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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실신' 하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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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실신' 하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김귀옥의 평화문화만들기] 일자리, 국가와 기업의 책무

코로나19는 대학 졸업식 풍경도 바꿨다. 지난해 2월 대부분의 대학들은 졸업식을 취소했고 올해는 비대면 방식을 활용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여전히 바뀌지 않는 모습은 졸업생의 우울함이다. 적지 않은 졸업생들의 취업 전망이 불확실하고, 취업 준비 시간이 길어지면서 학자금대출 등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의 삶을 벗어날 길이 막막할 청년들을 생각하니 안타까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청년의 실업과 신용불량 문제를 합성해서 '청년실신'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일자리 미스매치, 무엇 때문인가?

이미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전후로 '청년실업'은 세계적 문제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적 코로나 19 상황으로 졸업생들의 취업 문이 더 단단히 잠겨 있다. 2년 전만 해도 2학기 강의시간에는 4학년생 중 졸업전 취업 결석생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19 상황에서 2학기 나의 강의를 수강했던 4학년생 4명 전원은 학기말이 되도록 열심히 출석했다. 취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원서를 어디냈냐고 묻자, 내 볼 데가 없다며 한숨이다.

최근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내놓겠다는 공공일자리 83만여 개, 청년일자리 8만여 개는 최저시급(2021년 시간당 8720원 적용)의 디지털 일자리나 사회서비스 일자리이다. 물론 이런 일자리도 시민 혈세로 만들어지는 소중한 것이다. 더군다나 청년시절에는 세상에 필요로 되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졸 인재가 하지 않아도 되거나 전망이 불투명한 일자리에 그러한 인력이 배치되면 일자리 미스매치(mismatch)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일자리 미스매치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다. 다시 말해 대학생들이 수 년간 열과 성, 돈, 시간을 바쳐 함양한 지식, 정보, 스펙 등이 쓰일 데가 없는 일자리라면, 지식기반시대에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닌가?

주지하듯 한국 25~34세 인구의 고등교육 이수율 69.8%는 세계적이다. 2017년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다음으로 높은 캐나다와 일본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60% 정도이고, 미국 48% 남짓, 독일 30%를 상회하고 있다. 고등학력을 갖춘 인재는 한 나라의 국력이자 세계시민사회를 이끄는 힘이다. K방역과 함께 K-Pop을 포함한 K문화가 그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러한 인재들의 창의성과 열정, 협업의 결과다.

한편 일자리 미스매치 문제의 주요 원인을 대학 교육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한 예를 KDI의 2020년 한 보고서("전공 선택의 관점에서 본 대졸 노동시장 미스매치와 개선방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일자리 미스매치의 원인을 사립대학 급증에 따른 교육의 질 저하와 학벌주의, 전공 정원 규제 문제, 진로 교육의 부족 내지 부재 문제 등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원인 지적에 대해 틀렸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현상에서 100% 정답이나 오답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대학교육 책임론만의 관점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정부 책임론과 사회 책임론을 묵과한 관점과 분석에 기반을 둔 보고서이다. 첫째 최근 대학 교육생태계를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2010년대 들어 정부가 대학에 들이댄 '대학평가'와 학자금 대출 제한이라는, 학생을 볼모로 한 칼날을 들이대자 대학들은 취업률을 높이거나 생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1학년 신입생은 입학하자마자 진로교육, 취업교육, 진로상담 등으로 대학이 그야말로 취업사관학교로 되고 있다.

특히 대학에서는 ICT(정보통신기술,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사회가 요구하는 해당 교육을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다. 1990년대 정보기술(IT) 바람이 불 때는 공학적 지식과 정보에 대한 교육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과 스마트기술이 확장되고 사회 전 부문에 걸친 변화와 함께 대학 교육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빅데이터나 파이썬, 코딩 교육 등이 문·이과, 전공을 불문하고 이루어지고 있다.

이 방면의 기초 지식이 약한 학생들의 경우 자율적으로 비싼 돈을 치르면서 배우기까지 한다. 예컨대 마케팅 공부를 해온 경영학 전공 학생들만 빅데이터 분석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인문학 학생들 중에도 빅데이터 분석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공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다전공 제도를 택하여 학생들이 새로운 사회적 수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 분야, 여러 전공을 공부하고 있다. 문제는 교육의 부족이 아니라 일자리의 부족이다.

둘째, 1995년 5월 31일 '대학설립준칙주의' 조치의 폐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김영삼 정부가 대학 자율화라는 미명 하에 5·31조치를 도입하면서 대학 정원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사회적 일자리 수요나 장래 인구 동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입학정원과 학과 증설, 대학 설립을 자율화시켰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 당시 출생인구를 보면 2010년 전후로 대학진학 예상인원이 감소하고 2020년 전후로는 급감할 것이라는 보고서도 있었다. 일부 대학교수들이나 교육전문가들은 대학의 양적 증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콩나물시루 교육을 했던 산업화 시대의 대학 체질을 바꿔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고 교육 시설, 방법 등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일자리 미스매치의 원인은 정부 정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대기업 이기심, 청년실신의 결정적 원인 아닌가?

셋째, 일자리 부족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대기업의 이기주의이다. 친기업성향을 드러냈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 대기업은 노골적으로 정부와 대학 당국에 신입생부터 기업이 요구하는 교육을 해달라고 압박을 가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의 인문학 구조조정론이 그 예가 아닌가? 그랬던 대기업들은 이제 와서 코로나 19 시대 탓을 하면서 경력자 우대를 하겠다며, 청년 인재들의 일자리를 없애가고 있다.

최근 언론에도 보도됐듯이 현대차, LG, SK그룹 등은 신입사원 정기 공채 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수시 채용은 현실적으로 경력자를 우대하고 채용 규모 역시 축소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반면 삼성전자는 새로 출범하는 미국 바이든 정부에게 170억 달러 규모의 5000~7000개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반도체 공장을 선물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초국적기업다운(?) 청사진이다.

대기업의 이기적인 태도에 의해 한국 청년들의 역량에 매치되는 신규 일자리는 계속 사라지고 있다. 대기업들은 청년들이 일할 수 있는 신규 일자리를 만드는 대신 현금성자산을 쌓고 있고 그 액수는 매년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그 보유액이 최소 107조 712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대기업은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1970, 80년 산업화시대 최저임금을 받으며 허리띠 졸라매며 일했던 노동자, 국산애용을 애국으로 생각하며 수출가격보다 비싼 가격의 상품을 묵묵히 사줬던 소비자들, 시민 혈세로 대기업을 위해 도로를 포함한 각종 사회간접시설을 만들어 주었던 것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심지어 이들은 수많은 파산 직전의 대기업들도 시민 혈세로 살려 주지 않았던가? 한국의 대기업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한 마디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청년 희망없이 사회의 미래 없다

100세 시대를 준비하는 청년들이 갖춰야 하는 지식과 스펙은 하나의 직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학시절 함양하는 지식을 통해 직업을 기반으로 한 풍부한 인생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고 사람들과 협업하며 만들어나가야 한다. 또한 그 지식은 하나의 직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직장과 가정, 사회와 국가, 세계를 이어나가는 철학이자 방법론이어야 한다.

더욱이 인간은 물건이 아니다. 오늘 팔리지 못한 재고 물건은 내일이라도 할인 판매가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오늘 일해서 자신과 가족, 사회를 먹여 살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며 정을 나누고 다양한 사회적 교류를 하며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일굴 수 있다. 그러나 실업자가 많아지고 취업이 되지 않은 개인이 모든 것을 유예한 삶을 살게 되면, 결국 개인의 고민도 깊어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 우울과 사회 정체 및 퇴행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청년들의 절망은 한국 사회에 절망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32조는 국민에게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청년실신을 만드는 국가는 헌법 위배이다. 한국 사회가 선순환하려 한다면, 정부와 기업은 상생의 가치로써 청년들을 위한 적정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국가의 책무이자, 대기업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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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옥

김귀옥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월남민의 생활세계와 정체성: 속초'아바이마을'과 김제 '용지농원'을 중심으로>(1999)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한성대 교양학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로 구술사 방법과 현지조사를 통해 분단과 전쟁, 여성과 민중, 이산가족과 디아스포라 등의 주제로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구술사연구: 방법과 실천>,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이산가족>(한국과 일본에 소개), <우리가 큰 바위얼굴이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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