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대화 마당에서 소외되게 만드는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헌법재판관 앞에서 '진실유포죄'는 필요한 법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9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위헌 여부를 따지는 변론기일에서 정부법무공단 쪽이 한 말이다.
법무공단 변호인은 ‘표현의 자유보다 개인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취지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존치를 주장했다.
헌법소원을 청구한 사람은 동물병원 이용자 A 씨였다. A 씨는 2017년 8월 동물병원에서 치료받은 자신의 반려견이 실명 위기에 처하자 동물병원의 수상한 치료 행위를 폭로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안 A 씨는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법소원에 대한 정부 견해는 ‘사실을 말할 자유를 함부로 주어서는 안 된다‘로 요약할 수 있다.
법무공단 변호인은 "현대사회에서의 개인의 ‘명예‘는 의사소통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자격"이라며 아무리 사실이더라도 누군가의 명예가 훼손되면 유포자를 형사 처벌하는 것이 옳다고 변론했다.
A 씨 사건을 비롯해 15일 기준, 헌법재판소가 심리 중인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위헌 확인 사건 수는 총 5개다. 지난해 10월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사단법인 <두루>와 함께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한 사건, 최근 사단법인 <오픈넷>이 제기한 사건도 여기에 포함된다.
정부의 주장대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명예란 무엇일까.
사실적시 명예훼손 유죄 판례를 살펴보면, 그 단면을 알 수 있다. <셜록>은 지난해 12월부터 <‘진실유포죄‘를 고발합니다> 기획을 통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형사 처벌된 사례를 보도하고 있다.
성폭행 가해자 삼촌의 명예를 수호하다
성폭행 가해자 B 씨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덕을 본 사람이다. B 씨는 미성년인 자신의 조카 몸을 마음대로 만진 성폭력 가해자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인 조카가 중학교를 졸업 때까지 괴롭혔다. 조카는 성인이 되어서도 심한 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를 앓았다.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카의 불행과 달리 B 씨는 승승장구했다. B 씨는 도청에서 고위공직자로 일했다. 조카는 30년이 지났지만, 늦게나마 삼촌의 잘못을 묻고 싶었다. 피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2008년 9월, 조카는 삼촌이 근무 중인 OO도청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B 씨의 과거를 풀어놓았다.
"그런 놈이 우리나라 고위 공무원으로 떵떵 거리며 살아도 되는 걸까요? 불쌍한 고아 조카를 6년 동안이나 철저히 유린하고 가족들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죄인으로 살게 만든 그 사람."
B 씨는 조카의 주장이 거짓이라면서 조카를 ‘허위사실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법정 공방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법원은 조카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조카가 쓴 게시글이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했는데, 오히려 그게 유죄 이유였다.
법원은 조카에게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해 2010년 11월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유예했다. 이렇게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성폭력 피해자 조카의 입을 막아 B 씨의 명예를 지켰다.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을 고발한 성범죄 피해자를 ‘역고소‘할 때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활용되는 흔한 예다.
부패 한약으로 불편 야기한 한의원 명예 지키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소비자의 입을 막기도 한다. 대전의 한 한의원 대표 C 씨는 피해를 호소하는 환자 가족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1살, 3살 자녀를 위해 지은 한약이 조제 한 달 만에 상하자 환자의 부모는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C 씨는 글을 올린 환자 부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1심 법원은 공익적인 목적으로 글을 썼다며 환자 부모의 손을 들어줬다. 2심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공익이 아닌 비방의 목적으로 글을 썼다며,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벌금 50만원 형을 선고했다.
이처럼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앞에서 소비자의 권리는 종종 묵살된다. 법원은 인터넷 글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봤지만, C 씨의 고소 이후 환자 가족이 올린 글은 삭제됐다.
댓글 조작 벌인 대성의 명예를 보호하다
국내 대표 교육기업을 표방하는 디지털대성 또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덕분에 부끄러운 일을 숨겼다. 대성은 ‘삽자루‘라는 예명으로 유명한 수학 강사 우형철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그가 내부고발을 이어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우 씨는 대성을 비롯한 인터넷 강의 업체의 댓글 조작을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이다. 우 씨의 주장대로 대성은 바이럴업체과 계약을 맺은 후 가짜 아이디를 돈으로 사서 대성을 위한 여론 몰이를 하도록 시켰다. 대성은 댓글로 자사 강사는 띄우고, EBS를 비롯한 타사 소속 강사는 깎아내렸다.
법원은 우 씨의 폭로는 사실이지만, 그 탓에 대성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우 씨가 처벌된 이후, 대성 측은 댓글 조작을 지속한 것으로 최근 드러났다. 대성마이맥 소속 국어 대표 강사 박광일 씨는 IP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필리핀에 댓글 공장을 차렸다가 검찰에 덜미가 잡혔다.
수사 결과, 박 씨의 댓글 조작 의혹을 제기한 우 씨의 주장은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 박 씨는 지난 1월 18일 구속됐다.
독일에서는 유포된 사실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거나 허위로 드러날 경우에만 처벌한다. 진실한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는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독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명예훼손 문제를 형사가 아닌 민사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
합헌 결정한 헌재 "우리 사회는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지난 2016년 2월 헌법재판소는 '진실유포죄'에 대해 위헌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형사 처벌하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제1항에 대해 7대2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청구인들은 '비방할 목적'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비판할 목적'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헌재는 이를 부정했다. "'비방의 목적'은 '비판할 목적'과 충분히 구별될 수 있고, 이것들이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불명확한 개념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청구인의 주장을 배척했다.
정부법무공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이다.
헌재는 "사회구성원들 상호간의 자유로운 교환이 보장되어야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면서 "정보통신망의 빠르고 광범위한 파급효과로 훼손된 명예가 회복하기 쉽지 않고,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김이수, 강일원 헌법재판관은 반대의견을 통해 '진실유포죄' 폐지를 주장했다.
이들은 "진실한 사실을 적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표현행위를 자제하게 되는 위축효과를 야기할 수 있다"면서 비방할 목적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 '비판할 목적'의 구별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공공의 이익과 비방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재판관은 "공개할 공익이 큰 행위일수록 비방할 목적이 더 커지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비방의 목적과 공공의 이익이 상반된다는 대법원 판단에는 무리가 있다고 봤다.
실제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를 보면 재발방지를 위해 강한 어조로 비판을 했다가 문제가 된 경우가 많다. 비판 수위를 높였다가 비방의 목적으로 비춰져 유죄를 받은 셈이다.
C 한의원으로부터 고소당한 환자 가족은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다는 이유로, 우형철 씨는 '양아치' 등의 표현을 썼다가 비방의 목적으로 인정됐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비판하려면 비방의 목적으로 비춰지지 않게 조심해야한다는 뜻이다.
임금 체불을 당한 사람이 임금을 빨리 받기 위해 회사 사장을 독촉하더라도 '사기꾼'과 같은 단어를 잘못 쓰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 법이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