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참여연대에서는 가습기살균체참사전국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무죄라는 법원판결 무엇이 문제인가'에 참여한 박동운 한국방송통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이번 판결을 두고 "늘 반복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2일 법원은 SK, 애경, 이마트, 필러물산 등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회사에 무죄를 선고했다.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 메이트'가 화학물질 'CMIT', 'MIT'을 원료로 사용했는데, 이 원료 때문에 피해자에게 폐질환과 천식이 발병했는지는 형사소송법에서 정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지 못했다며 무죄 판결했다. 한마디로 제품과 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존재하나 가해자는 사라지는 셈이 됐다. 자연히 재판부의 이번 판결에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법에서 중요시하는 '인과관계'에만 매몰되다보니 정작 중요한 가습기 업체의 범행의도와 행적 등은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하는 병리 과학의 한계를 근거로 무죄를 선고했다는 점도 우려점으로 지적된다. 이번 재판 판결 대상은 '기업의 위법 행위'가 아니라 '과학의 본질적 한계'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어린이에게 치명적인 아스피린
과학적으로 '인과관계'를 따진 뒤, 이를 명확히 규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 견해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기업들은 적극 활용한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잘 알려졌으나 과거에는 아스피린의 부작용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다. 바이러스성 질환이 있는 아이들이 아스피린을 먹을 경우, 뇌나 간에 갑작스런 손상을 일으키는 '라이 증후군'에 걸릴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 라이 증후군은 걸린 어린이 3명 중 1명을 사망케 할 정도로 위험한 병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아스피린이 나온 지 한참이 지난 1986년에서야 판매되는 모든 아스피린 병에 이러한 내용이 담긴 경고문이 붙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수많은 아이들이 이 병에 걸렸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1980년 한 해에만 아스피린을 먹고 라이 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이 555명이나 됐다.
주목할 점은 아스피린과 라이 증후군 연구는 아스피린 병에 부착한 경고문 이전에도 꾸준히 진행됐다는 점이다. 연구 내용을 기반으로 보건 과학자들은 아스피린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했다. 그런데도 아스피린 병에 경고문이 붙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아스피린 제조업체의 반격이 거셌기 때문이다.
논리는 간단하다. 아스피린과 라이 증후군의 관계를 밝힌 과학적 연구가 '불완전'하고 '불명료'하다는 것이었다. 관련 연구에 대해 17가지 결함을 지적하며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학조사 속성상 절대적으로 완전한 결과가 나오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제조업체는 이를 요구한 셈이다. 경고문이 한참이나 뒤늦게 나온 이유다.
전가의 보도 '인과관계의 확실성'
이처럼 역학조사에서 완전성을 요구하는 '꼼수'를 부리는 것은 아스피린 제조사가 처음은 아니다. 납을 내뿜는 유연, 죽음의 먼지 석면 등을 제작한 업체들도 불확실성을 주장하며 자신들 제품의 '안전성'을 보위해나갔다.
보건의학 전문가들은 정부나 법원에서 요구하는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연히 불완전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비교적 낮은 수준의 노출에서도 석면이 폐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노출 수준별로 정확히 위험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제조업체들은 이러한 역학조사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불순한 의도로 이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렇듯 기업은 전가의 보도처럼 '인과관계의 확실성'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문제점을 피해간다. 무한한 자원과 인력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법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여 기업에 면죄부를 부여한다.
피해자들의 유일한 방어권인 법원조차도 이렇다 보니, 계속해서 비슷한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발생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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