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에서 보내오는 기고글을 통해 블랙리스트부터 코로나19까지를 관통하는 실질적 문제와 쟁점들을 공유할 예정이다. 블랙리스트 권고안 전반에 대한 점검과 비판, 예술인권리보장법, 배제되는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의 목소리, 블랙리스트 가해자들의 안부, 동물복지보다도 무관심하다는 예술인복지와 예술인고용보험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위기에 놓인 예술계의 문제를 사회 전반에 알리고 블랙리스트와 같은 국가폭력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편집자
기억을 더듬어보면 2016년 9월의 끝 무렵 즈음이었던 것 같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비상회의로 소집되었다. 내용인즉슨 일간지 어느 기자가 어떤 문서를 발견했는데, 전체문서는 아니고 문서 중 일부인데 예술인들의 리스트였고, 그 내용은 어떤 시국선언에 참여한 이름들이었다. 이른바 예술인 블랙리스트 사건의 시작이었다.
처음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솔직히 역대정권들이 예술가들을 돈이나 권력으로 알게 모르게 통제하던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리스트가 있다는 것은 몰랐지만 이미 2015년과 16년에 수많은 예술작품과 예술가, 예술단체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업에서 배제되거나, 지원이 철회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되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해졌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간단한 이유로 분류되고 함부로 배제되었다. 그 이유란 것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했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간 이유는 온 국민이 가슴 아파 쩔쩔매던 세월호사건의 진상규명에 동의했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이 예술계에 알려지게 되면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당연히 분노였고, 다른 하나는 허탈함이었다. 분노야 너무도 당연했지만 그 분노의 결은 조금씩 달랐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업지원을 그런 이유로 철회할 수 있었겠나 하는 측이 있었고, 어떻게 그런 이유로 사람을 구분하고 관리하려고 드는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사회를 반영하는 예술의 본성,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표현의 자유를 이렇게 대놓고 짓밟는 게 21세기 민주사회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분노는 “박근혜 정부가 제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가들을 배제하고 통제하여 예술계를 쥐락펴락하고 고사시키려고 했다”는 것에 맞닿아있었다.
그리고 허탈감을 느낀 이들의 마음은 서늘했다. 이 블랙리스트의 주요 활용도는 정부지원사업에서의 배제였다. 다시 말해 정부가 지원금을 주는 사업에서 빼야할 사람들의 리스트였다. 정부에서 지원사업을 받기 위해 단 한번이라도 사업기획안을 써본 사람들은 안다. 자신이 작성하는 지원사업 기획안에는 자신의 의지도 들어있으나, 돈을 줄 기관이 이번 해에는 어떤 방향의 사업을 원하는지, 제목은 어떻게 써야 그들의 눈에 들지, 사업목적과 기대효과에 지원기관에 어떤 도움이 된다고 써야할지 전전긍긍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돈을 줄 기관의 마음에 들어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기획안의 완성도나 사업의 목적성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리스트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빼어난 기획안을 만들어냈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니, 기획안을 잘 써서 지원을 받게 되고 공연을 준비해서 극장까지 대관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리스트에 들어가게 된 순간, 공연 하루 전 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극장을 뺏기기도 했다.
처음부터 기회는 없었다. 그걸 모르고 어떻게든 그들의 입맛에 맞출 수 있겠는지 밤을 새우며 전전긍긍했었던 시간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 허탈함은 모멸감으로 예술가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다시금 분노로 바뀌었다.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5년이 된 지금도 예술가들에게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어느 시대에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예술가들을 묶어서 배제하고 통제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많은 이유와 근거를 이야기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의 시작은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 예술지원정책의 모순으로부터 발생하게 된다.
우리나라 예술계 지원은 대부분이 예술'사업'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격년으로 지원이 가능한 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지원금이 있으나, 그 대상이나 폭이 너무 한정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지원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 그 지원을 받기위해 반드시 받아야하는 '예술활동증명'도 방식의 간소화와 현실화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각종 정부부처, 광역단위 문화재단, 기초단체들까지 한결같다. 예술가들이 창작과 예술행위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초생활에 대한 지원은 없다. 기업은 출연을 하든, 주주를 모으던 어떤 방식으로라도 사업자금을 마련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공장을 돌리고, 회사를 운영하고 상품을 판매해서 이익을 창출한다. 그런데 예술은 그 사업자본이 예술가 자신이다. 그런데 그 예술가의 생활은 예술활동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상품이 될 때도 하지만, 그보다는 주로 무형의 사회적 가치로 환원되기 때문이며, 예술가의 작업장이 대체적으로 회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대체적으로 일명 아르바이트를 한다. 편의점, 보험외판, 식당서빙, 커피숍 점원, 택배, 대리기사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로는 간신히 생계를 이어갈 뿐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펼칠 재정을 마련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하려면 사업기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사업기획안을 만들고 기일이 맞춰 제출한다. 예술가들에게 연말연시는 사업기획안과 정산서류를 쓰느라 정신이 없는 시기다. 그러나, 작성해서 내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기획안이 선택받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정부정책 또는 기관의 입맛에 맞는 기획 또는 창작을 하려고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루뭉술하게 은유적으로 표현하거나, 에둘러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이 다만 예술적이어서만은 아니란 얘기다. 정부의 예술지원정책에 길들여진 예술가들은 자기검열이 체화되었다고 하면 너무 과한가? 이것이 싫어서 아예 지원사업에 등 돌린 예술가들은 많지만 지원사업을 고민하는 예술가들 중 이 부분에 절대 아니라고 부정할 예술가들은 거의 없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졌을 때 예술가들 모두가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2016년 예술계 블랙리스트사건이 터지고 막바로 최순실국정농단 사태로 세상이 들썩이고 시민들의 힘으로 마침내 대통령이 바뀌었다. 세상이 송두리째 바뀌진 않는다해도 예술계블랙리스트사건처럼 어이없고, 상식밖의 일은 해결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새로운 정부에게서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고, 조사는 요란했으나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처벌은 거의 전무했고 오히려 블랙리스를 실제로 집행했던 행정관료는 얼마 후 영전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이고 실질적인 재발방지 조치나 법률은 아직이다.
예술가들의 예술작품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비해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한미한지 느끼고도 남는 대목이다. 그리고 예술계 지원은 여전히 사업비를 지원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예술계는 직격탄을 맞은 곳이라고 또 요란한 조명을 받았다.
1년을 공들여 준비한 사업들은 줄줄이 취소되었고, 공연장과 전시장은 무조건 문을 닫아야했다. 손가락을 빨다빨다 발가락을 빤다는 웃픈 얘기가 돌았고, 차비가 없어서 집밖에 나올 수가 없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어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정부는 허둥지둥 지원책을 마련한다고 야단이었다. 지원책이 허술하다는 지적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팬데믹이라는 상황은 누구라도 대책을 세우기 녹록치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코로나19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예술가지원은 또 한번 예술가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줬다.
2020년 예술계지원이 진행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긴급한 예술가들의 생계를 위해 내놓은 지원책이 프리랜서 지원금이었다. 프리랜서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수입이 없으니 그에 대한 지원금을 받는다는 것인데, 프리랜서인 예술가들 대부분은 수입이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더구나 예술계의 특성상 증빙이 어렵다. 그런데 작년도 대비 수입을 증명하라고 한다. 그런데 작년에도 예술사업으로 돈을 번 적이 없는 예술가는 이것을 증빙할 길이 없다. 그래서 지원대상이 안 된다.
그리고 사업자등록증이 있어도 받기 어렵다. 프리랜서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고용이 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업자등록증으로 자영업자인 경우 당연히 해당이 안된다. 그런데 공연업에서는 정부나 기관에서 작은 지원사업이라도 받으려면 사업자등록증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해마다 변변한 소득신고할 것도 없는 사업자등록증을 만들어 두었는데 이번에는 그 사업자등록증이 발목을 잡는다. 수입이 없어서 의료보험을 가족의료보험으로 편입시켰더니 의료보험금이 너무 많아서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런 사례가 숱하다
지원대상이 되는 경우는 단순한데, 안 되는 이유는 너무 많다. 어떻게든 가난을 증명해야하는데, 경제활동영역에 포함되지 않으니 증빙할 길이 없는 사람들, 2020년 코로나19예술계 지원책은 예술가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그래도 전년도 기획안을 내서 다행히 2020년 예술사업비를 받은 사람들은 좀 낫지 않았을까?
여기는 또 나름의 다른 고충이 있었다. 문제는 지원금이 있어도 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사업비를 받았다면 그 사업을 집행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업비를 다시 반납해야했다. 그런데 공연장과 전시장은 열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호흡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공연사업을 비대면 공연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제안하고 그걸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래서 2020년 공연계는 비대면 공연이 대부분이다. 지원금을 받았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받은 지원금으로 대관료를 내고, 배우들에게 출연료라도 줄수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연극 콘서트 등 관객과 호흡하는 무대예술을 동영상으로 찍는 것을 가능하다 는 정부의 발상에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연극과 영화가 장르를 구분하는 이유는 도통 고려되지 않는다. 정부는 어째서 이것을 고려하지 않을까? 명목이 예술지원정책인데 정작 해당예술의 특성과 그것이 유지, 발전되는 것에는 도통 고려가 없이 행정편의적인 태도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보는 정책담당자나 행정관료들은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어려운 예술가들을 돕기 위해 정책을 입안했는데 이렇게 불평불만만 쏟아놓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의로 시작된 일이라도 받아들이는 당사자에게 그 의도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서운해 할 일이 아니라 즉각 시정해야 그 선의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의 예술지원정책만으로 본다면 최소한 예술가와 그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 입장이 없다. 예술가를 그저 경제적 약자로 봐서는 절대 예술계의 위기를 타개할 수도, 발전적 지원을 할 수도 없다. 제발 ‘마인드’를 바꾸시길 요구한다.
코로나로 일어나는 예술계의 위기는 예술가의 위기다. 누구도 자유롭게 다니고 모일 수 없는 이 시기에 예술가들 역시 작품창작은 집이든 작업실이든 혼자서 할 수 있으며 당장은 어렵더라도 방도는 찾아볼 일이다. 그렇지만 집에 혼자 남은 예술가들은 살길이 막막하다.
전에 없이 택배물류가 늘어난 상황에서 우리끼리는 새로 시작한 택배기사 중 절반은 연극쟁이들일거란 얘기도 한다. 내 주변 많은 남자배우들은 배달의 민족이 되고 쿠*맨이 되었다. 그래도 남성배우들은 나은 축이다. 그조차도 쉽지 않은 여성연극인들은 더욱 열악하다.
예술계 위기를 타개하고 싶다면 예술가들을 돌봐야한다.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작품들은 상품이기 이전에 사회적 가치이다. 예술가들의 예술행위와 그를 통해 창조된 예술작품은 구매당사자만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사회가 돌봐야하고 그것은 엄연히 국가의 책임이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지금의 예술계지원은 사업지원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광범위한 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관리했던 이유는 그 존재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인데, 실제로 지원을 할 때는 존재를 지원하기보다 사업을 지원한다.
지금처럼 사업비를 줘도 사업이 어렵고, 그나마도 일부를 선정하는 방식, 선정된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제각기 배분되는 방식 등등으로는 예술가들의 창작도, 그것을 가능하게 할 생계도 해결할 길은 요원하다.
또 하나 예술가들을 지원하려고 한다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이 맞다. 비대면 공연을 예를 들기도 했지만, 정작 예술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도통 들을 생각이 없다.
10여년 가까이 정부당국은 협치란 표현을 쓰며 시민들의 뜻을 듣고 그 뜻에 맞는 정책을 만들겠다고 해왔다. 그래서 이러저러하게 간담회, 공청회란 이름으로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이야기를 듣고 모아, 하나의 의견으로 만들어 당사자인 예술가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끼칠 정책을 입안할 때는 예술가들의 동의여부는 구하지 않는다. 아무리 의견을 넘치도록 이야기해도, 결정권자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듣고자 애를 쓴다면 그 진정성을 알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있는 집행이 있어야 한다. 예술계와 간담회자리든 공식적인 자리에서 예술계지원에 대해 논의해야한다. 예술가와 문체부와 입법부까지 동수로 구성된 공식기구를 띄워 장단기를 포함한 예술계 지원을 위해 같이 지혜를 모으고 만들어갈 때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지원정책이 만들어 질수 있다.
그럴 때 블랙리스트 사건의 재발도, 당사자들은 도무지 혜택을 받기 어려운 지원정책도 사라질 것이다. 그 대상이 되는 예술가들이 우리사회에서 모두 사라져 버리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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