이 아니었다. 북미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물론 미합중국은 건국되고 이미 몇 세대가 지난 뒤였지만, 실질적인 통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관문을 한 번 더 통과해야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남북전쟁이다. 원어가 '내전'인 이 전쟁을 거치고 난 1865년에야 미국은 비로소 북부의 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에 둔 근대 국민국가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시야를 더 넓혀 보면, 같은 시기에 동아시아에서도 근대국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었다. 1868년에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성공했고, 1872년에는 봉건 체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하는 폐번치현이 단행됐다.
이렇듯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모두 파리 코뮌 몇 년 전이나 몇 년 후에 근대국가로 대두했다. 좀 더 넓게 보면, 러시아 역시 이 무렵 근대국가 체계를 갖추기 위해 농노 해방 등의 내부 개혁에 나섰고, 중국도 이때 한족 군벌을 중심으로 양무운동에 돌입했다.
즉, 1860-1870년대는 세계사의 결정적 전환기 가운데 하나였다. 위에 언급한 나라들이 지금도 지구 질서를 좌우한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1860-1870년대에 시작된 한 시대 안에 있다고, 이때의 대전환 '이후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150여 년에 이르는 이 시대의 그림은 1870년대에 시작된 또 다른 거대한 전환까지 포함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은 이른바 '제2차 산업혁명'이다. 뒤늦게 근대국가로 거듭난 독일과 미국은 영국을 뛰어넘기 위해 생산 체제를 혁신했다. 핵심은 생산을 더욱 기계화하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전력 도입으로 이 과정이 보다 가속화됐다. 한데 이를 촉진하자면 기업의 형태가 바뀌어야 했고, 전에 없이 팽창한 국가기구가 이를 도와야 했으며, 노동력이 새롭게 조직돼야 했다. 거대한 국가-자본 복합체의 뜻대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자본주의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다시 파리 코뮌으로 돌아가자. 바로 이러한 역사적 변곡점에서 코뮌은 봉기했다. 파리 바깥에서 숨 가쁘게 질주하기 시작한 새 시대의 휘황찬란함에 비하면, 코뮈나르들의 꿈은 얼마나 고색창연했던가! 이런 대비 속에 바라보면, "중세의 마지막 현시"라는 플로베르의 표현이 전혀 악의적으로 느껴질지 않을 정도다.
코뮌 집행부에서 사회적 실험을 앞장서서 펼치던 프루동주의자들은 전기로 돌아가는 대공장을 준비하기는커녕 노동자 협동조합을 만들려 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자본가들이 버리고 떠난 작업장을 노동자가 직접 경영하는 게 이들의 목표였다. 비록 입법만 하고 실행은 못했지만 말이다.
이들과 달리 블랑키주의자들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구상한 국가조차 이후 세상을 지배하게 될 현실 국가에 비하면 지극히 목가적이었다. 블랑키주의자들이 염두에 둔 프롤레타리아 공화국은 뉴딜이나 5개년 계획을 밀어붙인 20세기의 육중한 국가기구들보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고대 로마 공화국이나 그 자코뱅적 변형에 더 가까웠다.
이렇게 당대 자본주의 현실보다 훨씬 뒤쳐져 있었으면서도 코뮌의 실험은 거창하기만 했다. 대의제를 대중의 일상적 참여, 통제와 결합하려 했고, 고작 두 달 동안에 지난 2천 년간 하지 못했던 여성 해방을 실현하려 했다. 이 무슨 시대의 엇박자인가. 코뮈나르들은 지금도 요원하게만 보이는 과제들을 노동자 협동조합이 경영하는 18세기풍 작업장과 저녁에 카페에 모인 선거구민들의 눈치를 보는 시의회를 통해 달성하려 했다.
어쩌면 세계사에서 이와 가장 유사한 사례는 1894년 조선의 동학농민혁명일 것이다. 파리 코뮌보다 20여 년 뒤에 발발한 농민혁명은 코뮌만큼이나 드높은 이상에 불탔으며 또한 그만큼 시대착오적이었다. 농민군은 죽창으로 무장한 채 동아시아의 한 지역에 전에 없던 질서를 세우려 했다. 그러자 이미 세상의 흐름에 맞춰 착실히 저들의 질서를 구축하던 두 세력, 메이지 유신의 일본과 양무운동의 중국이 이들의 진압에 나섰다. 마치 20여 년 전 파리에서처럼.
두 봉기 모두 이렇게, 현재 우리 삶의 9할 이상을 만들어놓은 자본주의의 기준에서 보면 '진보'라기보다는 '반동'이었다. 한때 그들의 정신적 후예들이 내놓았던 평가와는 달리, 두 운동의 꿈은 이후 150년 동안 실제로 전개될 역사와는 사뭇 다른 어떤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시 돌아봐야 할 코뮌의 꿈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파리 코뮌과 동학농민혁명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야 한다. 그때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온 역사가 도달한 곳, 지금 인류의 현실 때문이다.
코뮈나르들은 꿈도 꾸지 못했을 자본주의적 번영은 과연 1871년의 프랑스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었는가? 베르사유의 신사, 숙녀들과 파리에 남은 민중 사이의 골은 머나먼 옛 일이 되었는가? 그렇기는커녕 골은 더 깊어지고만 있다. 게다가 수명을 150년 더 연장한 자본주의 탓에 인류는 현재 전대미문의 위기에 몰려 있다. 기후위기다. 이에 대처해야 한다고 부르짖어도 거대한 국가-자본 복합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그때보다 더 전진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궁지 속에서 파리 코뮌과 같은 기억은 빛이 새고 바람이 들어오는 작은 창과도 같다. 아찔하게 높기만 한, 메아리조차 없는 의사당이나 정부 청사를 지날 때면 시민들이 하도 들락날락해 회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코뮌은 어땠을지 떠올려본다. 가령 자전거를 타고 모여든 시민들이 예정에 없던 집회를 열고 공직자들은 또 그런 일상의 토론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정치라면, 어떨까? 이런 광경에 익숙한 사회라면, 기후위기 같은 문제에 대해 과연 지금과는 얼마나 다르게 대처할 수 있을까?
물론 낭만적 복고주의는 금물이다. 지나친 발전이 낳은 재앙은 그 발전이 동반한 가장 현대적인 수단들이 없이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파리 코뮌이나 동학농민혁명 같은 기억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일은 결코 복고주의만은 아니다. 코뮈나르나 농민군을 우습게 볼 정도로 발전했다고 하면서도 유독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은 그때보다 그다지 나아졌다고 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다.
지금의 현실을 낳은 실제 역사는 어쩌면 이 결정적인 한 가지 차이 탓에 코뮈나르나 농민군이 바란 세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뻗어나갔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제 새로운 경로를 모색하며 우리가 첫 번째로 돌아봐야 할 것은 그때 그들이 잠시나마 실제로 보여준 그 '다른' 정치다. 이것이 녹색 전환이 절실히 요청되는 이 시대에 파리 코뮌이 부활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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