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사건을 넘어 사람에 대해 애정을 기울였던 의뢰인 A가 자살했다. 눈망울에서 영민함이 배어 나오는, 똑똑하고 예쁜 청년이었다. 하지만 A는 외로운 아이였다.
사건을 맡았을 때는, 이미 A가 공갈죄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건을 수사 단계에서 맡았더라면 A가 불기소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당시 검사가 A에게 요구했던 것은 '낙태를 했다'는 객관적인 증거였다. A는 임신테스트기를 찍어 그 남자에게 보낸 사진이나 대화 기록은 많았지만, 단 한 장 단 한 줄의 의료 기록도 얻을 길이 없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낙태는 불법이었다. 병원은 불법을 자인하는 확인증을 써주지 않았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병원 입장도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A는 낙태수술비 절반과 그 남자의 엄마와 싸우다 다친 손가락 치료비 10만 원을 더해 60만 원을 요구한 공갈죄로 기소됐다.
사실 검사가 낙태 관련 증거를 요구한 건 A를 기소하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연인이었던 그 남자의 배신 행위와 그 남자의 엄마에게 받은 상처, 아이를 낙태해야 하는 아픔 속에 A가 그 남자와 곱게 대화했을 리 만무했다. 날 선 말이 넘쳐나고 금전 요구가 있었으니, 공갈죄 성립 요건은 갖춰진 셈이었다.
A가 공갈죄로 재판받는 법정에 그 남자가 증인으로 나왔다. A의 옛 연인인 그 남자는 해당 사건의 피해자였다. 그 남자는 "A의 협박으로 1년이 넘게 A의 집에서 어쩔 수 없이 성관계를 했다"고 말했다.
나는 신문을 하다가 울화가 치밀어, "협박을 당하니 흥분이 돼서 발기가 되었다는 말이냐?"라는 아슬아슬한 질문을 했다. 그 남자는 판사에게 피고인의 변호인이 자신에게 성적수치심을 주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판사는 그 남자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나의 증인신문이 끝난 뒤 검사는 반대신문을 하지 않았다. 당시 판사도 검사도 모두 남자였다. 낙태죄 재판도 아니었고 형량이 중한 사건도 아니었지만, 여성에게 낙태가 무슨 상황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다.
만약 '낙태죄 폐지' 이후라면, 사건의 결과가 달라졌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병원에서 없던 진료기록을 만들어주진 못해도, 의사든 간호사든 A를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낙태 시술을 받았다'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만약 14주에서 단 하루라도 넘겼다면? 낙태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이라면 모를까, 14주라는 시간의 기준을 하루라도 넘은 사건 역시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통상 그런 입장에 놓인 여성들의 삶이 풍요롭고 여유 있을 리 없다. 난감한 일은 열악한 환경에서 보다 빈번하게 발생한다.
낙태죄를 둘러싼 공방의 쟁점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다. 이걸 마치 '여성 대 남성'의 문제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같은 착각은 남성들은 생명을 중시하는데 여성들은 생명보다 자기 몸을 중히 여긴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 낙태죄 공방은 긴 시간 남녀의 대립 구도처럼 펼쳐졌지만, 그건 맞지도 않고 온당한 것도 아니다.
낙태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축복받는 임신과 함께하는 육아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날을 희망하며… A의 영면을 빈다.
* 이은의 변호사의 칼럼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가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일상생활 속 성희롱·성폭력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언제든, 어떤 사연이든 언니에게 털어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은의 변호사 메일(ppjasmine@nate.com)로 보내주세요.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