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사업을 시작하고 대기업인 종근당과 계약하게 돼 정말 기뻤습니다. 계약하자는 회사가 많았지만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대기업인 종근당을 선택했어요. 이제 걱정 없을 줄 알았는데... 종근당의 무책임한 태도에 저희 회사는 지금 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의료기기 수입 업체 파마바이오코리아(파마)의 대표 방모 씨의 이야기다.
파마는 2018년부터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 종근당에 독감진단키트를 납품하고 있는 소기업이다. 파마와 종근당의 갈등이 시작된 건 지난해 코로나19 사태가 닥치면서다.
파마는 방 대표가 독감진단키트 '알소닉플루'만을 수입·판매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다. 방 대표는 3년에 걸친 노력 끝에 2018년 일본 제약회사 알프레사의 독감진단키트 '알소닉플루'의 한국 독점 수입권을 확보했다.
독감진단키트는 대체로 국산에 비해 수입산이 진단율이 높아 일선 병·의원에서는 수입산을 선호한다. 알소닉플루의 경우 진단율이 98%에 달해 파마와 계약하자는 회사가 많았다는 게 방 대표의 설명이다. 종근당도 그중 하나였다.
신생 소기업이 연 매출 1조가 넘는 대기업인 종근당에 납품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방 대표는 "게다가 종근당은 '앞으로 독감진단키트는 알소닉플루만을 취급할 것'이라 귀띔하며 독점계약을 요구했다"고 했다. 파마는 이러한 요구에 따라 그해 9월, 종근당과 독점계약을 맺는다.
발주서는 형식일 뿐, 구두로 이뤄지는 계약
전문가들은 납품 계약 관계에서 구두로 주문해 먼저 물건을 마련하고 발주서는 나중에 형식적으로 교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종근당과 파마의 거래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서 오간 발주서는 납품기일과 장소를 지정하는 용도에 가까웠다. 물량이나 시점 등은 발주서 교부 이전부터 구두로 통지해왔다는 게 방 대표의 설명이다.
일례로 파마와 종근당의 정식 계약은 2018년 9월에 이뤄졌다. 그러나 계약이 이루어지기 한 달 전인 8월부터 종근당은 파마에 "알소닉플루 30만 개를 주문할 것이니 물건을 준비해 놓으라"고 구두로 통지했다. 알소닉플루는 일본 본사에 주문이 들어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6주 정도가 걸린다. 반면 파마와 종근당이 맺은 계약서에는 '발주서가 교부된 후 2주 이내에 납품이 완료돼야 한다'고 돼 있다. 종근당이 원하는 납품일을 맞추려면 미리 주문해 물건을 준비해야 한다.
이에 따라 파마는 계약서를 쓰기도 전인 8월에 15만 개의 알소닉플루를 수입해 인천의 창고에 보관했다. 정식 계약이 체결된 게 9월12일, 5일 뒤인 17일 파마는 종근당으로부터 20만 개의 발주서를 받아 지정된 천안의 창고로 물건을 옮겼다. 모자란 수량은 10월 8일 15만 개를 더 수입해 채웠고 다음 해 1월, 종근당은 5만 개의 발주서를 보낸다.
종근당이 파마에게 구두로 준비하라고 한 물량은 30만 개, 실제로 발주한 건 25만 개로 그해 파마는 5만 개의 재고가 발생했다. 방 대표는 "종근당에 왜 5만 개는 구매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다른 제품을 구매했다고 했다"면서 "주문해 놓고 가져가지 않아 파마에서 재고를 그대로 떠안았다"고 했다.
코로나19 여파...독감진단키트 수요 줄어
5만 개의 재고를 떠안았지만 그나마 이때는 나았다. 다음 해인 2019년 5월, 종근당은 파마와의 미팅 자리에서 "이번 시즌에는 알소닉플루만 유통할 계획"이라며 "최소 30만 개 이상을 구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추석 전까지 각 병·의원에 알소닉플루를 공급할 수 있도록 여름 휴가 전까지 물량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파마는 이에 따라 알소닉플루 30만 개를 수입해 인천의 창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종근당으로부터 20만 개의 발주서를 받아 10일과 18일 각각 10만 개씩 출고했다.
10월, 종근당은 다시 파마에 "독감 유행 시즌을 대비해 추가적으로 10만 개를 더 확보해 놓으라"고 요청했다. 11월엔 양사 미팅에서 종근당이 구두로 제품 공급 요청을 했다고 방 대표는 주장했다. 12월에 10만 개, 다음 해인 2020년 1월에 10만 개의 발주서를 보낼 거라 이야기했다. 종근당의 요구에 따라 파마는 10만 개를 더 수입해 총 20만 개의 알소닉플루를 창고에 보관했다.
그러나 종근당의 발주서는 오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종근당은 발주서 보내기를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담당자가 바뀌었다"며 "이전의 구두 요청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종근당 측은 이에 대해 "(11월) 당시 미팅에서는 시장 동향에 따른 제품 물량 구비 방안 등에 대한 일반적 논의가 이뤄졌을 뿐이고 시장 동향에 대한 예측은 일반적인 업무 프로세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방 대표의 주장은 다르다. 방 대표는 관행에 따라 구두로 사실상의 계약을 했고 "새 담당자들은 자기는 모르는 계약이라며 물건 인수를 거절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방 대표는 "종근당에서는 (당시 계약 관련) 종이로 된 계약서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계약서는 2018년 독점계약을 체결할 때 한 계약서밖에 없다. 이 계약서에는 수량은 5만 개로 적혀 있고 단가 정도만 정해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계약서에 쓴 수량과 상관없이 종근당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수십만 개를 수입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초 계약서 이후에는 종근당에서 구두로 물건을 준비하라 하면 물건을 준비하고, 발주서가 오면 물건을 종근당의 창고로 보내는 식으로 진행해왔다"며 "이메일과 문자 등 담당자들과 소통하던 기록이 모두 남아 있다"고 했다.
방 대표가 공개한 이전 담당자와의 이메일에는 "(파마에 발주서 교부 이전) 10만 개 이상 확보를 요청했다"며 "매년 판매되는 수량이므로 사업부장, 본부장에게 구두 보고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방 대표는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종근당 내부에서는 이미 구두 납품 요청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방 대표는 "파마는 종근당에서 구매요청을 하지 않으면 그 정도 물량을 수입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방 대표는 종근당이 2019년 12월에 가져갔어야 하는 물건을 여전히 보관 중이다. 독점계약이라 다른 업체에 판매할 수도 없고, 올 4월이면 유통기한이 끝나 폐기해야 한다. 이를 수입하기 위해 은행에 진 차입은 약 10억 원, 창고 대여료 등 다른 부대 비용까지 고려하면 파마는 부도를 피할 수 없다.
왜 구두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종근당이 '갑'이고 파마가 '을'인 이상, '갑'의 심기를 거스르기가 어렵다는 게 방 대표의 설명이다. 실제로 많은 납품·하청 업체들이 '갑'과의 거래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현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구두로 납품 요청을 하는 데 '계약서 쓰시죠'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다는 것이다. 방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종근당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독특한 '갑과 을' 관계를 보여주는 현실이다.
샘플 무상 제공 거절한 괘씸죄?
파마처럼 독감진단키트 등 의료기기를 수입해 대형 제약회사에 납품하는 회사는 더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발주 물량이 줄어든 건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전에 구두로 30만 개를 요청했으나 사정이 어려우니 20만 개만 가져가겠다'는 식의 경우는 있어도 이번 사례처럼 구두 약속을 자체를 부정하고 물건을 아예 안 가져간 경우는 흔치 않다.
방 대표는 "독감진단키트를 수입하는 다른 회사들과 이야기해봤는데 준비하라고 한 물량을 아예 안 가져간 곳은 종근당 밖에 없었다"면서 '괘씸죄'에 걸린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2018년 종근당이 가져가지 않아 파마의 창고에는 재고로 남은 알소닉플루 5만 개가 있었다. 방 대표는 "종근당은 2019년 8월, 이 재고로 남아있던 시가 2억 원이 넘는 알소닉플루를 홍보용 샘플로 무상 제공하라고 요구했다"며 "그러면서 무상 제공하면 다음 해엔 60만 개 구매하겠다는 제안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2억 원은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회사가 감당하기에 힘든 액수였다. 방 대표는 종근당과의 협의 끝에 알소닉플루 8400개, 약 4000만 원 상당을 제공했다. 그해 종근당이 주문한 물량은 20만 개. 방 대표는 "'그때 무리해서라도 5만 개를 제공했더라면 지금 종근당이 이렇게까지 안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종근당의 요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2019년 8월과 9월에 각각 인천, 여수와 경주 등지에서 병·의원 대상 심포지엄을 열고 여기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파마는 수입해 납품하고 판매는 종근당이 하는데 정작 홍보는 파마에 떠넘긴 셈이다.
파마는 종근당의 요구에 따라 일본 알프레사의 연구원 등을 초청해 알소닉플루를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방 대표는 "연사 초청비와 항공비, 동시통역사 섭외비 등은 일본 알프레사와 파마가 나눠 부담했다"고 했다.
방 대표는 "파마는 알소닉플루만 취급하려고 만든 회사고 종근당과 독점계약을 맺어 종근당의 요청이 없으면 제품을 수입할 이유가 없는, 일종의 하도급 관계"라며 "그간 하던대로 종근당을 믿고 성실하게 물건을 준비했는데 파마의 잘못도 아닌 코로나19, 담당자 교체 등의 이유로 물건 인수를 거절하는 건 갑질이고 횡포"라고 주장했다.
지난 1년여 간 종근당과 협의하던 파마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한국공정거래조정원 공정거래분쟁조정협의회 제소했다. 한국공정거래조정원은 불공정거래행위 등으로 소송을 하기 전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설립된 공정거래위원회 산하 기관(특수법인)이다. 20일엔 파마와 종근당 간 첫 조정 절차가 이뤄졌다. 만약 조정원에서 조정이 불성립되면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할 수 있고, 공정위 조사 결과 법 위반 사실이 확인되면 이를 근거로 소송 제기가 가능하다.
종근당 "모든 거래는 서면 통해 이뤄진다"
파마 측의 주장에 대해 종근당은 "계약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종근당 측은 "종근당의 모든 거래는 서면을 통해 이루어지며 실무자가 임의로 구두 계약하는 경우는 없다. 파마와의 계약서에도 '물품 주문은 서면에 의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반박했다.
'계약 전 구두계약이 관행적으로 먼저 이뤄졌고, 을 입장에서 갑자기 계약서를 써달라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종근당을 믿고 관행으로 구두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냐'는 <프레시안>의 질문에 종근당 측은 "공식 계약이 이뤄지지 않았고 계약서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종근당 측은 파마가 종근당의 주문이 있기 전 임의로 수입한 후 갑자기 물량 인수를 요구해 온 것"이라며 "파마 측은 종근당의 주문이 있기 전에 선제적으로 제품을 구비해 두었고 천재지변에 준하는 코로나19 발생으로 엇나간 것"이라고 반박했다.
샘플을 무상 제공하도록 압박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샘플 제공은 제약업계의 일반적인 홍보 방식"이라면서 "종근당이 파마로부터 알소닉플루를 무상으로 받아서 판매하거나 이윤을 취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심포지엄 참가 요구에 대해서도 "종근당에 납품하는 모든 회사가 참가하는 정기적인 홍보용 심포지엄"이라며 "심포지엄 비용은 종근당이 부담했으며 파마에 비용을 전가하지 않았다. 이 심포지엄으로 종근당은 어떤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다만 종근당 측은 "파마가 본사와 거래한 중소기업으로서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고래해 한국공정거래분쟁조정원에서 파마의 입장을 확인한 후 파마와의 상생 도모를 위한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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