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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고 있는 이 땅의 김지영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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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고 있는 이 땅의 김지영들에게

<6411사회극장-92년생 김지영들>을 읽고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85년생 평범한 직장인 서영준입니다. 저는 책과 영화에 소개된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나이의 누나가 있고, 92년생 김지영의 직장 선배이기도 하며, 극 중 김지영 모친과 같은 이름을 가진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87년생 김지영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예비신랑이기도 합니다.

지난 8일 '6411사회극장-92년생 김지영들, 10년간 여성 삶의 변화에 점수를 매겨봤다'란 기사(☞바로가기)를 읽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불혹이 된 지금 92년생 김지영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저도 궁금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김지영이 겪은 일들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사를 보고 나서 59년생 김지영부터 92년생 김지영까지 우리사회에서 김지영은 항상 제 주변에 있었다는 걸 잠시 잊고 살진 않았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 책으로 출간되고 영화로 상영될 때 저도 그 책을 사서 읽고 영화관에도 찾아갔습니다. 영화와 책에서의 모든 장면은 저의 삶 속에 있는 일화였습니다. 다만 저는 그 일화의 주변인이었던 것이지요. 실제 여성들의 삶은 유리천장뿐 아니라 유리바닥, 유리벽에 가로막힌 엄혹한 현실만을 마주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021년 한국사회 김지영들의 삶이 나아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신 여러분들의 답은 아직까지도 이 견고한 유리집이 깨어지지 않았음을 얘기했습니다. 아직도 명절 때만 되면 찾아오는 제사음식에 대한 책임, 만연한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일상적인 성희롱과 안전에 대한 두려움까지.

미안함 반, 솔직함 반으로 이런 이야기가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제 주변친구의 경험이자, 제가 경험한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아니어서, 나는 저들과는 다르니까라는 생각으로 지나쳐왔던 그동안과는 달리 오늘만큼은 제가 여성들의 삶을 오래오래 따라다녔던 일상에서의 불평등에 대해 좀 더 곱씹어 기억을 해보려 합니다.

82년생 김지영은 경력단절의 피해자입니다. 저는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쁜 아이를 가지고 싶은 예비신부 역시 경력단절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그이는 제 급여가 좀 더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육아휴직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둘이 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저는 명쾌한 답을 내어놓기가 힘들었습니다. 단지 얼마 되지 않는 급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남자가 무슨 육아휴직이야"라는 구태적인 시선 때문에, '내 경력이 (육아휴직으로) 단절되면 어떻게 되나'하는 제 이기적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커피, 아가씨, 그리고 사소한 용기

사회초년생 시절 놀랐던 것은 상당히 많은 회사에서 아직까지 손님 응대를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행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던 과거 직장에서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커피를 제가 직접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종종 방문한 손님들이 "과장님이 왜 직접 커피를 타냐"는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누가 타는 게 뭐 중요합니까" 하며 눙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 직장을 그만 둘 때쯤에야 대표이사실엔 커피머신이 들어왔고 더이상 저는 커피타는 과장에 대한 호기심어린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놀랐던 사실은 회사를 방문하는 수많은 손님들이 여성 직원을 상대로 아가씨라고 부르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 바이어뿐 아니라 나이가 지긋하신 남성들까지도 여성 직원을 상대로 아가씨라 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때도 저는 그분들께 정확한 호칭을 부르란 말을 직접 하지 못하고 사무실에 '호칭 제대로 사용하기' 푯말을 세우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불평등은 사소함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저는 그들 앞에 서서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결코 제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나 인식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을 쉽게 비판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밝혀둡니다. 한 사람의 개인은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다채로워 어떤 부분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인식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다가도 어떤 경우에는 무릎을 탁 칠정도로 훌륭한 식견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사소한 용기란 이러한 부분에서 문제인식을 환기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제가 겪었던 경험을 조심스레 꺼내보았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삶을 전부 공감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아픔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으며 그리고 더 많이 알려고, 더 많이 연대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불평등이 제 기억과 경험 속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는, 투명한 유리가 잘 보이지 않듯이 여성들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유리집을 이기적인 불만이라고 폄하할 지도 모릅니다. 만연한 불평등 사회 속에서 어쩌면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고 보기 좋은 것만 바라보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이 유리집을 부숴야만 합니다. 유리천장만이 아닌 유리바닥, 유리벽 모두를 걷어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 레이스는 꽤 지난한 경주가 될 것 같습니다. 49.195km를 달리는 마라톤처럼 어떤 사람은 중도에 레이스를 포기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긴 호흡을 토해내며 여러분들과 함께 달릴 것입니다. 쫓아가기 버거울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을 떨쳐낼 수 있는 불혹의 김지영에게, 승진과 경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서른의 김지영에게, 이제 세상으로 첫발자국을 내딛는 김지영에게 감히 부끄러운 손을 내밀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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