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노동당 8차 대회 3일째인 7일 "조성된 형세와 변천된 시대적 요구에 맞게 대남문제를 고찰했으며 대외관계를 전면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우리 당의 총적 방향과 정책적 입장을 천명했다". 이를 두고 국내 일부 언론과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9일 북한 관영매체에 보도된 김정은의 대남 발언은 차갑고도 단호했다. 그는 우선 "북남관계의 현 실태는 판문점 선언 발표 이전 시기로 되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날 밝힌 "조성된 형세와 변천된 시대적 요구"의 의미가 2018년 이전으로 남북관계가 후퇴했다는 판단에 있었던 것이다.
그 핵심에는 군사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더 정확하고 강력하며 더 먼 곳까지 날아가는 미사일을 개발하게 될 것이라느니, 세계 최대 수준의 탄두 중량을 갖춘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느니 하던 집권자가 직접 한 발언들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권언' 무시당하자 결심했나?
기실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선언 및 9.19 군사 합의를 관통한 정신은 '선군(先軍) 협력'이었다.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가 촘촘하게 짜여 있어 조속한 경제협력 재개는 어려운 만큼, 군사 분야의 합의 및 이행을 통해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의 전환을 만들어보자는 데에 남북정상이 의기투합했다. 특히 "단계적 군축"이 사상 최초로 정상회담 합의문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후 문재인 정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에 나서고 말았다. 2019년 7월에는 김정은이 "권언"을 통해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남한의 군비증강 자제를 촉구했지만, 그 이후 상황은 권언이 무시당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결과 2017년 세계 12위로 평가받았던 한국의 군사력은 2020년엔 6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한미 연합 훈련도 계속되었다. 김정은이 "조성된 형세와 변천된 시대적 요구에 맞게 대남문제를 고찰했다"는 말한 것은 바로 이를 의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은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회복을 위해 제안한 방안들에 대해서도 차가운 반응을 내놨다. "현재 남조선 당국은 방역 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개별관광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꺼내 들고 북남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현시점에서 남조선 당국에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선의를 보여줄 필요가 없으며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 화답하는 만큼, 북남합의들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만큼 상대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남조선 당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까운 시일 안에 북남관계가 다시 3년 전 봄날과 같이 온 겨레의 염원대로 평화와 번영의 새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며 남측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우려되는 점은 김정은이 당대회에서 밝힌 대남 입장이 문재인 정부의 접근과 너무나도 엇박자가 크다는 데에 있다. 문재인 정부는 방역 협력을 남북관계 개선의 지렛대로 삼으려고 해왔지만, 김정은 정권은 "비본질적인 문제"라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김정은은 군사 문제를 남북한이 합의한, 그리고 남북관계 회복을 위한 '본질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군사강국을 향한 문재인 정부의 질주는 계속 되고 있고 김정은도 맞대응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매우 역설적이고도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사상 최초로 "단계적 군축"을 정상회담 합의문에 넣었던 남북한이 사상 최악의 군비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19 상황에도 불구하고 올해 국방비를 약 53조 원 규모로 책정했고 다양한 첨단무기 도입 계획도 밝히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김정은도 "국가 방위력 강화"를 천명하면서 다양하고도 위험한 신형 무기 개발 목록을 내놨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처음으로 "전술핵무기 개발"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나는 한미동맹 대 북한 사이의 군사력 격차가 심해질수록 북한이 꺼내들 수 있는 가장 유력하면서도 위험한 카드가 바로 전술핵이라고 주장해왔다.
가장 유력하다고 본 이유는 북한의 입장에선 전술핵이 가장 '가성비'가 뛰어난 무기로 간주될 수 있다는 데, 가장 위험하다고 보는 이유는 북한의 전술핵 보유시 한반도 군비경쟁과 안보딜레마가 격화되고 우발적인 핵전쟁의 우려도 커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북한의 전술핵 개발이 가시화되면 국내외에서 미국의 전술핵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질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국가 방위력과 관련해 김정은이 던진 메시지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면 당신들도 불안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조선반도 정세 격화는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의 안보 불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신뢰의 다리'와 '생명의 다리'
김정은의 이런 태도와 입장이 분명 유감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상당 부분 예견된 것이었고 문재인 정부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는 조속히 결단을 내려야 한다. 현재로서 유일한 대안은 조속히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마도 김정은이 말한 "우리의 정당한 요구"란 바로 이 문제를 가리키는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여러 차례 약속했던 바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연합훈련을 중단하면 전시작전권 환수가 물건너 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다. 하지만 이는 1차원적인 생각이다. 연합훈련을 강행하면 북한은 김정은이 말한 새로운 전략무기를 하나둘씩 선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되면 전작권 환수 조건은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연합훈련을 전작권 환수의 조건에서 떼어내고 훈련 중단을 선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국방비도 줄여야 한다. 이는 끊어진 남북관계에 '신뢰의 다리'를 놓고 최악의 민생 위기로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생명의 다리'를 놓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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