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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당한 일이 성폭행이 맞다면, 대표가 처벌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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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당한 일이 성폭행이 맞다면, 대표가 처벌받을 수 있을까요?"

[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 2] 열네 번째 이야기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 보니 10년이 훌쩍 넘는 경력단절이 생겼어요. 일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이 제 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된 이후로 사이버대학도 다니며 다시 공부를 했지만, 신입이나 다를 바 없는 40대 여성을 써주는 사무실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과거 직장 다닐 때 알던 거래처 대표를 만나게 되었고, 용케 취업이 되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첫 회식에서 주는 대로 술을 마셨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방 안이었습니다.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원치 않는 성관계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대표의 아파트였습니다. 그 대표가 친밀한 척하면서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습니다. 술도 덜 깬 상태에서 거기가 어딘지도 잘 몰라 당황해서 일단은 옷을 챙겨 입고 대표의 차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다음날부터 대표가 업무차 외출이라며 저를 불러냈고, 원치 않는 성폭력을 이어갔습니다. 남편이 알면, 아이들이 알면, 사람들이 알면 어떡하나 때문에, 이러지 말아 달라고 말로 부탁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애원은 쉽게 무시됐고, 결국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한 달쯤 뒤 퇴사했습니다.

제가 당한 일이 성폭행이 맞다면, 대표가 처벌받을 수 있을까요?"

전날 직장 상사와 술을 마셨는데 다음 날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옷을 벗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는 사건들에 대한 상담이 여전히 적지 않다. 업무상 위력이 있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준강간이 발생한 사건에서는, 당황해서 그 직후 신고는 하지 못한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였다거나 1차 피해 이후 당황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추가 피해에 속수무책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건이 알려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해자를 향해 혀를 차지만, 사법기관에서 이런 사건들에 대해 유죄를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다.

위 상담자의 경우와 같은 사례를 피해자들이 갖는 억울함이 크지만 실제 고소를 한 후 가해자에 대하여 기소가 되거나 유죄가 인정되는 것에는 난항들이 예상된다. 우선 준강간죄 사건에서는, 통상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는지 여부 또는 성관계는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의사에 반하였는지에 대하여 입장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상당수의 피해자가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피해자에게 범죄 행위 당시의 기억이 없는 사건이니, 그 진술로서 범죄 입증을 시키기 어렵다. 결국 이를 판단 주체 입장에서는 사건 전후의 사정을 들여다보고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가 사건을 인지한 직후에 어떻게 조치하였는지의 궤적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위 사건에서 피해자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현재의 법 현실에서는 범죄 성립 입증이 어려울 수 있다. 통상 이런 경우의 피해자가 사건 직후 가해자와 갈등하거나 직전의 상황에 반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하기보다 멍한 채 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사건 현장을 벗어난다. 그 직후 신고나 항의 등 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가해자의 행위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입증하기 훨씬 어려워진다.

그런데 일상 공간을 함께 지속하고 있고 업무상 위력이 존재하는 관계에서, 피해자가 충격을 수습하고 가해자에게 단호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왕왕 있다. 한국 사회가 가진 특성상 피해자는 자신이 되려 잘못 처신했다고 여겨지며 구설수에 오르는 것에 대한 걱정까지 하는 일도 잦다. 그러면서 외관상 가해자와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하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이런 사건의 상당수 피해자가 심적 충격과 부담 속에 마치 가해자에 대해 약점이 잡힌 것처럼 심리적 '을'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속에 자칫 상대의 성적 요구에 처음보다 더 저항하지 못한고 응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곤 하는데, 이런 일들이 피해를 입은 때로부터 연속해서 발생할수록 차단이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업무상 위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범죄 행위를 업무를 같이 하는 지속적 또는 일시적 내연관계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대두시키며 '증거 불충분'이란 이름으로 이끈다.

피해는 언제 어디서 누가 입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피해가 발생한 후 해야 할 조치에 대해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 전날 술을 마시고 눈을 떴는데 준강간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있다면, 되도록 가해자와 함께 그 공간을 나서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나설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그 자리에서 신고할 수 있다면 신고를 하는 것도 괜찮다. 다만 술이 다 깨지 않은 상황이라면 수사기관에서 피해 진술은 그 즉시 하기보다는 성폭행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술이 좀 깬 후 진술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좋다.

이번 한 번만 눈을 감으면 더는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금물이다. 가해자가 정식으로 사과를 해오는 것이 아니라면, 업무상 위력이 있는 관계에서 애매한 태도로 만남을 청하는 등의 행태는 대게 이미 일어난 일을 범죄에서 특별한 관계로 전환하려는 수작의 일환이다. 그런 상황들이 자칫 재차 벌어지는 성폭력으로 이어지면, 피해자는 점점 더 신고를 망설이게 되고 신고를 망설이는 동안 누적된 피해는 점점 더 소명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신고가 필수는 아니더라도 피해 후에 가해자로부터의 연락이나 만남은 차단하는 것은, 이후 추가 피해의 예방을 위해서나 향후 신고하여 피해를 소명 받고자 할 때 가장 도움이 되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위 사연의 상황이 성폭력이 아닌 게 아니다. 사회와 법은 위와 같은 성인들의 성범죄 사건들이 그 상황의 본질에 맞게 수사되고 판단될 수 있도록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다. 법이 당장 범죄라고 명명하지 않는다고 파렴치가 합리화되는 것도 아니다. 가해자도 알아야 할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함께 알아야 할 일이다.

* 이은의 변호사의 칼럼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가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일상생활 속 성희롱·성폭력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언제든, 어떤 사연이든 언니에게 털어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은의 변호사 메일(ppjasmine@nate.com)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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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의 변호사(ppjasmine@nate.com)는 이은의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이나 아래 전화로 연락을 주십시오. (평일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 02-597-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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