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리산>을 실패할 작정을 전제로 쓴다. 민족의 거대한 좌절을 실패 없이 묘사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은 내게는 없다."
이병주는 언론인 시절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는 글('조국의 부재')을 써 오랜 술친구였던 박정희에 의해 감옥에 갔다. 이후 작가로 변신한 이병주는 1970년대 한국 최초의 빨치산 소설인 <지리산> 서문에서 이 같이 썼다.
지리산의 많은 부분은 경상남도다. 지리산이 걸쳐 있는 5개 면과 시 중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를 뺀 세 군데, 즉 함양, 산청, 그리고 이병주의 고향 하동이 경상남도다. 산청에는 안내원마을, 내원골로 불리는 마을이 있다. 너무도 깊은 산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안'과 그 한자어인 '내(內)'를 같이 사용한 곳으로, 오지 중의 오지다.
그러나 이제는 도로가 잘 닦여 있고 자연 속에 살고 싶은 사람들이 고급 별장을 지어놓은 별장촌으로 변했다. 이 별장촌을 지나 길이 끝나는 곳, '입산금지' 팻말이 있는 곳까지 차를 몰고 가면, 표시판이 하나 나타난다. '구들장 아지트'라고 쓰여 있다.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은거하다 1963년 체포된 곳이다.
그렇다. 1953년이 아니라 1963년이다! 1963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된 해이자 5‧16 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 2년이 된 때다. 정순덕은 체포 당시 사살된 이홍희와 '2인 부대'로 이 때까지 지리산에서 살아남아 총 13년 동안,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무려 10년 이상, 빨치산으로 활동해 온 사람이다.
'손호철의 발자국' 남원 편(<한국일보>, 2020년 11월 30일자)에서 살펴보았던 지리산 남부군대장 이현상은 금산 갑부의 아들로, 중앙고보(중앙고등학교) 재학 중 항일투쟁을 시작한 이래 조선공산당 건설 등을 위해 투쟁하다 빨치산으로 변한 '좌파 지식인'을 대변한다.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은 빨치산의 또 다른 얼굴을 상징한다. '무지렁이 민초'들이다. 이병주가 '민족의 거대한 좌절'이라고 표현한 지리산 빨치산은 이현상 같은 좌파 지식인만이 아니라 정순덕처럼 못 배우고 가난한 민초들로 구성됐다. 아니 이들이 다수였다.
정순덕은 1933년 산청 내원마을에서 태어났다. 산속에서 교육을 받은 기회가 있었을 리 만무해, 정순덕은 순박한 산골 소녀로 자랐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빨치산이 생기자 지리산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정순덕은 평지마을로 이주한 이듬해인 16살에 중매 결혼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은 잠시뿐이었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 점령 시절에 그들을 도왔던 남편은 북한군 협력자로 낙인찍히자 국군의 보복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
국군은 수시로 정순덕을 찾아와 남편을 찾아내라고 구타했다. 하루는 정순덕을 뒷산 비석에 묶어놓고 "아침까지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잘 생각해보고 답하라"고 말한 뒤 돌아가기도 했다. 정순덕은 추위 속에 밤새 손을 비틀어 간신히 빼냈고, 겨울옷을 챙긴 뒤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 때 나이 18살이었다. 정순덕은 남편을 만났지만, 부부를 같은 부대에 배치하지 않는 규칙에 따라 다른 부대로 배치 받아 빨치산이 됐다.
정순덕은 주로 취사, 간호 등의 일을 했는데, 얼마 뒤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1952년 정순덕은 무기를 지급받고 전사가 됐다. 한글과 한문을 배우고, 타고난 계급적 현실에 대한 정치교육으로 의식까지 갖추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워 조선공산당 입당도 허가됐다. 1953년 종전협정이 체결됐지만, "빨치산에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 투쟁을 계속했다.
"10년만 버티면 통일이 될 것이다." 정순덕은 이렇게 믿었다. 정전 이후 토벌작전은 더욱 강화됐고 1954년 들어 정순덕 부대는 세 명만이 살아남은 3인 부대로 쪼그라들었다. 식량이 떨어져 화전민들의 식량을 털어야 할 지경까지 몰렸음에도, 정순덕은 "빨치산이 인민의 양식을 빼앗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버텼다.
이들은 외딴 곳 화전민들을 관찰하고 접근해 협력자로 만들었다. 1955년 한 가족을 접촉했을 때, 다음 날 이들이 경찰에 연락하러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살해했다. 1960년 경찰의 저격으로 한 명이 죽어 3인 부대는 2인 부대로 더 축소됐다. 둘은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죽여주기로 약속했다. 1961년에는 평소 믿었던 세포 집을 방문했지만, 총을 들어 자신들을 체포하려던 가족을 몰살시킨 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망실공비는 자수하라!' 경찰은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를 지리산 전역에 뿌렸다. "순덕아 내려오래이." 정순덕 어머니의 자수 권유 방송도 내보냈다. 1963년 정순덕과 이홍희는 겨울 식량 등을 구하기 위해 가깝게 지내온 세포를 찾아갔다가 매복한 경찰과 마주쳤다. 총격전 끝에 이홍희는 즉사했고, 정순덕은 총상 입은 다리를 절단했다. 이로써 최장기인 정순덕의 13년 빨치산 생활과 '지리산 빨치산 시대'가 막을 내렸다.
정순덕은 조사 과정에서 문맹을 가장해 비상한 법정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재판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X새끼, 감형만 시켜봐라, 이 X놈아"라고 소리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순덕은 긴 감옥살이를 했다.
"2616번 정순덕 석방!" 23년 뒤인 1985년, 정순덕은 8‧15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충북 음성의 한 가톨릭복지기관에서 지내며 세례(세례명 카타리나)를 받았다. 다큐멘터리 작가인 정충제가 정순덕을 찾아와 자기 집으로 모셨다. 뱀사골 지리산역사관으로 정순덕을 데리고 갔을 때,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순덕이 한자로 된 토벌작전 희생 군경 충혼탑의 추모글을 거침없이 읽자 정충재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문맹의 산골소녀가 빨치산 투쟁 과정에서 한문까지 거침없이 읽을 수 있는 지식과 의식을 갖춘 것이다.
정충제는 취재와 정순덕의 구술에 기초해 <실록 정순덕>을 출판했다. 그러나 쓰지 말라고 당부했던 인민재판 이야기를 기록하자 정순덕이 분노해 결별을 선언했다. 정순덕은 이후 비전향장기수들이 모여 사는 '만남의집'에서 살았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의해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자신이 감옥에서 쓴 전향서는 고문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며 송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송환되지 못했다. 2004년 71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북한은 김일성의 특별지시로 1964년 정순덕을 주제로 한 <지리산 여장군>이란 영화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상영이 중단됐고 영화도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영화 상영 중 정순덕이 체포됐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정순덕이 대북방송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정순덕은 전향한 남파간첩 김남식 씨가 감옥 순회강연에서 이 사실을 말해 알게 됐다고 한다.
지리산에는 크기에 걸맞게 역사관이 여럿 있다. 뱀사골에는 실내 역사관과 지리산 토벌작전으로 희생된 군경을 위한 충혼탑과 조각이 야외에 있다. 구례 화엄사 입구에는 화엄사를 살린 차일혁 총경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놓은 지리산문화역사관이 있다. 이현상이 사살당한 하동 의신마을에도 작은 지리산역사관이 있다. 이곳에는 사살당한 이현상의 사진이 걸려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이 찡하게 한다.
지리산 역사관 중 가장 큰 것은 산청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이다. 이름에서 반공주의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이 전시관 정원에는 당시의 탱크 등 여러 무기들이 진열돼 있으며, 빨치산 전쟁을 상징하는 다양한 조각들도 같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건물에는 빨치산 전쟁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는데, 전시관 이름과 달리 반공주의가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전시 내용 중, 토벌부대(백야전사)의 대장이 친일 행각으로 최근 논란이 된 백선엽이었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그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최근 백선엽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때, 그 앞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전시관 언덕에는 정순덕의 구들장 아지트를 재현해 놓았다. 아궁이의 솥단지를 들어내 구들장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은 뒤, 다시 솥을 얹어 물을 끓이는 방식으로 검색 나온 경찰을 완전히 따돌리도록 고안한 설계가 기가 막히다.
이 아지트를 보고 있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몰랐던 순박한 산골소녀가 한국 역사상 최장기 빨치산 투쟁을 한 '최후의 빨치산'이 돼야했던 이 땅의 비극적 역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동 이병주문학관에는 이병주의 유명한 말이 쓰여 있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지리산의 한 산골소녀는 그렇게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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