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개막된 북한 노동당 제8차 대회 개막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수행기간이 지난해까지 끝났지만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되었다"며 사실상 경제발전전략의 실패를 자인했다. 이러한 솔직한 평가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김정은은 지난해 8월 19일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혹독한 대내외 정세가 지속되고 예상치 않았던 도전들이 겹쳐드는데 맞게 경제사업을 개선하지 못하여 계획되었던 국가경제의 장성목표들이 심히 미진되고 인민생활이 뚜렷하게 향상되지 못하는 결과도 빚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경축 열병식에서는 인민과 군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이번 당대회에선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점이 눈에 띤다.
주목할 점은 총체적 실패의 원인 진단과 해법에 있다. 김정은은 경제 실패를 초래한 "도전은 외부에도,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다"면서도 "결함의 원인을 객관이 아니라 주관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관"을 강조한 이유는 "현존하는 첩첩난관을 가장 확실하게, 가장 빨리 돌파하는 묘술은 바로 우리 자체의 힘, 주체적 역량을 백방으로 강화하는데 있다"고 여기는 데에 있다.
특히 "노동자, 농민, 지식인, 당원" 등 대중에 대한 존중과 이들의 역할을 강조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중들의 의견을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들어본 결과 "대중이야말로 훌륭한 선생"이라는 것이다.
이는 향후 북한의 경제건설이 '톱다운(top-down)' 위주의 방식에서 '바텀업(bottom-up)'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인민대중을 단순히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의 주체'로 간주하겠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대중이 참여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중요한 함의를 지닐 수 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 및 태만과 실책이 줄어들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대중들의 동기 부여가 강해져 경제건설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중 참여형 접근은 인민들에게 공동체와 나라에 기여한다는 사회적 명망을 심어질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아직 당대회가 끝나지 않았지만, 북한의 선택지는 분명해보인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난관의 원인을 외부보단 내부에서 찾고 대중을 내부 문제 해결의 주체로 삼아 "정면돌파"를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외부적 원인의 핵심은 미국 주도의 강력한 경제 제재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역시 오랫동안 이 문제를 지적했었다. 주목할 점은 제재에 대한 김정은의 화법이 의미심장하게 변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1차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기대했던 제재 완화가 가시화되지 않자 2018년 8월 "강도적인 제재 봉쇄로 우리 인민을 질식시켜보려는 적대세력들과의 첨예한 대결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두 달 후에도 "우리 인민의 복리 증진과 발전을 가로막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굴복시켜 보려고 악랄한 제재 책동"에 대해 맹비난을 가했다. 인민들 고초의 원인을 제재로 본 것이었다. 그리고 북한의 대미 협상에 핵심적인 목표는 비핵화 조치에 순응하는 제재 해결에 맞춰졌다.
하지만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 노딜'로 끝난 이후에 제재에 대한 화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경제제재를 앞세워 "선 무장해제, 후 제도전복 야망을 실현할 조건을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제재 해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이) 지난번처럼 좋은 기회를 다시 얻기는 분명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는데, 이는 영변 핵시설의 완전한 폐기와 제재 완화를 맞바꾸자는 하노이에서의 제안을 의미한 것이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인 셈이었다.
그런데 2019년 연말에는 이러한 미련조차도 버리겠다는 화법이 등장했다. 김정은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에서 제재 해제가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지금껏 목숨처럼 지켜온 존엄을 팔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자력갱생"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당대회 개막사를 통해서는 제재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결함의 원인을 객관이 아니라 주관에서" 찾겠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의 전략 및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중대한 시사점을 준다. 2018년 4월 채택한 "새로운 전략 노선"의 핵심은 경제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미국과의 담판을 통한 제재 해결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장미빛 환상"이었음이 확인된 만큼, 제재 해결을 전제로 한 경제발전 전략보다는 "결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으면서 경제건설을 도모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판단인 것 같다.
이러한 진단이 맞다면, 향후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당사자들의 셈법도 복잡해질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들은 이미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에 제재를 가하면 결국 북한이 굴복하고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이러한 기대 자체가 '희망적 사고'였지만, 북한이 대화에 임한 데에는 제재 해결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진단한 것처럼 이는 과거의 북한이 될 공산이 크다. 이번 당대회를 거치면서 북한은 미국 등 국제사회를 향해 '제재할테면 계속 해라. 우린 우리의 힘으로 이겨내겠다'는 결기를 더욱 강화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곧 미국이 철석같이 믿어온 제재 효과가 더욱 약해질 것임을 의미한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제재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도 생각을 바꾸면 된다. 그것은 제재 유지·강화를 통해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긍정적인 조치에 걸맞게 제재를 풀어가는 것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곧 출범할 바이든 행정부를 집중적으로 설득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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