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동학대, 양육비 지원이나 처벌제도 개선만으로 막을 수 없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동학대, 양육비 지원이나 처벌제도 개선만으로 막을 수 없다

[김귀옥의 평화문화만들기] 사랑의 공동체 회복하려면

3월이다. 코로나19 백신도 공급되고 있으니 희망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돌아보면 이번 겨울은 유달리 추웠다. 코로나19 때문만도, 날씨 때문만도 아니었다. 아마도 16개월의 짧은 생을 마친 '16개월 입양아 학대 사망사건(정인이 사건)'의 충격이 쉽게 가라앉질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인이 또래 어린아이의 부모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지난 1월 초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가 방영했던 '정인이는 왜 죽었나?'를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나조차도 그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슴이 떨려 보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정인이 양부모 재판 과정이나 '아동학대 반대 시위' 과정에서 시민들로부터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 분노는 양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경찰과 담당 구청, 병원, 입양기관 등에 대한 공분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아동학대사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고 있다. 아동학대사건의 가해자는 양부모나 어린이집 교사만이 아니다. 친부모조차도 아동 학대나 직·간접적 살해를 저지르고 있다.

지난 2월 10일 구미에서 발견된 3세 여아 사망사건을 보면 단순히 22살의 무책임한 친모, A씨에 의해서 전기도 끊어진 집에서 수 개월간 방치된 3세 여아가 죽음에 이른 사건 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 A씨를 중심으로 한, 가족 관계의 파괴를 직감하게 된다.

아동학대, 무엇이 문제일까?

20세기를 돌아봐도 아동학대문제는 심각했다. 100년 전인 1921년 7월 30일, <조선일보>에 가정폭력이나 학교(서당)폭력에 희생당하는 아동이 신체발육이 어렵고 불구자가 되기도 하니, 아동보호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1924년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제안한 것은 당시 아동들이 어른들로부터 무시와 천시, 학대받던 상황을 바꾸겠다는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후에도 아동 학대에 대한 문제는 그치지 않았다.

어린이날이 먼저 도입되었고, 아동문학이 일찍이 자리 잡혔던 일본에서도 아동학대문제는 심하면 심했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정인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2018년 다섯 살 여자아이의 사망 사건이 한국에도 알려져 공분을 금치 못했다.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은 정인이사건처럼 양부모나 계부모인 경우는 10% 미만이다. 오히려 가해자의 70~80%는 친부모이다. 학대로 사망하는 아동의 숫자는 한국이나 일본의 정부 자료에 따르면, 모두 매년 수십 명에 달한다. 보건복지부의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자 자료에 따르면, 2014년 14명, 2016년 36명과 2017년 38명, 2018년 잠시 낮아졌다가, 2019년 42명으로 보고되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 건수에 있어서 2015년 1만 6651건에서 2019년 3만 8380건으로 급성장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 건수에 있어서 2020년 신고 건수는 2019년에 비해 줄어든 3만 8100여 건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2020년 일본 경시국에 따르면 일본의 아동학대 적발 건수가 역대 최대였다고 한다. 또한 2020년 비영리재단 '세이브더칠드런'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37개국 아동학대 신고비율은 코로나19 이후 평균 19% 증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지난해 아동학대신고 건수가 줄어든 것은 K방역의 성공과 같은 요인의 결과일까?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지난해 7월 제출한 '의료기관 아동학대 신고율 제고방안'마련을 위한 정책토론회 자료에 따르면, 한국 의료진의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2016년 216건으로 등록 의료진의 0.8%만이 신고했다고 한다.

그러한 형편은 교사 역시 비슷하다. 2021년 1월초 5일간 유·초·중·고·특수교사 800명에 대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아동학대 의심사례 목격 교사는 40%에 이르지만, 신고 경험 교사는 19% 정도에 불과하다.

아동학대 관련 의사나 교사, 어린이집 교수, 아동복지시설 및 청소년시설 종사자 등 모두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상 신고의무자다. 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로는 대개 신고 후 받게 되는 절차적 불편함 때문에 묵과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난해 감소된 아동학대 신고건수는 허위적인 것이라는 결론이다. 더군다나 코로나19상황에서 아동학대 전문가들은 아동학대가 늘었으면 늘었지, 감소되었을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대책없이 확산된 재택근무, 실업을 포함한 고용불안정 상황은 가족을 위기로 몰았다. 평소에도 많은 부부 맞벌이 세대에서는 신체적·정신적 여유의 부족으로 인해 가족들간에 원만하게 의사소통을 나누기 어려웠다.

부부의 갈등이나 불화는 가족관계에서 약자에 해당하는 자녀에게로 전이되기 쉽고, 자녀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게 일반적 관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동학대 문제의 해결책으로 가해자에 대한 강경한 처벌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복지비로 해체된 사랑의 공동체를 회복할 수 없다

여기에 아동학대의 유발 원인으로 한 가지 더 짚어보고 싶다. 사랑과 배려, 나눔이 결여된 가족공동체의 문제다.

전통시대의 3대 이상의 세대가 동거했던 가족공동체가 반드시 좋았던 것은 아니다. 가부장 문화와 질서에 따라 여성이나 어린 자녀들은 가부장에 종속된 존재였고, 가족간 적서차별도 엄청난 사회적 문제였다. 예외는 있었지만 대개의 가정에서 아이들은 천시의 대상이 되곤 했다. 반면 전통적 가족공동체에서는 조부모나 다른 친·인척의 개입으로 인해 부모라고 하여 자녀를 마음대로 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이제 와서 전통시대의 가족공동체로 돌아갈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맞는 사랑과 배려, 나눔의 공동체를 재구성할 수 없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한편 정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직면하게 된 인구절벽시대의 세계적 저출산 문제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결혼과 출산의 유인책으로 도입된 것 중 하나가 양육수당을 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비혼주의자들에게 정부나 누군가가 1억원을 준다면 결혼과 출산을 하겠냐고 제안한다면, 비혼주의자 대부분은 거절할 것 같다. 또한 무자녀주의 부부들에게 1억원을 줄테니 출산과 양육을 하라고 해도 대부분의 부부들은 싫다고 할 것이다.

이미 결혼과 출산, 양육이 인간으로서의 숙명이 아님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 생각을 바꿀 강력한 이유가 없는 바에야, 책임지기 어려운 결혼과 출산, 양육의 짐을 떠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 이래로 대통령 후보자들이나 지자체 후보자들의 핵심 공약에는 빠짐없이 복지제도가 열거되어 있다. 그러나 2020년 기준 OECD국가 평균 사회복지지출비율 20.0%에 비해 한국의 사회복지지출비율은 6.8%로서 평균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가정을 둘러싼 복지비를 OECD 평균, 즉 지금보다 3배쯤 늘린다면 가족공동체가 회복이 되고 아동학대가 줄어들까? 물론 더 많은 복지비가 사람들의 안정적 관계를 가져오는데 일정 정도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배려, 나눔의 공동체를 회복하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복지비는 그러한 공동체를 구현하고 지속가능하게 하는데 필요조건 중 하나일 뿐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을까?

사랑이나 배려, 나눔도 배워야 실천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적 표현들이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도 돈만 있으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사랑에 기반한 각종의 관계에도 자유와 함께 책임이 있다. 그러한 자유나 책임을 행사하는 방법을 가정으로부터 학교, 사회로부터 제대로 배워야 알 수 있다.

정인이 양부모가 왜 정인이를 입양했는지, A씨가 왜 아이를 낳아 길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상황에서 그 소중한 아이를 어떻게 사랑과 책임으로 키워야 하는 것인지 제대로 배운 적이나 있을까?

서구 산업화와 민주화의 300년의 시간을 한국은 30년간 겪으면서 나름대로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에는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과 생명을 존엄하게 대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관계 맺는 철학과 방법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더 많은 돈과 권력, 탐욕을 추구하는 사이에 사랑과 배려, 나눔으로 맺어져야 하는 공동체를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버린 것을 다시 찾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또한 개인적인 각성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국가가 명령이나 법제도로써 강제한다고 하여 생길 수 없다. 사랑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은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 다음 글에서는 깊은 우울과 고민을 걸러내어 새로운 길을 찾아볼 예정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귀옥

김귀옥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월남민의 생활세계와 정체성: 속초'아바이마을'과 김제 '용지농원'을 중심으로>(1999)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한성대 교양학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로 구술사 방법과 현지조사를 통해 분단과 전쟁, 여성과 민중, 이산가족과 디아스포라 등의 주제로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구술사연구: 방법과 실천>,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이산가족>(한국과 일본에 소개), <우리가 큰 바위얼굴이다> 등이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