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인근의 아시아 스파 3곳에서 총기를 난사해 8명을 죽인 용의자 로버트 애런 롱은 사건 발생 당일인 지난 16일 범행에 쓴 총을 구입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에 따르면 롱의 차에서 9mm 구경 총을 발견했으며, 다른 총은 그의 소지품에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AP> 통신은 애틀랜타 경찰은 조지아주 홀리 스프링스에 있는 총포상에서 롱이 이 총을 구입한 것으로 확인했다. 총기상과 경찰은 롱의 총기 구매 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21세 백인 남성인 롱은 사건 당일 부모 집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날인 17일 체로키 경찰 베이커 대변인이 브리핑을 하면서 롱의 범행 동기에 대해 "정말 나쁜 날이라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던 것이 이 때문이다. 롱을 검거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의 부모가 경찰에 "내 아들인 것 같다"고 제보 전화를 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롱의 부모들은 롱이 자신들에게 쫓겨났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만든 이 발언을 한 베이커 대변인은 이후 '인종차별적 언행'이 드러나면서 해임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상태다.
롱과 그를 옹호한 경찰관의 설명에 따르면, 롱은 부모에게 쫓겨난 '정말 나쁜 날'에 홧김에 총기상에서 총을 '합법적'으로 구입하고 아시아 스파 3곳에서 8명을 죽였다. 피해자 8명 중 6명이 아시안 여성이며, 7명이 여성이다.
사건 당일 '합법적'으로 구매한 총으로 8명 살해...총기 구매 후 '대기 기간' 의무화 필요
조 바이든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이번 총기 난사 사건에 깔린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분노한다. 절대적으로 맞는 지적이다. 용의자인 롱은 가중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성중독"이라면서 인종적 증오가 범행 동기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피해자와 성별과 인종을 보면 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사건을 법적인 틀에서 '증오범죄'로 처벌할 수 있을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번 사건 이전에도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된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말까지 신고된 아시아계 대상 폭력은 3800건에 육박한다. 이 기간 동안 이미 2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이 살해됐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구조적 차별과 폭력'이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식료품점에서 맥주를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신원조회'만 거치면 누구나 총을 살 수 있는 미국에서 이런 차별과 증오심은 대규모 살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이번 사건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다.
21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조지아주를 비롯한 미국 대다수 주에서 총기 구매자들은 별다른 대기 기간 없이 현장에서 구매한 총을 바로 소지하고 다닐 수 있다. 만약 조지아주에서 총을 구매한 뒤 수령하기까지 일정 기간의 대기 시간을 설정해두었다면 이번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총기 규제론자들은 주장한다. 총을 구매한 뒤 수령까지 대기 기간을 두고 있는 주는 워싱턴 DC와 10개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기 기간' 이틀 두면 총기 살인률 17%까지 낮춰..."투표는 유권자 등록 당일 못하는데 총은 구매 당일 소지 가능"
'총기 폭력 예방을 위한 기포드 법률 센터'의 로빈 토마스 전무는 이 언론과 인터뷰에서 "총기 구매 과정은 정말 빠르다. 총포상에 들어가서 몇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신원 조회를 한 뒤 바로 총을 갖고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신이 (애리조나 사건 용의자처럼) 개인적인 위기 상황에 있다면 매우 빨리 큰 해를 깨칠 수 있다"고 말했다.
총기 규제론자들은 총기 구입과 소지 사이에 2일 정도의 대기기간을 의무화하는 것은 신원조회를 강화하고, 이번 사건 용의자 롱처럼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것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냉각기’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포드 센터는 대기 기간의 의무화가 총기 자살률을 11%까지 낮추고 총기 살인률은 17%까지 낮추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용의자 롱인 사건 당일 구매한 총을 살상 무기로 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셜 미디어에서 빠르게 확산된 게시물이 있다. 조지아주에서는 유권자 등록을 한 당일 바로 투표를 할 수 없는데 총기는 구매 당일 바로 소지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미국에서 투표는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들이 '유권자 등록'을 직접 해야만 참여할 수 있다. 투표보다 총기 구매가 훨씬 쉽다는 사실을 지적한 이 게시물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모순과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람보다 총이 많은 미국, 12분마다 1명꼴로 총기 사고로 사망
미국 인구 3억여 명이 소지한 민간 총기는 총 3억9300만여 정(2019년 통계)이라고 한다. 세계 인구의 4%인 미국인이 세계 민간 총기의 42%를 보유하고 있다.
총기 사고와 관련된 통계를 만드는 ‘총기 폭력 아카이브'(바로가기)에 따르면, 지난 2020년 1년 동안 미국에서 총기 사고로 인한 사망자(자살자 포함)는 4만3536명으로 집계됐다. 하루 평균 119명, 12분에 1명 꼴로 총 때문에 죽는 셈이다.
미국에서 총기 소유는 헌법(수정헌법 2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권리다. '무기를 가지고 휴대하는 시민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는 이 헌법 조항은 미국 건국 초기인 1791년에 만들어졌다. '개척(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침략과 약탈)'을 통해 국가를 건설한 미국인들에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총에 대한 인식은 수백년 넘게 자리 잡아온 것이다. 따라서 총기 규제를 둘러싼 논쟁은 늘 치열한 찬반 논란을 불러왔고, NRA(미 총기협회, National Rifle Association) 등 총기 규제 반대 세력은 이 헌법 조항을 총기 규제에 대한 반대 논거로 제시해왔다.
2020년 대선에서도 총기 규제는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입장 차이를 명확히 보여줬다. 바이든은 상대적으로 총기 규제에 적극적이다. 대선 당시 바이든의 주요 공약사항은 ▲총기류 제조사 규제 ▲공격용 무기 및 고용량 탄창 판매 금지 ▲연방총기법에 따른 기존 공격용 무기 소지 규제 ▲공격용 무기 및 고용량 탄창 수매 ▲총기 거래시 신원조사 등 의무화 ▲온라인 총기 판매 금지 ▲규제 관련 예산 확충 등이다. 그러나 총기 규제 방안의 상당 부분이 의회를 통해 입법화 되어야 하고, 연방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는 점에서 얼마나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바이든의 전임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추긴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극단주의와 인종차별 때문에 총기로 인한 대량살상 가능성이 과거에 비해 더 높아졌다는 사실은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이 보여준다. 이는 현재 일차적인 피해자로 부각된 아시아계 미국인만이 직면한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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