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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선택한 자살은, 당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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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선택한 자살은, 당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지훈 변호사의 법과 책]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죽음의 이미지

죽음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베트남 전쟁 중 AP 통신사 기자가 촬영한 사진 '사이공식 처형'이다. 처형되는 자가 실은 일가족 7명을 죽인 혐의를 받았던 악명 높은 베트콩이었다는 사실이 이 사진의 감동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곧 닥쳐올, 그러나 절대 원치 않았을 죽음을 앞두고 있다. 찡그린 눈과 일그러진 입, 힘이 들어가 조여든 목 근육과 긴장되어 오그라든 몸은, 임박한 죽음을 날것으로 전달해준다. 우리 역시 화면 가장자리의 목격자와 같은 심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단말마적 장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 에디 애덤스 AP통신 사진기자 1968년 2월 1일 베트남 전쟁 중 사이공에서 촬영한 '사이공식 처형' 사진. ⓒ구글

우리 모두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지만 죽음 직전을 느닷없이, 이만큼 명징하게 경험하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닥쳐올 운명을 외면한 채 무감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어떤 소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은 지금은 없지만 아주 없지는 않은 무엇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끝내 외면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는 대로 생각하는 우리의 관성 때문일까, 그저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삶 자체를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일까.

자살의 이유들

조수경의 소설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한겨레출판 펴냄)는, 그렇게나 피하고 싶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삶의 마감을 기다리며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을 '센터'에서 보낸 후 자살에 이르게 된다(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가까운 미래로 보인다). 여기서 이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에 해당하는 존엄사나 치명적인 질병과 고통에 따라 행해지는 안락사가 아닌 '순수한 자살'임을 염두에 두자.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서우는 이제 막 서른이 되었는데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 중퇴하고, 히키코모리로 살아오다 몇 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센터에 입소한다. 주인공은 수년간 가족과도 말 대신 문자를 보내는 식으로 스스로를 유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곳 죽음의 센터에 와서야 친구들을 사귀고 말하기 시작한다.

기러기 아빠로 살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장,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로 인해 오히려 죽음을 바라는 20대, 열정적인 젊음을 다 보낸 후 소멸밖에 남지 않은 생을 정리하려는 60대, 자기 인생의 전부였던 글쓰기를 할 수 없게 된 작가, 연이은 혈육들의 자살로 죽음의 DNA가 새겨져 있다고 믿는 룸메이트까지. 이들에게 나름의 사연은 있지만, 육체적 질병과 고통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정신적 고통만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존엄사나 안락사와 달리 취급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이들의 선택을 이해하고 마침내 긍정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인가? 오히려, 열심히 살며 인생을 향유하다가 어느 시점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다면, 이 결정을 비난할 수 있는 근거란 무엇인가?

▲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조수경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자살을 처벌한다는 것

소설 속 센터에서 맞이하는 죽음의 장면은 이렇다.

"의사가 한 여사님에게 약을 건넸다. 의료인이 주사를 놓는 것이 아닌 스스로 약을 삼키는 방식. 그것은 타인의 도움은 조금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기 의지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의미였다."(<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186쪽)

의료진은 그들에게 알약을 줌으로써 자살을 조력하고 있다. 소설의 근미래는 아마도 법을 개정한 상태를 가정했겠지만 현재 한국의 형법에 의하면, 불행하게도 약을 건넨 의사 역시 처벌받는다.

형법 제252조(촉탁, 승낙에 의한 살인 등)

① 사람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그를 살해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 사람을 교사 또는 방조하여 자살하게 한 자도 전항의 형과 같다.

자살의 방조에는 '타인이 자살함에 있어서 총이나 독약 등 자살 도구를 제공하는 유형적 방법과 고통 없이 자살할 수 있는 기술적 조언이나 정신적 격려를 해주는 무형적 방법'을 포함한다.(<형법 각론>, 임웅 지음, 법문사 펴냄) 하급심 판결 중 인터넷 자살 카페의 개설자가 가입 초대장을 발송하는 방법으로 회원을 모집한 후 자살 방법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도록 한 행위를 자살방조죄로 판단한 경우도 있다.

자살방조죄에는 형법 이론상 특이한 면이 있다. 형법의 '공범종속성' 원칙을 깨기 때문이다. 공범종속성이란, 쉽게 말해 정범(흔히 말하는 '주범')이 처벌되지 않으면 공범(교사범, 방조범과 같은 '종범')은 당연히 처벌받지 않는다는 원칙이다(더 들어가면 공범의 종속 정도에 대해서도 복잡한 형법 이론이 펼쳐진다). 그런데, 위에서 본 자살방조죄의 경우 자살을 하거나 자살에 실패한 정범은 처벌하지 않는데, 그를 도운 종범, 교사범이나 방조범이 처벌되는 것이다(일부 이슬람 국가들은 자살미수범도 처벌한다).

한편, 이론적인 차원에서 자살 자체를 범죄로 볼 수 있을까. 자살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는 견해와 범죄라는 견해가 대립한다. 범죄가 아니라는 의견은 '인간의 생명을 개인이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법익'으로 이해하는 개인주의·자유주의 생명관을 바탕으로 한다. 반대로 범죄론자는 '생명은 개인이 자유로이 처분할 수 없는 법익'이므로 자살은 실질적으로 범죄이지만, 형사정책적 견지에서 처벌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죄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형법 각론> 인용)

논리적일 수 없는 것, 인간적인 것

어쨌든, 결국 센터의 의료진이 자살하는 자에게 '알약을 건네주는 행위'는 그의 자살을 도운 것에 해당하므로 자살방조죄에 해당한다.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지만, 이 작품에 자살에 성공하는 자는 많지 않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한 여사'가 생의 마지막 날 열었던 파티다. 자살 직전 칵테일 파티를 여는 것이 정신 나간 짓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어쩌면 자살이 적어도 수동적인 선택만은 아니라는 것, 삶이라는 과정에서 축제처럼 적극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삶의 정확한 마침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닐까. 한 여사는 마지막 가는 길에 백합으로 꾸며진 옥상을 통과한 후, 약을 먹곤 '향기 참 좋네' 하고 잠꼬대처럼 낮게 중얼거리고 웃으며 잠이 든다.

ps. 어떤 균형감을 위해 정영수의 단편 소설 <더 인간적인 말>(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펴냄)도 함께 읽어보자. 이 작품 역시 건강한 이모의 '순수한 자살'을 다루지만 자살 주변인의 혼란과 남겨진 자의 고통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과 차별점을 갖는다. 이 작품의 해설에서 안지영 평론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애당초 죽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이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 심연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한다. 법적·도덕적 책임과 무관하게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구체적인 책임 의식, 혹은 연대 의식이 바로 죄책감의 정체는 아닐까. 한 사람의 죽음은 '그의' 죽음인 것만은 아니다. (중략)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음에 대해, 그리하여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부단히 '인간적이고자' 하는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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