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내민 재난기본소득이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 사안에 조금만 관심 있다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비난이다. 전국민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을 때도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이 일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좋지 않은데다, 트럼프가 일으킨 혼돈을 직면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 포퓰리즘은 나쁜 것을 넘어 몹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어떤 정책을 두고 가해지는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이런 방식으로 쓰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에서 '포퓰리즘'이란 용어는 보편적인 혜택을 주는 복지정책을 비판할 때 자주 쓰인다.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예가 바로 서울시에서 벌어졌던 '무상급식' 논란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게는 아픈 기억이지만, 이 당시 무상급식이 '포퓰리즘'이란 여론을 주도한 당사자가 오 전 시장이다. 소득과 자산소유 수준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누구나에게 복지 혜택을 주는 것은 '포퓰리즘'이란 점을 오 전 시장은 시종일관 강조했다. 이런 보편 정책은 불필요한 사람들에게까지 도움을 줘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재정을 악화시키는 나쁜 정책이라는 것이다.
당시 무상급식 논란에선 오 전 시장이 패배하며 서울시장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일어났다. 돌이켜보면, 이런 정책의 시행이 유권자가 선출한 시장이란 대표자의 자리를 걸어야만 하는 일인지 의심스럽지만, 오 전 시장은 보편혜택을 막기 위해 시장 직위까지 내던진 정치인이 됐다.
이는 한 사례에 불과하다. 2000년대 이후 많은 개혁적 정책, 특히 그 개혁적 정책이 조금이라도 보편적 요소를 갖고 있다면 '포퓰리즘'이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졌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이란 용어는 대개의 경우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정당의 정책을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쓰여 왔다.
이 와중에 정치적 장에서 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서 '포퓰리즘'은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은 일단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보편적 혜택은 용서받아야 자격을 얻는다
그러다 보니 보편적 혜택이 주어지는 정책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일단은 잘못된 것처럼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전국민 재난지원금, 포퓰리즘 맞지만 '용서받을 정치'다." 전국민재난지원금 논의가 한창이던 때에 나온 한 칼럼의 제목이다.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선심성 정책으로 나라의 곳간을 비게 하는 정말 나쁜 것이지만 코로나 국면이니 이번 딱 한번이라면 '면죄부'를 받을만하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포퓰리즘'이 마법의 용어로 등장한다. 이 발상에는 이미 보편혜택을 주는 정책이 일종의 '죄'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렇기에 이런 정책은 용서받아야만 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우리 언론이, 우리 정치가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온 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오랫동안 이런 용어의 사용에 노출되어 오면서 우리 '안'에는 내적으로 '반포퓰리즘' 정서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반포퓰리즘' 정서의 밑바닥엔 '모든 이들에게 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치꾼과 (특히 보수)언론은 그 반감을 이용해, 내 정적에게 이익을 주는 정책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포퓰리즘으로 둔갑시켜 공세에 나선다.
포퓰리즘의 중심엔 정책이 아닌 정치지도자가 있다
그런데 '보편적 혜택을 두는 정책'을 비난하기 위해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남용하는 건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독특한 경향이다. 당대 세계 곳곳에서 보이고 있는 '포퓰리즘'의 중심엔 정책이라기보다는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포퓰리즘 운동을 이끄는 '정치지도자'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당대 포퓰리즘 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지도자의 중요성을 든다. 포퓰리즘 이론에서 중요한 연구자인 마가렛 캐노반(Margaret Canovan)은 포퓰리즘을 일종의 운동으로 보면서, 이 모든 포퓰리즘 운동에 돋보이는 선동적인 지도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지도자가 힘을 잃으면 그 포퓰리즘 운동도 힘을 잃는 식이다. 그 한 예로 네델란드에서 2002년 핌 포르퇴인이라는 선동적 포퓰리스트가 암살 된 후 그가 동원한 운동이 이내 사라져 버렸음을 예로 든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예를 들어보라면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를 들 수 있다. 2016년 미국대선은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온 현장이었다. 하지만 샌더스는 힐러리와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하면서 그 힘이 한풀 죽어버리고 말았다. 샌더스가 힘을 잃으면서 그 지지자들도 쇠약해졌다. 반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 지지자들의 기세는 극에 달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금 미국에서 탄핵시도와 같이 트럼프를 정치적으로 재기하지 못하게 하려는 움직임은, 알고 보면 트럼프를 꺾어놓아야 그 지지 세력이 자연스럽게 힘을 잃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포퓰리즘 운동이 작동하는 패턴이다.
수많은 연구들이 포퓰리즘 운동에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힘은 정책도 그 무엇도 아닌, 그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의 존재감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라클라우 같은 이들은 지지자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이름이라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포퓰리즘 운동에서 핵심은 정책이 아니라 지도자의 존재감이며 이들이 내거는 정치적 레토릭이다.
이들에겐 대중의 지지 그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기에, 정책의 일관성을 기대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결코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 어떤 정책도 지도자가 사라지면 힘을 잃는 게 포퓰리즘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포퓰리즘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이란 용어는 어떤 방식으로든 재활용할 수 없을 만큼 불신에 가득 찬 것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포퓰리즘'이란 용어의 사용법은,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쓰임새와 이 현상의 본질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언론과 정치인들이 쓰고 있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개혁적 정책을 가로 막고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한 하나의 프레임일 뿐, 실체 없는 용어에 훨씬 더 가깝다는 데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실체 없는 용어가 사회복지정책의 범위와 방식을 결정하는 일을 넘어, 무상급식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교육의 방식, 더 나아가 민주주의, 안보의 태도까지 규정하는데 쓰이고 있다는 작금의 현실이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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