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옥 17회. 의열단원이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무장투쟁을 추구하다 40살에 감옥에서 숨진 독립투사는?
많은 사람들은 직업적인 혁명가를 연상하겠지만, 그는 이원록, 일본 조서에는 '이활'로 기록된 문학가이다. 이원록, 이활 하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첫 죄수번호였던 264번을 따서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중략)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의 대표적인 시 '광야'를 되뇌며, 나는 '최고의 항일문학가'인 이육사를 만나러 안동 도산서원을 향하고 있다. 고향이 그 근처인 그의 문학관은 한국성리학의 성지인 도산서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육사는 이퇴계의 14대 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이만도 역시 퇴계 직손으로 경술국치를 당하자 곡기를 끊고 자정순국했다. 아들 이중업은 대한독립회 등에 깊이 관여했고 며느리 김락 역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고문으로 실명하는 등 가족 중 9명이 독립유공자이다.
베이징 감옥에서 이육사의 시신과 유작들을 챙겨 나와 우리에게 그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도 이육사의 친척이었다. 이병희는 여학교를 중퇴하고 방직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다가 투옥당하기도 했고, 베이징으로 망명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이육사의 유작 등을 거둔 것이다.
안동에 있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들어서면 "전국적으로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 어디냐"는 질문이 제일 먼저 보인다. 경북은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을 제일 먼저(1894년) 시작했고, 나라가 망하자 목숨을 끊은 자정순국자(17명)도 제일 많다. 독립유공자도 유일하게 2000명이 넘는 2116명으로, 인구비율로 따져 제일 많다고 한다. 사실 도 단위에서 독립운동기념관을 만든 곳은 경북뿐일 것이다.
특히 한국 유학의 중심인 안동은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인구 16만 명 안동은 무려 941명에 달하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퇴계 자손들만이 아니라 안동 명문가들과 유림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퇴계의 진성 이씨 52명, 의성 김씨 47명이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마을로는 의성 김씨의 내앞마을,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 안동 권씨의 가일마을, 풍산 김씨의 오미마을이 대표적이다.
독립운동기념관 코앞에 있는 마을이 '마을 앞에 개울이 흐른다'는 의미의 '내앞마을'이다.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수제자였던 김성일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로, 제국주의의 침입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학을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한 '혁신유림'의 본고장이자, 전통사회 안동에 혁명을 몰고 온 '혁명발상지'이다.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독립기념관을 바로 이 마을에 지은 것이다. 이 마을은 1910년대에 인구가 700명에 불과했지만 김대락, 김동삼 등 독립유공자를 18명이나 배출했다.
내앞마을 혁명성의 상징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으로 '삼천 석 댁'으로 불린 의성 김씨 가문의 장손 백하 김대락의 고택인 백하구려(白下舊廬)이다. 김대락을 비롯한 김씨 문중은 의병운동이 실패한 뒤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껴 유학의 심장부인 이곳에 근대적인 협동학교를 세웠다.
아름답게 보존된 고택에 다가서자 고택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돌이 나를 맞았다. 이 돌이 유학 혁신의 슬픈 역사를 상징한다. 1909년 협동학교가 모두 단발을 하자, 분노한 유림들이 밤에 쳐들어와 숙직을 서고 있던 교사 등을 이 돌에 머리를 놓고 베어버렸다고 한다.
내앞마을 사람들은 결국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을 가기로 결심했다. 망명길에 나선 사람은 김대락, 김동삼 가족 등 15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만주 삼원포에서 신훙무관학교를 만들어 청산리대첩에 참여하는 많은 독립군들을 길러내는 등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다.
"광복이 되기 전에는 나의 유해를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유명한 유언이다. 그의 본가는 99간의 임청각이다. 그는 노비들을 해방하고 큰처남인 김대락(김대락의 여동생은 이만도의 며느리 김락이다)과 함께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임청각과 땅을 팔아 독립자금을 댔다. 놀란 문중이 돈을 모아 사들인 종가 임청각의 소유권은 68명에게 나뉘어 있다가 최근에 정리했다고 한다.
이 집안도 독립유공자만 3대에 걸쳐 9명을 배출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임청각 한가운데를 관통하도록 중앙선 철도를 놓아 고택을 잘라냈으며, 반쪽만 남은 고택 바로 옆으로 기차가 다닌다. 잘려 나간 고택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아프다(최근 중앙선을 고속철도화하면서 옛 철로가 불필요해지자 임청각을 관통했던 철로를 철거해 임청각을 복원하기로 했다).
안동은 '좌파' 독립운동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 독립운동기념관에는 일본 경찰 앞에서 작성한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였던 김재봉의 조서가 눈길을 끈다.
풍산 김씨 집성촌인 풍산읍 오미마을에 가면 그의 고택이 있다. 3.1 운동 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감옥을 갔다 온 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노동자대표로 참석했고, 1925년 서울 아서원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됐다. 이후 오랜 감옥살이를 하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눈을 감았다. 고택 앞에는 커다란 돌에 새져진 '조선독립을 목적하고'라는 글이 그의 한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양반 명문가인 안동 권씨가 모여 사는 가일마을은 풍산읍의 또 다른 마을로,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린다. 6.10 만세운동의 주역인 권오설 등이 중심이 되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녹슨 철관이다. 일제가 권오설을 얼마나 혹독하게 고문했는지, 가족들의 입관도 허락하지 않고 그의 관을 열어보지 못하도록 철관에 넣어 봉인해 매장을 한 것을 몇 년 전 이장을 하며 파내온 것이다. 이는 비인도적인 폭거지만 최소한 시신을 돌려줬다는 점에서 그래도 '인도주의적'이었다. 고문 흔적을 유가족들이 못 보도록 인혁당재건위라는 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시킨 일부 혁신인사의 시신을 강제로 화장한 박정희에 비하면 그렇다.
외지에서 학업 등으로 떠돌던 권오설은 3.1 운동으로 감옥을 다녀온 뒤 귀향했다. 그는 문중 서원에 강습소를 만들어 농민들을 가르치고 소작회를 만들어 일본 지주들과 한인 대지주들에 저항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이후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6.10 항쟁을 주도해 감옥에 갔다가, 출소 100일을 앞두고 고문으로 사망했다. 가일마을의 그의 집은 가슴 아프게 무너져 없어지고 잡초만 무성하다. 대신 마을입구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커다란 기념비가 그가 농민들을 위해 싸웠던 넓은 풍천 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런 표현이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다행스럽게도' 김두봉과 권오설은 해방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은 덕으로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뒤늦었지만 얼마 전 독립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의 반공주의 속에서 이들이 완전히 복권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독립운동기념단체들이 권오설의 묘 입구에 안내석을 설치했는데, 얼마 뒤 누군가 안내석의 모퉁이를 깨버렸다.
안동의 독립운동을 돌아보고 느낀 것이 있다. 안동이 '양반의 유림의 중심'답게 독립운동에서 '노블리스 오블레주'를 모범적으로 실천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많은 친일 인사들을, 또 갖가지 핑계로 군대를 가지 않고도 입만 열면 국가안보를 떠드는 요즘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이는 높이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타까운 것이 있다. '손호철의 발자국'10. 전북 정읍 무성서원 편(<한국일보> 2021년 1월 12일자)에서 지적했듯이, 이 노블리스 오블레주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때늦은 애국'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양반과 유림들은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동학군의 연대투쟁 제안에 대해 오히려 민보군을 조직해 동학군을 분쇄하고,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뒤늦게 의병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애국심보다 지배계급으로서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가까운 문경에서 효령대군의 직손인 의병장 이강년 장군이 동학군의 대의에 공감해 동학 지휘관으로 일본군과 싸울 때, 안동은 유림의 중심지답게 민보군을 조직해 지역 동학군을 척결했고, 동학군이 강했던 예천에 3500명의 민보군을 지원군으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내앞마을의 혁신유림 등이 조금만 더 일찍, 조금만 더 개방적 자세로, 봉건적 유학을 혁신하고 동학군과 함께 항일투쟁에 나서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동안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30회에 걸쳐 되짚어왔던 <한국일보> '손호철의 발자국' 칼럼이 이제부터 <프레시안>에서 주 3회씩 연재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서, 지역 곳곳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높이고 '교양 있는' 여행을 돕기 위해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발로 뛰며 쓰는 한국 근현대사 기행입니다. 제주와 호남을 시작으로, 영남, 충청, 강원, 경기, 서울까지 약 60회에 걸쳐 이어질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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