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11월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 꼭 읽어야 할 책' 100권에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 선정되었다. 책은 2016년 출간되어 한국 사회 여성들이 일상에서 특히 가정에서 겪는 차별과 불평등을 주제로 하였고, 많은 여성의 공감을 사며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 여성에게 '적합한 장소'?
한국의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 있을까?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은 2013년 한국에서 발간한 그의 저서 <끝나지 않은 혁명>(주은선·김영미 옮김, 나눔의집 펴냄)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에서의 여성 혁명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여성들에게 '적합한 장소'에 대한 매우 전통적인 규범이 한국인의 태도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적합한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여성의 고용률은 4.6% 증가에 그쳤다. 같은 기간 남성 고용률과의 차이는 불과 4.7% 감소했을 뿐이다. 그리고 2019년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여성의 활동 중 가사가 53.8%, 육아가 11.7%를 차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상당 수의 여성이 가정 내 노동을 담당하고 있다. 반면 교육부의 '교육통계연보'를 보면,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2003년 70%를 넘어섰으며 2005년부터는 남성보다 높은 대학 진학률을 보여 2018년에는 그 차이가 7.9%포인트에 이른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계속 높아지고 있음에도 여성의 고용률은 그와 비례하지 않으며, 많은 여성의 역할이 가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물론 여성의 고용률이 늘어난다고 해서 여성의 불평등이 완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한다고 해도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로 간주되는 가사와 돌봄 노동에 대한 부담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여성은 고용된 직장에서의 유급노동과 가정 내의 무급노동을 함께 떠안게 되고, 특히 자녀가 있는 여성, 즉 일하는 어머니의 부담은 더욱 가중된다.
근래 성평등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 교육이 시행되고, 육아에 대한 아버지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유명인인 아버지가 일정 시간 육아를 전담하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고, 바람직한 아버지상에 대한 이미지도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건복지부의 '2015년 저출산·고령화 관련 국민의식조사'에서는 맞벌이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은 5년 전보다 3분 증가한 40분이었고, 여성은 6분 감소한 3시간 14분으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2019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에서 나타난 맞벌이 부부의 가사 시간을 살펴보면, 여성은 하루 3시간 7분을, 남성은 54분을 가정관리와 돌봄 시간에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이 겪는 '시간 불평등'
맞벌이를 하고 있는 부부의 가사와 돌봄 시간의 차이는 결국 개인의 시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즉, 가정 내 무급노동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다른 한 사람에 비해 다른 활동을 할 시간이 적게 주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문제가 한쪽 성별, 즉 여성에게 집중되어 있다면 젠더 불평등이 가정 내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일제 유급 노동을 하는 여성에게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가정 내 무급 노동은 단순히 노동시간의 불평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무급 노동으로 인한 시간 압박은 다른 활동의 조정을 불가피하게 만드는데, 예를 들어 수면, 휴식, 여가 시간 등을 들 수 있다. 결국 여성에게 주어지는 시간 압박은 이러한 활동 시간에 제약을 가져와 여성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자녀의 존재가 여성의 시간 압박을 크게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녀를 갖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일하는 어머니의 이중 노동 부담, 시간 빈곤은 한국 사회의 저출생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한국에서의 여성의 비혼 증가와 출산 기피는 돌봄의 주책임자로 여성이 지목되는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시간 배분, 가정 내 무급노동의 문제는 정책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다.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중 저출산 정책과 관련된 주요 내용은 영아기의 집중 투자, 육아휴직 확대, 아동 돌봄의 공공성 강화, 다가구 자녀에 대한 지원 확대이다. 남성의 육아휴직을 독려하는 정책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여전히 젠더 평등이나 일하는 어머니의 무급노동에 관한 실효성 있는 정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성평등은 시간의 분배까지 다루어야
누구에게나 하루의 24시간은 동일하게 주어질까? 양적인 시간의 양으로 계산한다면 동일하다고 답할 수 있겠으나 질적인 면에서의 24시간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특히 개인이 선택할 수도, 조절할 수도 없는 조건인 '젠더'가 미치는 영향은 강력하다. 유급노동과 돌봄 노동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일하는 어머니에게 더욱 그렇다.
에스핑 안데르센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서 여성들에게 적합한 장소가 가정이라는 규범이 한국인의 태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결국 성평등의 문제는 단순히 고용률, 임금격차에서만 바라보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시간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의 문제로 확대시켜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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